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의 줄거리가 들어 있습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은 물론 화장실에 갈 때도 붙어 다녔다. 새 학년을 앞두고 헤어질 것이 안타까워 담임선생님을 찾아가기까지 했다. 같은 반에 배정해 달라는 애원에 선생님은 당연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잔소리를 하셨다.

누구는 국제결혼을 해 외국에 살고 있고, 누구는 서로 의가 상해 민원을 넣느니 마느니 시끄럽다가 그예 등을 돌렸고, 누구는 또 가까이 살지만 서로 바빠 가물에 콩 나듯 얼굴 보며 산다.

여기까지는 내 이야기고, 영화 속 칠공주 그룹 <써니>의 친구들은 25년 동안 서로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살았다. 친정어머니의 병실을 찾았다가 우연히 오래 전 친구 '춘화'를 만나게 된 '나미'. 말기암으로 죽음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춘화의 소원은 그 때 그 친구들을 만나는 것.

영화 <써니>의 포스터  영화 <써니>의 포스터

▲ 영화 <써니>의 포스터 영화 <써니>의 포스터 ⓒ (주)토일렛픽쳐스 외


실적 없는 보험설계사인 '장미'가 합류해 흥신소를 통한 친구찾기에 나선다. 살림과 육아와 시어머니 수발에 꼼짝 못하는 문학소녀 '금옥'. 우아한 척 내숭을 떨며 살고 있는 욕쟁이 '진희'. 몸과 마음이 망가져버린 미스코리아 지망생 '복희'까지 찾았지만, 단 한 사람 '수지'만은 종적이 묘연하다.

영화는 전혀 모범생이 아닌, 오히려 불량기 있는 일곱 명 소녀들의 신나면서도 아슬아슬하고 우스우면서도 객기 넘치는 고등학교 시절과 40대 초반의 중년인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누구는 욕이 많이 나온다고, 또 누구는 불량한 아이들의 패싸움이 눈쌀 찌푸리게 한다고 평을 했다. 맞다. 욕 많이 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욕이란 그들 나름의 경계를 만들고 서로를 끈끈하게 엮는 도구이기도 하다. 패싸움에서 지면 또다시 싸움을 거는 악순환이 위험하고 안타까웠지만 분명 존재하는 일이기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학교 축제 행사에서 '수지'가 큰 상처를 입게 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 혹은 젊었을 때, 아직 세상 무서운 걸 모를 때는 어이 없을 정도로 무서운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는 것.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받는 것이 젊음의 때이기도 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 아닐까. 세상이, 삶이 얼마나 무섭고 엄혹한지를 모르는 것이다.

영화 <써니>의 한 장면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

▲ 영화 <써니>의 한 장면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 ⓒ (주)토일렛픽쳐스 외


다시 만난 친구 아줌마들이 의기투합해 나미의 딸을 괴롭히는 패거리들을 혼내주기도 하고, 아무튼 왁자지껄한 친구들이 다시 만났으니 엄청 소란스럽다. 그러던 중에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예정되어 있던 춘화의 부음이 전해진다. 흰 국화에 둘러싸인 춘화의 영정, 나미가 그려준 초상화 속에서 춘화는 기분 좋게 웃고 있다.

그 자리에 변호사가 나타나고, 사업가로 성공한 춘화의 유언장이 공개된다. "야, 이 년들아!"로 시작되는 춘화의 유언장, 춘화는 친구 한 사람 한 사람의 필요에 맞는 선물을 남긴다. 누구에게는 당부의 말, 누구에게는 일할 수 있는 기회, 누구에게는 돈, 누구에게는 재활 치료비와 자녀 교육비를 남긴 것.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열심히 연습했으나 그 때 수지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끝내 공연할 수 없었던, 노래 '써니'에 맞춘 춤을 다같이 춘다. 이것 역시 춘화의 당부였던 것. 친구의 영정 앞에서 신나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친구들...누가 이걸 예의 없고 막돼먹은 장례식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영화 <써니>의 한 장면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난 친구들

▲ 영화 <써니>의 한 장면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난 친구들 ⓒ (주)토일렛픽쳐스 외


말기암인 춘화는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고, 죽음이 몇 달 남지 않았다는 것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파 고통에 몸부림 치는 모습을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았지만, 친구가 보게 되었을 때는 또 그대로 인정한다.

거기다가 죽기 전에 꼭 한 번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는 소원을 드러내 놓고 말한다. 친구들이 다른 친구들을 찾느라 바쁜 중에, 춘화는 차근차근 자기의 죽음을 준비한다. 친구들에게 필요한 것을 헤아려 유언장을 작성하고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물론 다 같이 해주었으면 하는 것, 춤을 춰달라고 당부한다.

춘화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친구들의 재회는 미루어졌거나, 아님 영영 이루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죽음은 이런 것. 잊고 살았던 소중했던 때를 기억하게 만들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저 깊은 가슴 밑바닥에서 끄집어 내기도 한다.

다행히 가진 것이 많아 춘화는 친구들에게 필요한 물질적인 도움까지도 남기고 떠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온 역사를 까맣게 잊고 살았던 친구들 가슴에 그 시절, 그 만남을 기억하게 해주고 다시 손잡고 중년의 강(江)을 건너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닐까. 자기 몫까지 즐겁게 살라며.

다시 만나는 것을 포기했던 '수지'가 마지막에 나타난 것처럼 우리들 생은 예기치 못한 일들로 가득차 있고 예측불허의 연속이지만, 때로는 아프고 애달픈 죽음을 통해서도 우리는 만남의 새 역사를 써나가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는 또 하나의 죽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써니 Sunny, 2011>(감독 : 강형철 / 출연 : 유호정, 진희경, 고수희, 홍진희, 이연경, 김선경 등)
써니 친구 우정 죽음 죽음준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