영화감독협회 이사장 선출과 관련해 법정 소송을 벌인 정진우, 이민용 감독의 대표작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인샬라>

영화감독협회 이사장 선출과 관련해 법정 소송을 벌인 정진우, 이민용 감독의 대표작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인샬라> ⓒ 영상자료원



영화계 보수 진영의 온상으로 원로 감독들의 터전이 돼 왔던 한국영화감독협회(이하 감독협회)가 세대교체와 함께 새로운 개혁을 이뤄낼 수 있을까? 이사장 선임 과정에서 소송까지 갔던 영화감독협회 갈등에 최근 법원이 젊은 감독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개혁과 정상화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 21부는 지난 23일 이민용 감독을 비롯해 젊은 감독들이 낸 '한국영화감독협회 총회 무효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총회 절차상에 중대한 하자가 있어 결과 자체가 무효'라며 '새로운 이사장을 선출한 총회 결의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감독협회(당시 정인엽 이사장)는 지난해 12월 17일 임원 개선 총회를 통해 임기 3년의 새 이사장으로 정진우 감독을 선출했다. 하지만 선거 직전 투표권이 있는 정회원 자격을 정리하면서 현장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창동, 봉준호 감독 등 53명을 선거권이 없는 특별회원으로 돌려놨다. 이게 이번 소송의 불씨가 됐다.

당시 감독협회는 "총회 때마다 참석 회원이 적어 안건 처리에 어려움이 생겨서 연락이 잘 안 되는 감독들의 회원 자격을 조정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선거권을 박탈당한 감독들이 대부분 이민용 감독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원로감독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감독협회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인 조치를 했다는 시선이 많았다. 

"이사장 선출 무효판결로 감독협회 정상화 단초 마련"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이민용 감독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이민용 감독 ⓒ 이민용

선거가 끝난 후 이민용 감독은 정병각, 정지영, 장현수 감독 등 39명의 감독들과 함께 총회 무효 소송과 이사장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 등을 법원에 냈다. 가처분 신청은 판결이 미뤄지며 결정이 나오지 않았으나 본안 소송 판결이 나오면서 결국 승리하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 이민용 감독은 27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재판 결과가 좋게 나와 감독협회 정상화의 단초가 마련됐다"면서 "일단 이겼기 때문에 다른 감독들과 함께 향후 과정을 논의해 볼 예정이나 감독협회를 바꿔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어 "정상화가 잘 이뤄지면 젊은 감독들이 주축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영화감독조합'을 감독협회로 잘 끌어들여 영화감독들을 하나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며 "특별한 기회가 온 것 같다"고 밝혔다.

이 감독은 소송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다고 밝혔다. 소송이 시작될 즈음 일부 언론에서 뜬금없이 영진위원장 공모에 신청했다는, 사실과 다른 보도가 나와 정치적 욕심이 있어 나서는 것처럼 오해를 받았고, 이를 빌미로 상대측에서 소송 참여 감독들에게 접근해 소송 취하를 설득하는 등 분열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인해 피해를 봤다는 것이다.

이 감독은 이후 과정에 대해 "판결을 바탕으로 법원을 통해 감독협회 직무 대리인을 지정하고, 임원개선총회를 소집해 새로운 이사장을 선임하겠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는 정진우 감독은 본안 판결에 따라 자동적으로 직무정지가 되거나, 본안 소송과 함께 제기했던 '이사장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통해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세대교체와 개혁 성공 시 영화계 끼칠 영향 클 듯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 정진우 감독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 정진우 감독 ⓒ 성하훈

한편, 법원의 판결에 정진우 현 이사장 측은 당혹스러움을 나타내고 있다. 정진우 이사장은 28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말하고 싶지 않다"는 입장만 밝힌 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영화계의 한 인사는 "정진우 감독 측은 항소를 하는 대신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통해 감독협회 내부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이민용 감독은 "정진우 감독이 생각하고 있는 비대위라는 것이 법리에도 맞지 않고, 판결에서 승소한 측이 이의를 제기하면 법원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재판에서 이긴 여세를 몰아 추가 조처를 통해 빠른 시간 안에 감독협회를 정상화 시키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감독협회는 한국영화인총연합회(이사장 정인엽 감독)에 소속돼 그간 보수 원로 영화인들의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정권이 바뀐 지난 2008년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배우 문성근과 명계남은 영화계를 떠나라며 비난했고. 영진위는 해체와 영화은행과 영상진흥원을 설립을 요구하는 등 우파적 시각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최근 이사장 선거 과정에서 빚어진 원로 감독들 간의 갈등과 전임 이사장과 관련된 각종 비리가 드러나면서 위상이 실추됐다. 따라서 젊은 감독들을 중심으로 한 세대교체와 개혁에 성공할 경우 단순히 감독협회 차원뿐 아니라 영화계 전반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영화계는 이념적 편 가르기를 앞세운 지난 조희문 영진위원장 시절 편향된 정책과 온갖 비리와 전횡으로 대립과 갈등만을 양산했으나, 이들이 해임되고 지난 3월 김의석 영진위원장이 취임하면서 이러한 혼란들이 잦아들고 있다.  

보수원로영화인들, 영화인복지재단 놓고 고소 고발 대립중
정인엽 감독은 불구속기소, 정진우 감독은 검찰 수사 시작

 지난해 춘사영화제를 준비하면서 한 자리에 모인 영화인들. 아래줄 좌측에서 네번째가 정진우 감독. 다섯번째가 정인엽 감독

지난해 춘사영화제를 준비하면서 한 자리에 모인 영화인들. 아래줄 좌측에서 네번째가 정진우 감독. 다섯번째가 정인엽 감독 ⓒ 영화감독협회


젊고 개혁적인 감독들이 재판에 승리함에 따라, 최근 감독협회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영화계 갈등이 어떤 흐름으로 전개될지도 관심거리다. 보수 원로 영화인들과 진보적인 젊은 영화인들 간의 신-구, 보-혁 갈등이 있어왔지만 최근에는 보수 원로 영화인들이 돈 문제를 놓고 서로 다투면서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고 있어서다.

현재 보수 원로영화인들은 정진우 감독 측과 정인엽 감독 측으로 갈려있다. 정진우 감독이 10년 넘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영화인복지재단' 운영 문제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면서 양측의 다툼이 심해진 것이다.

원로 영화인들의 돈 줄인 '영화인복지재단을' 정진우 감독이 오랜 시간 차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정인엽 감독 등 다른 영화인들이 부실 운용과 유용 가능성 등을 제기하며 이를 공론화시켰고, 정진우 감독은 왜곡과 모함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반박해 왔다.

이 과정에서 정진우 감독은 지난 감독협회 이사장 선거에 출마했고, 조직력을 바탕으로 이사장에 당선됐다. 그는 당선 다음날 곧바로 남산의 감독협회 사무실로 가서 주요 서류 및 컴퓨터를 자신의 강남 사무실로 옮겨왔는데, 이후 한 달여 지나서 감독협회가 주관하는 춘사영화제 공금횡령 비리 문제가 드러나 정인엽 직전 이사장이 경찰의 조사를 받은 후 불구속 기소됐다.

정인엽 감독 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지난 5월 영화인총연합회 산하에 구성된 '영화인복지재단 정상화 촉구 조사위원회(위원장 김갑의)' 이름으로 정진우 감독을 '영화인복지재단 기금 유용 혐의'로 고발했다. 검찰은 지난 6월 7일 정식 수사 결정을 내려 정진우 감독도 검찰 조사를 피할 수 없게 됐다.

"돈을 놓고 벌이는 원로들의 추악한 다툼일 뿐"

양측 모두 서로의 비리가 많다는 주장을 펴면서 인신공격까지 가하고 있는 사안이라, 검찰의 수사 결과와 법원의 재판 결과가 주목된다. 돈 문제에 따른 보수 영화인들의 다툼은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격언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 영화계 인사들의 시각이다.

이들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진보개혁성향 영화인들이 은연중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모습이다. 영화인들의 여론이 어떠냐에 따라 저울추가 한쪽으로 기울 수 있어서다. 이 때문에 젊은 감독들의 선거권을 박탈해 문제를 일으켰던 정인엽 감독 측은, 이제는 반대로 젊은 감독들이 재판에 승리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지지하는 모습을 엿보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양비론적 시각을 취하며 거리를 둔 채 양쪽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정인엽 감독 측 인사들은 영화계 갈등을 크게 유발했던 조희문 전 영진위원장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영화계 좌파 척결 목소리에 적극 동조했던, 이른바 우파를 자처하는 영화인들이 중심축이다. 정진우 감독도 보수 원로로서 영화계 좌파 청산을 외쳤지만 조희문 전 영진위원장 시절 빚어진 온갖 전횡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해 다른 모습을 나타냈다. 다만 복지재단에 대한 문제기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 

이민용 감독은 "정진우 감독이 이사장이 된 직후 예전 감독협회의 비리를 척결하는데 앞장 선 부분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다른 영화계 관계자는 "한 개인이 영화인복지기금을 오랜 움켜쥐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굳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밝혔다. 돈을 놓고 벌어지는 추악한 다툼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국영화감독협회 영화 이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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