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무슨 이유로 마시게 되었나요?"

알코올의존증(요즘 일본에서는 '알코올중독'이라 하지 않고 '알코올의존증'이라 하지만 여기에선 그냥 알코올 중독이라 하겠다)에 걸린 사람들이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다. 영화 <술이 깨면 집에 가자>에서 '즈카무라'(아사노 타다노부)는 알코올 중독환자다. 그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절박하게 대답한다. 

"원인을 알면, 병을 고칠 수 있나요?"

<술이 깨면 집에 가자>는 알코올중독에 걸린 '즈카무라'가 이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일본의 보도 카메라맨 '카모시다 유타카'라는 인물의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즈카하라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들이 있다. 겉으로 보기엔 부족할 것 없지만 그는 심각한 알코올중독 환자다. 원인은 모른다. 술을 마시면 난폭해졌던 아버지가 있던 불우한 가정 탓인지, 종군기자 시절 캄보디아에서 겪은 정신적 충격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즈카하라는 아내와 이혼하고,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코올중독 전문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다.

내용만 보면 상당히 건조하고 비극적인 영화일 것 같지만 이 영화는 시종일관 따뜻하고 유머러스하다. 즈카하라는 이혼했지만 부인은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고 있고 두 자녀도 아빠를 그리워한다. 즈카하라 역시 부인을 사랑하고 있다. 알코올중독만 아니라면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가족이다.

 영화 <술이깨면 집에가자> 한장면. 가즈하라는 가족들로부터 치유받고 마침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된다

영화 <술이깨면 집에가자> 한장면. 가즈하라는 가족들로부터 치유받고 마침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된다 ⓒ 전주국제영화제


 알콜중독자라고 해서 늘 비참한 삶만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힘든 사람이라도 나름의 희로애락이 있다. 감독은 그걸 보여주고 싶었단다. 영화 <술이 깨면 집에 가자>의 한 장면.

알콜중독자라고 해서 늘 비참한 삶만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힘든 사람이라도 나름의 희로애락이 있다. 감독은 그걸 보여주고 싶었단다. 영화 <술이 깨면 집에 가자>의 한 장면. ⓒ 전주국제영화제


영화 속에서 즈카하라를 둘러싼 환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가족이고 또 하나는 정신병원이다. 알코올중독 전문 정신병원이라면 왠지 무섭고 비인간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알코올중독 환자들은 여유 있고 심지어 천진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저마다 다 아픔과 고통은 있다. 그러나 여간해선 내색하지 않는다.  

즈카하라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속에서는 그가 '왜' 알코올중독환자가 되었는지 그의 고통과 상처에 포커스를 맞추기보다는 그가 어떻게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가며 치유되어 가는지, 그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알코올중독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며 그 안에도 희로애락이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주려 한다. 즈카하라는 외유내강 아내의 사랑과, 주변 사람들의 관심으로 인해 점점 정상적인 삶을 되찾게 된다.

찌질하지 않아서 멋지긴 한데...

이 영화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따뜻하고 평화롭다. 아무리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순간,장면에서도 유머와 평상심을 잃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사들은 대부분 과감한 생략과 압축, 비유로 되어 있다. 주인공들은 구질구질하거나 찌질하게 시시콜콜 다 얘기하지 않는다.

즈카하라의 부인, 유키는 영화 속에서 단 한 번도 얼굴을 붉히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알코올중독자, 사고뭉치, 의처증까지 있는 남편인데 유키는 얼굴을 한 번도 찡그리지 않는다. 남편이 각혈을 하고 앰뷸런스에 실려가도 태연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한다. 외유내강이라기엔 너무 무섭다. 의사로부터 남편의 생명이 몇 개월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조차 유키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때는 슬픔이 기쁨인지, 기쁨이 슬픔인지 모르겠어요. 슬픔이 내 안에 가득 차 오르면 그게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르겠어요."

의사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자 유키는 미소를 지으며 '이해받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녀들은 왜 울지 않을까?

너무 슬프면 슬프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듯, 아마 유키도 그런 극한의 슬픈 경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듯 일본영화나 소설에서는 현실의 고통을 체념 또는 달관한 듯한 주인공들이 자주 등장한다. 자신의 감정에 지나치게 빠져 다른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는 것을 '민폐'라고 생각하는지, 일본 영화의 주인공들은 좀처럼 소리내어 울거나 웃거나 고민을 속시원히 털어놓는 법이 없다. 자신의 감정과 '거리두기'다. 그래서 일본 영화나 드라마들은 한결같이 깔끔하고 단정하며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다.

가즈하라의 어머니도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 아무리 한일 문화의 차이라 해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다. 아들이 알코올중독 환자인데 어머니는 백조처럼 우아하다. 아들이 취해서 떡실신이 되어 들어와도 거실에서 우아하게 분재를 하고 있다. 아들이 정신병원에 갈 때도 엄마는 너무 멋지고 말끔하다. 눈물 한 방울 찍어낼 법 하건만 그런 법도 없다. 아들을 병원에 넘기고는 제 역할을 마친 배우처럼 무대 뒤편으로 총총히 사라진다.

그런 모습들이 좋다, 나쁘다는 게 아니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문화 차이로 느껴졌다. 물론, 아들이 그 모양인데 속 편한 엄마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그런 모습은 과감히 생략한다. 그런 구질구질한 감정표현은 남에게 폐를 끼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영화나 소설의 등장인물은 우리에게 영 낯설다.

관동대지진... 대단한 '일본국민' VS 쓸쓸한 '일본개인'

이 영화를 보고난 후 이상하게 지난 관동대지진 쓰나미 사건이 떠올랐다. 그때 세계는 침착하게 남을 배려하는 '일본 국민'의 모습에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구호소에서 나눠준 주먹밥을 각자 혼자서 외롭게 먹는 '일본 개인'의 모습은 참으로 쓸쓸해 보였다.

그래서 이 영화 <술이 깨면 집에 가자>는 참 따뜻하고 평화롭긴 해도, 내 가슴을 뒤흔들진 못했다. 나는 끝까지 즈카하라에 몰입하지 못했다. 그가 왜, 그렇게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지. 그가 어떻게 마음을 차츰 열게 되었는지, 그걸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예쁘고 곱긴 하지만 왠지 결정적인 매력이 없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랄까. 아사노 타다노부도 알코올중독자라기엔 너무 곱상했다. 부인으로 등장하는 '니가사쿠 히로미'의 연기가 돋보였다.

"알코올중독자에게도 희로애락 삶이 있다"
<술이 깨면 집에 가자>의 히가시 요이치 감독
영화상영 후 히가시 요이치 감독과의 대화시간이 이어졌다. 히가시 요이치 감독은 1934년생. 우리 나이로 74세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어는 "괜찮아요"란다. 짧고 간결하고 위트있는 대답이 퍽 감각적이었다. 매우 빠르고 쿨하고 재치있는 분이라는 느낌. 다음은 히가시 감독과의 대화를 요약한 것이다.

 출판사에도 '영화가 안될 것 같다'며 포기했던 원작 소설을 히가시 요이치 감독이 적극 주장해서 영화로 만들게되었다.

출판사에도 '영화가 안될 것 같다'며 포기했던 원작 소설을 히가시 요이치 감독이 적극 주장해서 영화로 만들게되었다. ⓒ 안소민

- 이 영화의 원작이 소설이라고 들었다. 영화를 만들게 된 배경은?
"원작자 '카모시타 유카타'씨가 책을 가지고 와서 영화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출판사 측에서는 '영화로 만들기 힘들다'고 했지만 내가 강력히 하자고 했다."

- 그 이유는?
"요즘 일본 텔레비전이나 영화에는 가벼운 예능프로그램들이 너무 많다. 모두 웃는 이야기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가슴 아픈 사람도,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도 많다. 하지만 가슴이 아픈 사람이라고 해서 희로애락이 없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코올중독자라면 매우 비참하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 거라고 예상하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삶이 있다. 즐거움도 있고, 알콜달콩함도 있다. 이 영화를 알코올중독자들에게 보여줬더니 모두 박수치며 공감했다." 

- 부인 '유키'캐릭터가 매우 인상적이다. 캐릭터는 감독이 창조했나?
"실제로 원작에 나타난 그대로다. 원작자의 부인 역시 만화가인데 현명하고 강한 여성이다."

- 일본에는 유난히 가정이나 소소한 인물관계를 다룬 작품이 많다. 이제는 소재가 고갈되어 더 이상은 안 나오겠지 싶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새로운 작품이 등장한다. 그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또한 감독은 사회의 문제에는 관심 없나?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인간 대 인간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가족은 인간사회의 가장 기본단위다. 인간을 다루지않고서는 사회문제도 다룰 수 없다."

- 엔딩신의 바닷가 장면이 인상적이다. 바닷가를 생각한 이유는? 그리고 즈카하라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장면이 있는데 뭘 의미하나?
"라스트신은 원작자와 미리 결정한 거다. 함께 바다로 하자고 결정했다. 그리고 영화를 찍는 중간에 원작자가 세상을 떴다. 원작자가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영화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알리고 싶었다."

- 유키의 대사 "슬픔이 기쁨인지, 기쁨이 슬픔인지 모르겠다. 가슴에 슬픔이 가득차오르면 그게 정말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르겠다"는 대사는 원작에 있는 건가? 
"그건 내가 만든 대사다. 그런 대사를 지금껏 세상 어느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겠다.(웃음)"

 관객과의 대화 도중, 다음 영화 상영 스케쥴에 쫓겨 상영관을 빨리 비울 수 밖에 없었다. 요이치 감독은 로비에서 못다한 관객과의 대화를 나누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관객과의 대화 도중, 다음 영화 상영 스케쥴에 쫓겨 상영관을 빨리 비울 수 밖에 없었다. 요이치 감독은 로비에서 못다한 관객과의 대화를 나누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 안소민




전주국제영화제 술이깨면 집에가자 아사노 타다노부 히가시 요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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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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