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의원 페인과 주지사가 공석중인 상원의원 후보로 스미스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는 사이 곁에서 두 사람의 후원자인 테일러가 지켜보고 있다.

상원의원 페인과 주지사가 공석중인 상원의원 후보로 스미스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는 사이 곁에서 두 사람의 후원자인 테일러가 지켜보고 있다. ⓒ 컬럼비아영화사


6대 국회 시절인 지난 1964년 봄. 당시 민주당 초선 의원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원고도 없이 본회의에서 5시간 19분이나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같은 당 김준연 의원이 박정희 정권의 정치자금 비밀을 폭로하자 공화당이 구속동의안을 상정시켰고, 이에 김 전 대통령이 '필리버스터' 즉, 의사진행방해에 나선 것입니다.

우리 국회에도 필리버스터가 있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상임위로 국한되어 있고 본회의에서는 같은 주제에 대해 고작 2회, 15분만 발언할 수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필리버스터로 구속동의안 처리가 무산된 뒤, 50년 가까이 유신시대의 족쇄가 채워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지난해 미디어법 날치기에 이어 '형님 예산'과 '마누라 예산'을 정점으로 '날치기 공화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당의 이런 전횡을 원천봉쇄할 수는 없을까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본회의장에서의 필리버스터를 부활시키고, 의장 직권상정을 폐기하면 됩니다. 이 필리버스터로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에 희망의 메시지를 띄운 영화가 있습니다. 정치영화의 고전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1939년작)입니다.

세상물정 어두운 촌놈, 상원의원이 되다

잭슨시의 상원의원이 임기 중에 급사합니다. 또 다른 상원의원인 조세프 페인(클로드 레인즈분)은 주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새 상원의원을 물색하라고 합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페인의 후원자인 짐 테일러(에드워드 아놀드)의 댐 건설 계획에 함께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주지사는 보이 레인저스라는 소년단을 이끄는 제퍼슨 스미스(제임스 스튜어트)에게로 시선을 돌립니다. 아이들과 다람쥐나 잡으러 쫓아다니며 세상물정 어두운 촌놈 스미스야말로 '테일러 거수기'에 제격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아이들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는 스미스가 입당할 경우 아이 한 명에 부모 표 두 장이 덤으로 따라 올 것이라는 얘기는 매력적입니다.

얼떨결에 상원의원이 된 스미스는 워싱턴으로 향합니다. 그리곤 오랜 꿈이었던 잭슨시의 월워크 계곡에 환경친화적인 소년 캠프장을 만들 계획을 착착 세워갑니다. 하지만 그곳은 테일러가 이미 주변 땅들을 차명으로 사들인 상태. 페인과 스미스 등이 중심이 되어 상원에서 댐 건설 법안을 통과시키면 자신이 차익으로 떼돈을 벌 속셈이었던 것입니다.

영화는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스미스가 정치판의 쓴맛을 보면서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합니다. 물론 영화는 미국적 가치와 정치적 이상주의에 발목이 잡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화의 메시지가 식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화의 시퀀스가 4대강 예산안 날치기와 기막히게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잔물결이 일렁이는 초원 위를 달리며 볼을 스치는 바람결과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을 따라 꿈과 이상을 꿈꾸길 바라는 스미스의 캠프장과 이명박 정부의 4대강은 상극입니다. 그리고 댐 건설 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감행하는 스미스의 얼굴위로 고인이 된 두 전직 대통령의 얼굴이 오버랩 됩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에 맞서다

 워싱턴으로 간 스미스 상원의원이 소년단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월워크 캠프장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워싱턴으로 간 스미스 상원의원이 소년단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월워크 캠프장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 컬럼비아영화사


영화가 개봉되던 그해 <스미스씨>는 아카데미상 11개 부분 후보로 올랐음에도 당시 보수진영은 이 영화를 '반미', '좌파'영화라고 싸잡아 매도했습니다. 영화의 행간을 읽다보면 예나 이제나 보수우익의 좌파 '낙인찍기' 수법이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워싱턴에 도착한 스미스는 비서 사운더스의 도움으로 월워크 캠프장 계획을 발표합니다. 얼마 뒤 사운더스는 테일러의 계획을 스미스에게 털어 놓고 부패와 협잡이 난무하는 '워싱턴 정치'를 떠납니다. 한편 댐 건설 법안 통과로 누이 좋고 매부 좋게 나눠먹으려던 테일러와 페인은 땜빵으로 앉혀 놓은 새파란 녀석 때문에 공든 탑이 무너지게 됐습니다.

테일러까지 상경해 댐건설은 공익을 위한 것이고,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정치라며 스미스를 회유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되로 받으면 말로 주어야 까불지 않는 법. 테일러는 스미스가 상원의원이 된 다음날 불법으로 월워크 계곡의 땅을 매입해 되팔려고 한 파렴치한이라고 공작을 펼칩니다. 결국 그의 책략대로 스미스는 청문회에 회부되고 페인이 위증까지 하자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낙향하기 위해 가방을 싸고 링컨 기념관에 들른 스미스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링컨의 연설문을 읽고 다시 의사당으로 돌아갑니다. 마침 페인의 댐 건설 법안이 상정되고 스미스는 법안을 막기 위해 잠시 쉬지도 먹지도 자지도 않고 24시간에 걸쳐 연설을 하는 필리버스터를 감행합니다.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정부가 구성된 것이며,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주권자인 국민은 이를 교체할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늘 독립 선언문의 정신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부정하는 세력이 있다면 마땅히 응징되어야 합니다."

신념을 지키고 진실을 말하는 필리버스터

의원석에선 당장 발언을 중단하라며 난리를 치지만 스미스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정치권의 부패를 질타합니다. 스미스에게 적대적이던 여론이 점차 돌아서자 테일러는 익히 보아왔던 수법을 동원합니다. 먼저 유력 언론사 사주와 야합해 스미스에게 흑색선전을 퍼붓습니다. 잭슨시는 아예 보도 통제를 해버리고 주민들에게는 파렴치범 스미스에게 항의 편지와 전보를 보내게 하는 등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언론을 장악하고 통제해 목소리를 틀어막아도 진실을 가릴 수는 법. 언론이 진실 앞에 침묵하거나 사실을 왜곡할 때, 보이 레인저스 소년소녀들이 물대포와 차량 테러를 무릅쓰고 소년단 소식지에 스미스의 투쟁을 담아 알리기 시작합니다. 마치 지금의 인터넷과 풀뿌리 언론들처럼 밟히면 밟힐수록 진실은 되살아납니다.

연설한 지 23시간 10분…, 서 있기도 힘듭니다. 아이들이 다치고 있다는 외침과 함께 잭슨시 주민들의 항의 편지와 전보가 스미스 앞에 쌓입니다. 하지만 계곡의 산과 나무와 아이들이 뛰어 놀 캠프장이 버팀목이 되어 신념을 지키고 진실을 말하게 해 줍니다. 마침내 스미스는 마지막 남은 기력을 모아 다음과 같이 절규하고 혼절해 버립니다. 그리고 영화는 페인의 양심선언으로 극적인 반전을 가져 옵니다.

"진실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제가 발언대에 오른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냉철한 이성에 호소합니다. 위대한 원리는 변할 수 없고, 어떤 것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제가 패배했다고 보십니까? 제가 완전히 졌다고 보십니까? 테일러가 의회로 쳐들어온다고 해도 누군가는 듣고 있을 것입니다!"

 댐 건설을 막기 위해 24시간 필리버스터를 감행한 스미스를 조롱하던 의원들과 시민들이 23시간을 넘어서자 하나 둘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댐 건설을 막기 위해 24시간 필리버스터를 감행한 스미스를 조롱하던 의원들과 시민들이 23시간을 넘어서자 하나 둘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 컬럼비아영화사


원칙과 정의 지키는 정치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한 편의 우화 같은 영화는 그러나 우화로 머물지 않습니다. 워낙 제임스 스튜어트의 열연이 돋보이기도 했지만 70년 전의 스미스와 정치인 노무현은 한 사람의 순수한 열정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닮은꼴입니다. 오직 월워크에 캠프장을 짓기 위해 거대언론의 놀림감이 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광대로 묘사되는 스미스는 지역주의에 맞서 우직한 걸음을 걷던 노무현의 행보와 다름이 없습니다.

아웃사이더에 아마추어로 업신여김을 받던 스미스가 필리버스터로 '워싱턴 정치'에 맞서듯이 늘상 깨지고 패배하면서도 기득권 정치에 맞섰던 노무현은 산자들의 가슴에서 부활해 '저항과 개혁'의 필리버스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원칙을 견지하려는 비타협적인 태도와 교과서적인 정치로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실현하려 했던 스미스와 노무현은 그렇게 70년의 세월을 건너 하나가 됩니다.

그 노무현이 떠난 뒤 영화는 어긋난 현실과 충돌합니다. 국회의장이 안건 상정 및 결과 선포를 의장석에서 해야만 하는 법안이 낯부끄러운지도 모르는 의원들. 의장석 탈환을 위해 육탄공세로 몰아낸 뒤 '이것이 정의'라고 의기양양 하는 의원들. 본회의장 필리버스터도 없어 온 몸으로 이들을 막던 야당 의원들까지 폭력국회 공범으로 몰아가는 조중동과 KBS. 날치기 공화국의 주역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스미스씨>는 여전히 우화일 뿐입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 영화 개봉 뒤로 '미스터 스미스'는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을 상징하는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대해 봅니다. 더 많은 스미스들이 청와대와 한나라당 등 날치기 주역들 속에서도 싹 틀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기대난망일 거라고요? 정말 그들에게서 꼼수와 책동이 난무하는 날치기 정치가 아니라 원칙과 정의가 견결히 지켜지는 '미스터 스미스'의 정치를 기대한다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날치기 예산 노무현 형님 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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