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가 개봉되었다. 일흔 다섯 살 나이에 새로운 작품을 세상에 내보냈다는 사실은 흐뭇하다. 자신을 영원한 현역으로 생각하는 임 감독은 영화를 향한 도전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가 운이 좋거나 혹은 관객이 관대하거나 혹은 영화가 훌륭하거나 때문일 터다.

<달빛 길어 올리기> 광고전단에 다음과 같은 감독의 말이 실려 있다.

"<달빛 길어 올리기>가 나의 101번째 작품이 아니라, 새롭게 데뷔하는 신인감독의 첫 번째 작품으로 불렸으면 한다. 지난 100편의 작품에서 도망쳐 새로운 느낌의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여든을 바라보는 감독의 바람치고는 상당히 강력하다.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의 자세는 본받을 만하다. 기왕에 구축된 자기 세계에 탐닉하는 매너리즘과 거리를 두려는 의지가 확연히 읽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만든 영화와는 다른 영화가 되기를 바라는 감독의 마음이 오롯하게 포착된다. 과연 그리 되었는가.

한지는 왜 좋은 종이로 수용되지 못했나

 임권택 감독의 101번 째 새로운 시작 <달빛 길어올리기>

임권택 감독의 101번 째 새로운 시작 <달빛 길어올리기> ⓒ 달빛 길어올리기


아침저녁으로 우리는 종이와 만난다. 신문을 읽고, 신문에 딸려온 광고전단지를 본다. 화장실과 식탁에서도 종이와 대면한다. 통학을 하거나 출근을 하거나 지하철과 버스에서 일간지와 책을 벗 삼는 사람들과 무시로 마주친다. 디지털과 영상시대가 도래하여 종이수요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종이라는 아날로그의 향수를 잊지 못한다.

우리는 한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저 한옥의 장지문에 바르는 종이 정도로 한지를 연상할 뿐이다. <달빛 길어 올리기>는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달한다. 전주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여서 그런지 오랜 전통과 예스러움이 영화 곳곳에서 묻어난다. 주인공인 필용(박중훈)이 부서를 옮겨가는데, 그곳은 한(韓)자 일색이다. 한옥, 한지, 한식, 한복...

세계에서 종이를 가장 잘 만드는 종이강국이 있음을 처음 알게 됐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태국과 중국, 일본이 그런 나라다. 영화는 우리에게 중국의 선지(宣紙)와 일본의 화지(畫紙)를 소개한다. 화지와 선지의 결합체인 화선지를 한지와 비교하여 양자의 차별성을 부각한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왜 한지는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일까.

1613년 '훈련도감'에서 목판본으로 처음 출간된 <동의보감>과 1666년 다시 찍어낸 최치원의 <계원필경>을 담아낸 한지의 우수성이 영화에서 여러 차례 부각된다. 얇으면서 질기고, 부드러우면서 단단하고, 투박하면서 고아한 재질의 한지. 그런데도 세계는 한지를 화지나 선지처럼 빼어난 종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지의 세계

<달빛 길어 올리기>에는 한지가 제작되는 과정이 들어있다. 눈 밝은 관객은 참닥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다듬고 삶고 걸러내서 마지막에 종이를 뜨는 장면 전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지의 다른 이름은 백지다. 재미난 것은 흰 백(白)이 아니라, 일백 백(百)이라는 사실이다. 흰 종이가 아니라 손이 많이 가는 종이란 뜻이다.

쌀미(米) 자에는 88이란 수가 들어있다. 그래서 여든여덟 살을 미수라 부른다. 쌀을 얻는데 인간의 엄청난 수고가 담겨있다는 뜻이다. 한지는 그것보다 열두 번이나 더 손이 간다고 한다. 그런 종이에 <조선왕조실록>이 담겨져 있다. 국보 제151호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을 담는 틀이자 그릇이 전통 한지였던 것이다.

한지는 책으로만 쓰인 것이 아니었다. 영화는 그것을 도처에서 보여준다. 이를테면 필용의 처 효경(예지원)이 '종이공예'를 하면서 만든 종이 주전자와 물잔, 종이로 만든 요강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시집가던 새댁이 가마 안에서 토악질과 소변을 보도록 만들었다던 종이요강. 이런 다채로운 한지의 세계를 영화는 기록영화처럼 느린 속도로 제시한다.

병든 아내 효경의 집안내력 역시 종이를 뜨는 가업을 이어왔던 사람들이었다. 천한 직업에 종사했다고 하여 시댁에서 늘 천대받았던 효경. 한편 기록영화 감독인 지원(강수연)은 유럽에서 한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허둥댔던 기억 때문에 한지에 대한 기록영화에 몰두하고 있다. 지원이 만났던 한지 패션쇼의 충격과 기억이 그녀를 전주로 내몬 셈이다.

남루한 일상과 헐거운 얼개

필용은 한지를 복원하여 종이에 담긴 뜻을 살려내고, 한지 대중화로 문화를 통한 수요창출을 시도한다. 그것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4개의 사고 (史庫) 가운데 유일하게 전화를 피한 전주사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을 복원하는 일이다. 이것은 역사와 문화, 기능과 기술, 전통과 현재가 만나 조화로운 상생가능성을 가늠해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좋은 일에는 늘 마가 끼는 법이다. 과도하게 업무에 몰입하는 필용은 직장에서 견제대상이 된다. 특히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직속상관인 과장과 사사건건 충돌하게 된다. <달빛 길어 올리기>에서 우리는 낯익은 장면과 만난다. 술집에서 한지 문제를 논의하다가 필용과 과장이 삿대질을 해대며 멱살잡이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 한번쯤은 나왔음직한 장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흔쾌하게 내면을 드러내고 흐드러지게 말을 섞다가 어느 사품엔가 감정이 차고 넘쳐서 싸움질로 넘어가는 바로 그 장면. 그것이 <축제>든, <천년학>이든, <하류인생>이든 이른바 임권택 표 영화에서 아주 자주 만나게 되는 장면이 그런 드잡이와 몸싸움 아니었는가.

거기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남루하고 허접한 일상을 본다.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는 끈끈한 일상과 거기서 발원하는 관계의 중층적인 엮임과 섞임. <달빛 길어 올리기>에는 그런 관계가 약하게 드러나지만, 여전히 그것은 우리의 심금을 아프게 찔러온다. 영화의 허술한 얼개 때문에 일상의 억압은 더 강력하게 우리를 옥죄는 것 같다.

이규보의 <영정중월(詠井中月)>과 안타까움

<달빛 길어 올리기>에서 우리는 고려시대의 문사 이규보의 <영정중월>을 본다.

"산에 사는 스님이 달빛을 탐내/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네/ 절에 돌아와 비로소 깨닫네/ 병을 기울이면 달도 함께 비게 되는 것을"

영화에서 이규보의 한시는 다소 변형되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달빛이 너무 탐나/ 물을 길러 갔다가/ 달도 함께 담았네/ 돌아와서야 응당 깨달았네/ 물을 비우면/ 달빛도 사라진다는 것을..."

그러하나 시에 담긴 본질은 똑같이 유지된다. 자연과 물아일체의 경지에 노닐고자 하는 바람, 즉 물에 담긴 달빛마저도 소유하지 않으려는 초연한 자세는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 대목은 아주 짧고도 스치듯 지나간다. 필용과 그의 아내가 결혼하기 전에 겪은 청춘 스케치의 한 장면을 위해 삽입된 주제곡의 가사 정도로 활용된다.

철학적 깊이를 내포한 이규보의 <영정중월>이 흘러간 추억을 되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 그것도 일회용으로 재활용조차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깝다. 외려 영화에 등장하는 도암 스님의 작지 않은 욕망, 부처님께 공양할 질 좋은 종이를 떠내기 위해서라면 약간의 환경오염도 괜찮다는 발상이 생뚱맞게 다가온다.     

임권택과 베르톨루치

영화를 보면서 베르톨루치를 생각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를 시작으로 <마지막 황제>(1987)를 거쳐 <몽상가들>(2003)에서 보여주는 거장의 면모를 떠올린 것이다. 인간의 육체와 거기 스민 사회성 내지 사회의식을 날카롭게 조명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올해 일흔한 살이 된 그 역시 노 감독으로 여전한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베르톨루치가 과거에 보여준 자신의 영화 세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임권택 감독 역시 그가 지금까지 그려왔던 인물과 세상과 관계로부터 그다지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시도이자 신출내기 감독의 데뷔작품으로 수용되기를 희망한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는 기록영화와 예술영화의 조합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적잖게 새롭다.

그럼에도 임권택이라는 상표가 전과 다름없이 도처에서 빛을 발하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새로워지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그에게 고유한 영화적 시각과 영상미학, 세계관 등은 유지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거장이란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지, 명시적인 선언으로는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삼 그의 차기작을 기대한다.

한지 임권택 베르톨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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