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지하철 3호선 '종합운동장역'은 롯데 자이언츠의 포수로 뛰고 있는 강민호 선수가 직접 승하차 안내 멘트를 한다. 놀랄 일도 아니다. 야구 좋아하는 부산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니까. 

그리고 도착한 사직 구장. 그곳은 옆에 앉은 짠내 나는 아저씨도 3회가 넘어가면 같이 싸온 음식을 나눠먹는 사이가 된다. 야구장에서 갈증이 날 때는 맥주나 물보다는 이게 더 좋다며 건네주시는 시원한 생오이. 그러고는 일면식도 없을 야구선수들의 이름 앞에 성을 떼어버리고, '야구란 무엇인가?'에 대한 아저씨의 일장 연설은 시작된다. 좀 지겹긴 했지만, 야구와 관련한 진지한 식견과 철저한 전력 분석은 미국에서 60년간 야구기자 생활을 한 레너드 코페트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 곳은 뒷줄에서 꺅꺅 소리를 지르던 아가씨가 어느덧 옆집 사는 여동생이 되는 신비한 장소이기도 했다. "어디 살아요?", "저요? 연산동이요!", "어! 그는 내가 초등학교 드가기 전까지 살던 덴데~", "진짜요?", "와~ 근데 거서 용호동 가깝나?"

타 지역에서 만난 고향사람도 아니고 같은 부산사람끼리 머 이런 게 대화거리가 되겠나. 근데 되더라. 따지고 보면 그렇게 반가울 일도 아닌데 생면부지 두 사람은 야구장에서 그렇게 벽이 허물어진다. 왜 그럴까. 사직 야구장 관중석, 그곳은 그동안 흩어졌던 식구들이 함께 모이는 '커다란 집'이라는 기분 때문이 아닐까.

 부산의 '사직 야구장'. 그곳은 '구도 부산'의 성지 같은 곳이다.

부산의 '사직 야구장'. 그곳은 '구도 부산'의 성지 같은 곳이다. ⓒ 롯데 자이언츠


다 같이 노래를 부르고, 같은 구호로 선수를 응원한다. 가족이다. 가족들이 다 같이 모였으니, 흥이 안 날 수 없다. 그래서 목 놓아 응원한다. 8회에 역전을 일궈내고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부산 갈매기'. 예전엔 흔히 말하는 부산지역 '어깨'들의 노래였지만, 이젠 윤시내의 '부산 찬가'보다 더 부산을 상징하는 곡이 된 문성재의 '부산 갈매기'가 그렇게 퍼져 나간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본다. 같이 왔던 어색했던 몇몇 친구들은 어느새 어깨동무를 하고 있고, 주위에는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박자에 맞춰서 다 같이 손을 흔든다. 전율이다. '부산'이라는, 사실 딱히 애정도 없고 희미한 추억만 남아 있는 나의 고향은, 그 순간만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그 무엇이 된다. 이것을 비이성적인 집단 최면이라 풀이하든, 말초적인 감성에 의탁된 애향심이라 풀이하든 어찌되었든 그 순간만큼은 격한 감동과 중독이 있다.

구도 부산, 그리고 자발적 스트레스의 산물 '꼴리건'

 야구장에서 추태를 보이는 팬의 모습을 설경구가 리얼하게 연기한 영화 <해운대>의 한 장면.

야구장에서 추태를 보이는 팬의 모습을 설경구가 리얼하게 연기한 영화 <해운대>의 한 장면. ⓒ JK FILM


그러나 이러한 감동의 안에는 '승부'가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승부와 경기에 이겨야 그 감동과 전율은 완성된다. 지고 있는 경기, 어이없는 경기에도 이처럼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래서인지 승리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밀려오는 허탈감과 자괴감은 야구를 사랑하는 크기만큼 크다.

그 좋은 예가 흔히 말하는 팬들의 매너 문제다. 한마디로 참으로 극성이란다. 애드벌룬에 공이 맞아 아웃이 됐다고 애먼 선수에게 야유질이다. 시즌 내내 경기를 말아먹던 명불허전 롯데 불펜이 불을 질렀다고 어디선가 물병이 그라운드로 던져진다. 혹은 그물을 타고 올라가 그라운드 난입을 시도하는 개인에 의한 만행도 가끔 롯데 자이언츠가 어이없는 경기를 할 때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그런 매너 없는 팬들을 타팀의 팬들은 '꼴리건'(꼴찌와 롯데의 합성어인 '꼴데'와 광적인 팬을 일컫는 '훌리건'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이라 부르며 비난한다. 이 '꼴리건'과 같은 극단적인 팬심은, 강준만의 <축구는 한국이다>에서 말한 '한국은 축구를 매개로 한 정치사회적 의미 부여에 굉장히 뛰어난 나라'라는 문장으로 해석이 조금 가능하다. 여기서 한국을 부산으로 바꾸고 축구를 야구로 바꾸고, 나라를 지역으로 바꾸면 얼추 말이 맞다.

서울에 밀려 영원히 '제2의 도시'일 수밖에 없는 애향에 기인한 스트레스. 타 지역에 비해 보수적, 그리고 남성적인 성향의 도시 분위기가 스스로 묶고 있는 소통의 단절. 앞서 말한 지역 안에서 모두가 하나 됨을 자각하는 통일된 정서의 중독. 이 모든 것이 경기가 패배할 때 한꺼번에 역으로 밀려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야구에 빠져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스트레스. 이럴 거라면 아예 야구장을 가지 않는 게 좋겠다는 팬들의 한숨은 사실 괜히 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 스포츠란 결국 상업적 도구의 산물이라는 해석도 더해진다. '구도 부산'이라는 이름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롯데 자이언츠의 성적은 항상 기대와 희망이 뿌옇게 남은 상태를 쭉 이어가는 게 돈 벌이에 더 유리하다는 평가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확 떨어지지도 않고 확 올라가지도 않는 중간 정도의 성적. 스윕(상대 팀과의 3연전에서 모두 이김)하지도, 스윕 당하지도 않으면서 계속해서 꿈을 심어주는 경기 결과. '희망고문'이란 결국 무언가를 '중독'으로 이어주는 좋은 매개체다. 그 끝은 허탈할지라도 관중은 또 야구장을 찾게 되니까. 

패배에도 절대 버릴 수 없는 우승의 꿈

 92년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사진. 팬들은 결코 그때의 꿈을 포기할 수 없다.

92년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사진. 팬들은 결코 그때의 꿈을 포기할 수 없다. ⓒ 롯데 자이언츠


그리고 알다시피 10월 5일, 2010시즌 롯데 자이언츠의 가을의 희망은 또 한 번 맥없이 무너졌다. 2연승 뒤에 3연패. 희망고문을 하기에 최적의 결과다. <USA 투데이>가 미국 시카고 컵스 팬들을 일컬어 '세상에서 가장 어렵게 살아가는 직업군'이라 말했듯, 이쯤 되면 롯데 자이언츠 팬들 역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게 살아가는 직업군' 정도 되겠다.

하지만 이 모든 분석에도 그들은 그 '집'을 떠나기가 어렵다. 그곳에서 만나는 좋은 사람들. 기억들. 추억들. 그리고 함께 부르던 축제의 노래들. 이것들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이처럼 스포츠는, 아니 야구는, 아니 롯데 자이언츠는 부산 사람들이 버리기 힘들어진 가족 같은 애증의 존재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야구'가 '일상의 스포츠'이듯, 부산 사람들에게 '롯데 자이언츠'는 매일 같이 보는 '식구'가 되어 버렸다. 한동안 안 보고 살 수는 있지만, 결코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나 역시 '꼴리건'이라, 혹은 '꼴빠'라 욕먹어도 할 수 없다. 그래도 난 나이를 먹어 언젠가 1992년의 5월의 어느 날 아버지 손을 잡고 사직구장을 처음 찾았던 그 날처럼, 그렇게 나의 아이들과 이 야구장을 다시 찾을 것 같다. 너무 감상적이라 욕하지 마시라. 이건 겪어보지 않고는 정말 글이나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니까.

끝으로 수고했다, 롯데 자이언츠.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 롯데 팬 분들.

롯데 자이언츠 준플레이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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