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

목이 메인 채로 영화관을 나서며, 가슴에 남는 말이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곁에 같이 있어주는 것, 그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신부님의 말씀.

나라간의 분쟁, 부족간의 분쟁이 쉼없이 일어나는 아프리카에서도 그 곳은 더욱 극심한 분쟁의 한가운데였다. 하지만 그곳은 한 가톨릭 사제의 헌신으로 아프리카에서 빛나는 별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남수단의 톤즈".

어린이들이 공부대신 총을 들고 전쟁을 배우는 그 곳,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에 속수무책 죽어가던 그 곳, 먹을 것이 없어 그냥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던 그 곳, 전기가 없어 밤이 되면 칠흙같은 어둠만이 내리던 그 곳, 세계의 가장 가난한 곳 중에서도 더 가난한 곳이라는 톤즈에 몇 년전, '희망'이 피어났었다. 병원이 들어서고, 학교가 들어서고, 전기가 들어오고...

하지만 그 모든 물질적인 것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  '이태석 요한'신부였다(신부님은 톤즈에서 쫄리(John Lee)신부로 불렸다). 사제이면서 의사였던(인제대 의대 졸업) 쫄리 신부님은 톤즈에 부임하면서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염병으로 죽어가는 톤즈사람들을 위해 무엇보다 먼저 병원을 세웠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는 사라지다시피한 전염병이 톤즈에서는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을 보고 백신을 구해 그들에게 주사를 놔주었고, 오랜 내전으로 몸과 맘이 말라비틀어진 아이들을 보고 있을수가 없어 운동장을 만들어 함께 축구를 하고 뛰놀았으며 그 아이들이 자립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학교를 세웠다.

고온 다습한 날씨 때문에 상하는 백신을 저장하기 위해서 냉장고가 필요했던 쫄리 신부님은 태양열을 이용해 전기를 쓸 수 있도록 설비를 마련했고, 이 전기로 아이들이 밤중에도 공부할수 있도록 배려했다. 

신부님의 얘기가 인근 부락에도 퍼져나가면서 근방에 유일하게 있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100km를 걸어오는 환자도 있었다고 하는데, 먼길을 걸어온 환자들이 밤에도 의사 선생님의 방문을 두드리면 문을 한 번 이상 두드리게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는 온몸과 마음으로 헌신하는 의사였던 것이다.

매주 인근 마을로 환자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쫄리 신부님의 중요한 일과중 하나였는데 그중에서도 한센병마을은 그가 애정을 갖고 찾은 마을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한센병 환자들에게 먼저 다가가 악수하고 병의 진행을 막는 약을 주었다. 그리고 그 마을을 갈때는 빈손으로 가지 않고 꼭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가지고 가서 함께 하려고 했다.

@IMG@
다재다능했던 쫄리 신부님은 손발이 뭉개져 있는 그들을 보며 항상 가슴아파했는데, 그들이 발가락이 잘리고 뭉그러진 맨발로 다니는것을 보고는 직접 환자들의 발의 본을 그려서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 그들에게 선물했다. 어떤 한센병 환자는 쫄리 신부님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을 보면 마치 성경에서 보는 예수님을 뵙는것 같아요."

하지만 오히려 쫄리 신부님은 자신을 한센병 환자들과 만나게 해준것에 대해서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가진 것이 없어도 기쁘게 사는 그들을 보면서 오히려 제가 더 행복해집니다'라고.

한 번 하고자 마음 먹으면 어떤 것이든 하고 말았던 쫄리 신부님은 또다시 놀라운 일을 하나 하는데, 바로 학생 브라스밴드를 조직한 것이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신부님은 이루어냈던 것이다. 학교를 세워 공부를 가르쳐주는 것으로는 신부님의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 신부님은 메마른 톤즈의 아이들에게 악기를 들게 함으로써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악기를 가르쳐줄 선생님이 없어, 악기들의 설명서를 보면서 열심히 익혀 다시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브라스밴드의 연주가 흘러나왔다. 주위에서 쉽게 총을 보고 전쟁을 보던 아이들과 톤즈 사람들에게 브라스밴드의 존재는 또다른 희망이 아니었을까?

@IMG@

그런데, 이제 톤즈에는 쫄리 신부님이 계시지 않는다. 2008년 2년마다 한 번씩 갖는 휴가를 위해 우리나라에 오신 신부님은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대장암 말기로 판명되었다. 그것도 이미 간을 비롯한 온몸에 암이 번져 있었다.

신부님을 진찰한 의사에게 신부님의 당시 반응을 묻자, "너무나 안타까와 하셨어요. 내 목숨이 여기서 끝난다는 안타까움이 아니라 내가 2주만 있으면 톤즈로 가서 할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직 할일을 다 못했다는 안타까움이었죠. 또 실제로 톤즈로 돌아가시려고 했어요. 그걸 제가 가족분들하고 많이 말려서 못 가신거죠."

말기암 선고를 받고도 쫄리 신부님은 톤즈 어린이들을 후원하기 위해 조직되어있던 '수단장학회'에서 후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준비한 음악회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셨다. 그것도 아주 환한 웃음으로...

그리고 1년여의 투병 생활. 그동안에도 쫄리 신부님은 톤즈를 잊지 못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그리워하셨다. 하지만 2010년 올해초 쫄리 신부님은, 그렇게 그리던 톤즈로 다시 가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아파도, 슬퍼도 결코 울지 않는다던 톤즈의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 없이 거행된 장례미사에서 그를 눈물로 떠나보냈다. 쫄리 신부님을 생각하며 매일 기도한다면서, 보고 싶다면서...

쫄리 신부님은 가셨지만, 그를 보내지 못한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었다(감독 : 구수환, 글 구성 윤정화, 나레이션 이금희). 왜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신부가 되었는지, 왜 모두들 꺼리는 아프리카 톤즈를 찾아갔는지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했다는 감독은 쫄리 신부의 발자취를 찾아 신부님의 어머니부터 시작하여 멀리 톤즈까지 찾아가서 이 다큐 영화를 만들었다.

개봉당시만 해도 전국에서 소수 영화관에서 상영됐던 영화가 가만히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며 개봉기간 연장을 거듭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이 사람에게 꽃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지.

'신부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것, 그런것이 아닌 그 이상이셨어요. 바로 톤즈 사람이 되어 계셨던 것이지요. 바로 한 동네 사람요'

덧붙이는 글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해 수단장학회 카페(cafe.daum.net/WithLeeTaeSuk)와 '울지마, 톤즈' 홈페이지(www.dontcryformesudan.com)를 덧붙입니다.
톤즈 수단 수단장학회 이태석 살레시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관심있는 분야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