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언론시민연합이 주최하는 퍼블릭액세스시민영상제(이하 시민영상제)가 올해로 10회를 맞는다. 퍼블릭액세스의 기본적인 정신은 말 그대로 일반 시민들에게 영상으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고 많은 시민들이 이에 호응하고 동참해 왔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 시민영상제는 그 사이 '뜻밖에' 반짝반짝 빛을 내며 영화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특출한 한 사람을 배출하게 되었다.

바로 <은하해방전선>의 윤성호 감독이다. 그는 제1회 시민영상제에서 <삼천포 가는길>로 '대상'을 수상했던 감독이다. 시민영상제 열돌을 기념하면서 '뜻깊은' 제1회 시민영상제 대상 수상자 윤성호 감독을 인터뷰했다. 참고로 올해 시민영상제는 열돌을 기념하며 윤성호 감독의 <삼천포 가는길>을 재상영하기로 결정했다. 윤성호 감독을 지난 2일 만났다.

좋아하는 사람은 확실하게 좋아하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윤성호감독

윤성호감독 ⓒ 윤성호

- 최근 근황은?
"장편영화를 준비하는 중인데, 그 사이에 재미삼아 찍은 시트콤이 막 끝났어요. 장편영화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있고 장편 영화로 표현하기에는 좀 버겁거나 작거나 가볍거나 한 것들이 있거든요. 장편에서 다루기에는 무게나 온도가 다른 소재들이 있는데 그것들도 제 안에서 해소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어요. 그런 걸 하려면 시추에이션 드라마 형식이 맞는데 제가 방송국에서 일하는 게 아니니까 그냥 인디 시트콤이라는 이름으로 짧게 만들어서 인터넷에 올렸어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라는 제목인데, 일종의 연재 시리즈로 5분씩 10회를 만들었는데 얼마 전에 시리즈가 끝났어요."

- 시트콤 시리즈 영화라... 새로운 시도인데 반응은 어땠나요?
"딱 예상했던 만큼 호응을 얻은 것 같아요. 상영할 채널이 없으면 그냥 우리가 만들자 싶어서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 올렸는데 따뜻한 환영을 받은 셈이죠. 어차피 수십만이 봐줄 건 아니라고 생각했고 대신 좋아해 줄 사람들은 확실하게 좋아해줬으면 했는데 딱 그대로 된 것 같아요. 5분씩 매주 연재하는 게 사람들한테 주는 또 다른 재미가 있거든요. 그 사이사이 텀에다가 스스로들 서사를 만드시니까. 실험적으로 한번 해봤는데 흥미로웠어요."

-그러고 보니 한겨레 <훅>에도 몇 작품이 올라와 있던데요.
"일단 우리가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올린 다음에, 어디든지 배포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퍼가라고 했어요. 곰플레이어나 한겨레, 시사인 같은 매체에서도 그렇게 가져가신 거예요."

 윤성호 감독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윤성호 감독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 윤성호

- 짧고 가볍게 만든다 해도 제작비가 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결했어요?
"독립영화 배급사인 '인디스토리'와 <워낭소리>로 히트친 후에 온라인 배급사를 만든 '인디플러그', 이렇게 두 군데서 제작비를 받았어요. 사실 인디 쪽에서도 계속 기존방식의 영화만 만들 수는 없는 상황인데, 우리가 실험, 혹은 데모 성격으로 다른 시도를 해보겠다고 하니까 호응을 해주신 거죠.

사실 지금은 매체 환경이 많이 달라졌잖아요. 빠르게 변하고 있구요. 케이블이 있고 모바일이 나오고 스마트폰이 나오고 있는데 극장 개봉 영화만으로는 대중과의 소통이 약할 수밖에 없어요.

여하튼 두 곳에 시트콤도 인디가 만들어서 한 번 보여주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더니 흔쾌히 제작비를 후원해 주셨어요. 문제는 수익 모델이 없다는 건데, 이번에는 한 번 해보는 것 자체가 일종의 데이터와 수익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수익이 없으면서도 어떻게 윈-윈을 할 수 있을 것인가도 고민하고... 아무튼 현재 관심이 좀 그쪽으로 많이 가 있어요."

오직 농구만 했던 소년은 어떻게 영화감독이 되었나


- 민언련에서 주최한 제1회 시민영상제에서 대상을 받았는데 영화 공부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그 당시 퍼블릭액세스도 처음 열렸고, 저도 영화를 처음 만들어 봤어요. 아마 민언련 시민영상제에 응모한 분들 중에서 저나 김선, 김곡 형제 정도가 처음 만든 작품을 낸 팀이었을 거예요. 다른 분들은 프로패셔널하더라고요."

 제1회 시민영상제 <대상> 윤성호 감독의 '삼천포 가는 길'

제1회 시민영상제 <대상> 윤성호 감독의 '삼천포 가는 길' ⓒ 윤성호

- 처음이면 그때 나이가 몇 살이었어요?
"만으로는 스물네 살이었어요. 왜 만으로 이야기하냐면 그때 제가 민언련과 10만 원 비디오페스티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이렇게 세 군데에 냈는데, 청소년영화제에 낼 수 있었던 건 제가 만으로 스물네 살, 그러니까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청소년에 들어갔거든요. 아무튼 처음 만든 단편영화 <삼천포 가는길>을 세 군데 공모해서 그 세 군데서 모두 대상을 탔죠."

- 그럼 영상을 만드는 데는 언제부터 관심이 있었어요?
"제가 서강대 신방과를 나왔는데 사실 그 당시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었어요. 신방과라고 해도 저희 때까지는 제작 과목이 거의 없었어요. 좀 오해가 있는 게 '아, 서강대 신방과니까 제대로 배웠겠구나'하는데, 학교에서 그런 걸 배운 게 별로 없어요. 4학년 졸업할 때까지. 특히 저는 학교 안에 그런 기재들이 있는지도 대학교 졸업 학년쯤에야 알았어요. 쓰지도 못하게 해서(웃음).

물론 제가 졸업한 이후로 많이 달라졌지만, 아무튼 저는 영화와 상관없이 살았어요. 이건 인터뷰 때 수없이 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저는 대학에서는 농구만 했어요. 데모도, 영화 워크숍도 안 했고, 남자애들끼리 돌아다니면서 술 먹고 농구하고 다투고... 그러니까 딱 그냥 사춘기 고등학생들처럼 대학시절을 보냈어요.

그러다가 4학년 때 처음 좀 성인스럽게 생각한 게 '우리도 이제 카메라 들고 뭐 하나 찍어봐?' 이런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영화에 대한 어떤 자의식 같은 건 없었고, 다만 솔직히 말해서 신방과이고, 졸업할 때쯤 되어가니까 방송국 입사 같은 걸 준비를 해야 되나 싶고,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포트폴리오 정도는 있어야 될 것 같은데, 농구 열심히 했다 이럴 수는 없으니까 이걸 해놓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물론 우리가 좋아서 하는 것도 있지만, '이걸 해서 내가 나중에 진짜 영화를 한다?' 이런 생각은 진짜 한 1%, 5% 정도였던 것 같아요."

- 그럼 카메라를 갖고 놀지도 않았고...
"그 단편을 찍기 몇 달 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카메라를 만졌죠. 학교에 벤처창업센터 같은 게 막 생겼는데, 사실 말만 벤처창업센터였고 1인 VJ 이런 분들이 사무실 임대해서 쓰는 거였는데 아르바이트 공고 난 거 보고 가서, 카메라 조작법 배워가지고 아르바이트하고 그게 처음이었어요."

천재란?

 윤성호 감독의 '은하해방전선'

윤성호 감독의 '은하해방전선' ⓒ 윤성호

- 그렇게 얘기하면 너무 천재스럽잖아요(웃음)
"아니 그렇지 않죠. 그냥 뒤늦게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왜냐하면 옆에 진짜 영화를 열심히 한 선후배들은 많았거든요. 저는 <키노> 같은 걸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술 먹고 "선배님, 저 신세 좀 질게요" 하고 가면 그 형 집에는 <키노>가 다 쌓여 있고, 매일 듣는 건 '정은임의 영화음악'이고, 책은 무슨 구조주의 비평, 자크 데리다 그런 것들이고 그랬어요.

저는 아르바이트 열심히 한 돈으로 70만 원 내고 독립영화 워크숍 배우고, 16미리 필름 감는 거 배우고 이런 사람들이 정말 신기했거든요. 그러면서 진짜 저건 고행에 가까운 직업이고, 블루 칼라와 화이트 칼라가 결합을 했고, 저건 나는 절대 못할 영역이다 생각했어요. 일단 나는 어디 여행 가서 스냅 사진 찍는 것도 못하는데 영화는 필름도 감아야 되고, 인화도 할 줄 알아야 되고. 거기에다가 무슨 철학자들의 서적도 읽어야 되고 이러니 나하고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래서 좀 유리했던 게 있는 것 같아요."

- 오히려 잘 몰라서 잘 만들 수 있었다는 건가요.

"그렇죠. 영화에 일찍 관심을 가진 분들은 영화 문법에 대해 너무 경외감이 있었던 거죠. 저는 사실 요즘 좀 주춤한 게 있는데, 이제는 알게 된 거죠. 한마디로 선악과를 따먹어 버린 거예요. 전에는 아예 모르니까 분방했는데, 이제는 저도 모를 수가 없거든요. 왜냐하면 같이 하는 촬영 감독, 편집 기사, 배우 이런 사람들은 저보다 다들 베테랑이고, 이 베테랑들이 저한테 바라는 게 있단 말이에요. 뭐 연출, 감독 일을 하려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거죠.

한마디로 관습이 저한테 들어온 거죠, 이제는. 어느 사이에.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이론을 배우고 그걸 실천에 적용시키는데, 저는 이것저것 되는대로 하다가 저한테도 점점 그런 게 생긴 거죠. 사실 천재 이런 건 별 의미가 없는 말인 것 같아요."

- 그럼 모르고 시작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 되나요?
"어느 게 더 나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제가 좀 더 어리고 치기 어릴 때면 "형식 그런 거 상관 없어요. 여러분들 파괴하세요" 이럴 텐데 그런 건 아니거든요. 사실 글을 쓴다고 했을 때 문법을 알고 쓰는 거랑, 문법은 모르는데 무언가 안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나와서 쓰다 보니까 나중에 깨닫는 거랑 둘 다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아요. 원초적인 글쓰기를 한 사람의 시각이 주는 게 있는 반면에, 국문과 제대로 나오고 하나하나 절제된 조어를 쓰는 사람이 결국 나중에는 굉장히 성숙한 것을, 보편적인 것을 주는 면들이 있거든요.

제가 처음에 약간 좀 도드라지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문법을 모르니까 아예 문법을 배울 생각을 안 하고, 그냥 내멋대로 한 게 사람들한테는 좀 신선하게 다가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일부러 형식에 반기를 들었나보다'라고 받아들인 거죠. 그런데 사실은 알고 반기를 든 게 아니라, 아는 깃발이 그것밖에 없었던 거죠.

초반에 고만고만한 단편을 만드는 사람들 중에서 오히려 튀는 건 있었을 텐데... 천재 이런 건 의미가 없는 말이라는 게, 제가 만든 단편이 아마 뭔가 문법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는 신선함이 있었을 텐데, 천재는 결국 그런 게 아니라 문법을 익히지 않았는데 알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처음부터 탑재되어 있는 사람. 어떤 문학이든 영화든 문법이라는 건 약간 인류의 원초적인 게 있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 근원적인, 원형적인 플롯이라든지 보편적으로 재미있어 하는 지점들을 탑재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그게 탑재되어 있었으면 안 그랬겠죠."

어쩌다 들어선 골목길에서 묘하게 좌회전되다


- 처음 출품한 세 군데서 다 '대상'을 타니까 주변이 좀 만만해 보이지 않았어요?

"그럴 수 있었는데(웃음), 또 이런 게 있었어요. 그 세 영화제가 다 어떤 시간과 레벨을 획득한 영화제라기보다는 지망생들을 위한 영상제 같은 거였으니까, 제가 세 개 다 대상을 타긴 했지만 이제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또 금방 알게 되죠.

그때만 해도 그런 명사 내지는 존경하는 분이 그냥 한마디 툭 던지면 무슨 화두처럼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때 김동원 감독님하고 처음 인사하고 좀 알게 됐는데 그분이 "작가라고 부른다고 진짜 작가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러셨어요. 그래서 그때 솔직히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남들 앞에서 좀 조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지금은 오히려 그 말이 더 와 닿죠. 그러니까 관습적으로 호명해주는 것에 신나서 일희일비하면 큰 코 다친다는 것 정도는 알았죠."

- 옆에서 자존감을 살려주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요?
"아, 고맙죠. 좋은 분들의 얘기에 어떤 땐 북돋음이 되고, 또 같은 사람들한테 슬쩍 '아직 그건 아니지' 하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그런 건 좋은 점이지요. 제 경우 상을 받고 난 후에 독립영화와 시민 단체들의 커뮤니티랑 조우하게 되면서 적당히 단련이 된 것 같아요. 경로가 묘하게 좌회전 되면서... 원래 별 생각 없이 길이 난 대로 갔던 애가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그 골목이 좁긴 좁은데 사람을 다치지 않게 운반해주는 그런 골목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섰던 것 같아요, 운이 좋았던 거죠, 제 재주보다.

저는 진짜 운이 7할이고 8할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뭐 제가 대단한 걸 이뤘다는 게 아니라, 지금 그나마 이렇게 사람 사는 꼴로. 제가 만든 걸 누군가에게 소개해줄 수 있는 꼴로 살 수 있는 게, 운이 좋았던 거예요. 그 운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라, 민언련 시민영상제를 거치고 나서 나쁘지 않은 커뮤니티들을 계속 만날 수 있었던 거예요."

 2009년 퍼블릭액세스시민영상제 폐막식 단체사진

2009년 퍼블릭액세스시민영상제 폐막식 단체사진 ⓒ 민언련


- 어쨌든 민언련에서 주최하는 시민영상제를 알았을 정도면 시사에는 관심이 좀 있었던 거죠?
"이런 얘기하면 제 작품을 좋아하는 분들 중에는 충격을 받는 분도 있을 텐데, 저는 민주언론운동 이런 걸 몰랐어요. 영상제로 검색을 해보고 안 거예요. 4학년 때까지 '안티조선'이 뭔지 몰랐어요. 그냥 대략 '너무 힘센 사람이 많이 가지면 안 된다' 정도의 나이브한 의식만 있었지, 조선일보가 왜 문제인지 몰랐죠. 심지어 <100분토론> 진행자 유시민씨가 누구인지도 몰랐어요. 민언련과 인연을 맺은 이후에 사회화가 좀 많이 됐죠.(웃음)"

- 그럼 시민영상제 수상 이후에 그로 인해서 변화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처음에는 단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응모를 했는데, 대상을 받고 나서 2회 시민영상제 때는 프로그래머를 했어요. 그때 민언련이 저한테 일을 되게 많이 맡겼어요. 일도 되게 많았지만, 프로그래머로서 얻은 게 또 많았어요. 민주화운동 같은 것들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제가 독립영화계를 돌아다니면서 김동원 감독님을 비롯해서 다큐멘터리를 찍는 많은 분들을 알게 됐죠.

다큐멘터리를 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온도가 따뜻해요. 이론이 먼저 있고 그 사람들을 만난 게 아니라, 만나면서 그 따뜻한 사람들이 지향하는 바와 지양하는 바는 뭔가가 궁금해졌고, 그 이성을 습득하기보다는 그분들의 감성에 나도 의존을 하게 되면서, 그 사람들이 보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나 분노하는 대상에 대해서 나도 관심을 갖게 되고 이렇게 된 거죠.

다만 한 2년여 사이에 인맥이나 관심분야 같은 것들이 너무 갑자기 기형적으로 넓어졌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아주 설익은 형태였죠. 그때 써놓은 글들을 보면 아주 웃겨요. 진보 정치나 공공성의 확장 등등 내 인생의 무슨 목표인 것처럼 해놨어요. 그 어휘들을 안 지 얼마나 됐다고... 결국은 그게 오래 가지는 못했죠. 이런 것들이 지나온 하나의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행운이라는 게 제가 너무 들떠서 날을 세우거나 했을 때 귀엽게 받아주면서 "근데 니가 모르는 게 있어~" 이렇게 웃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다시 생각할 수 있었던 거고, 그런 작용을 해준 것 중 하나가 민언련이었어요."

올드한 관습에서 벗어나기

 제10회퍼블릭액세스시민영상제 포스터

제10회퍼블릭액세스시민영상제 포스터 ⓒ 민언련


- 끝으로 시민영상제의 수상자이자 프로그래머였던 사람으로서 10회를 맞는 시민영상제에 대한 생각도 말씀해 주세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 우리가 이미 많은 걸 얻었다고 착각하던 시절에 시민영상제가 뭘 했을까? 사실 그 시절은 표현에서의 권위주의가 청산된 정도였잖아요. 생각했던 만큼 그렇게 큰 물리적인 영향력은 없었던 것 같아요. 너무 낙관적이었거나 나이브하게 접근했던 것 같아요, 전반적으로.

지금 생각하면 한 5년 동안 하지 못했던 걸 한 달 만에 해버린 사람이 <칼라TV>의 진중권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 사람은 미디어가 어떻게 소통해야 되는지를 탑재한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촛불집회 때 이어폰 꼽고 시민들이 아프리카 채팅에서 지적한 현장으로 바로 달려가서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개입하고 한 거죠. 그걸 보고 사람들이 처음으로 '내가 참여하는 미디어가 실제로 물리력을 발휘할 수 있구나'하는 걸 느끼도록 시뮬레이션 시켜준 거였어요.

물론 그것 자체가 민주언론운동, 안티조선운동, 이런 크고 작은 영상제들, 그리고 수많은 어떤 기술의 부가적인 혁신들이 있어서, 그 모두가 기발한 하나의 어떤 새로운 형태의 것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긴 할텐데 여기서 좀 힌트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이 시민영상제라는 그릇 자체가 조금 올드한 그릇이기도 하다고 봐요, 실은. 한 날 한 시에 모아서 우리들이 틀고 상영했다 이런 형식 자체가. 차라리 그냥 마음대로 올릴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을 하나 만들거나, 아예 플랫폼을 만들 필요도 없고 유튜브나 포털 다음에다가 그냥 시민영상제 채널을 하나 만든 다음에, 서버들이 알아서 업데이트하라고 하고, 조회수 제일 많은 작품에는 관객상주고, 네티즌상 주고. 그 다음에 전문가들이 보고 '우리가 이걸 밀어보고 싶다'하면 심사위원들이 뽑은 상 주고, 이렇게 하는 게 자본도 안 들면서 더 내실 있는 행사일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올드한 관습들을 못 벗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마치 지금 '디지털 영상제'라는 말을 손으로 쓰고 있는 거예요. "자, 우리는 최첨단 디지털 영상제입니다" 한 다음에 "그걸 VHS 테이프로 복사해 주세요"라고 하는 그런 느낌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환골탈태가 시민운동 전체에, 또 그런 표상 중의 하나로 시민영상제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퍼블릭액세스시민영상제
소박하지만 시민들에게 영상제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그들의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찾아주고 표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다는 것만으로도 민언련 시민영상제의 존재의미는 충분하다. 하지만 시민영상제를 통해 영화계에 입문해서 훌륭한 감독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다.

지난 2009년 시민영상제 최종심사에서 심사위원들의 불꽃 튀는 갑론을박 끝에, 결국 심사위원들의 심사비를 모아 규정 외의 '심사위원 특별상'을 만들어 주었던 것 역시 이런 희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던 시민감독은 올해 트레일러 제작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올해는 또 어떤 멋진 작품들을, 어떤 생기 있는 신예 감독들을 만날 수 있을지 기대가 크다. 올해 제10회 퍼블릭액세스시민영상제 공모마감은 9월 10일이다. 자세한 공모내용은 www.publicaccess.or.kr 에서 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염찬희 기자는 시민영상제 집행위원장입니다.
민언련 퍼블릭액세스 시민영상제 윤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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