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시>인가? 경제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일상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왜 <시>인가? 경제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일상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 김송지영

나는 시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누구도 행복할 땐 시를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가 살 만할 땐 시를 읽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생이 막막할 때 삶에 지칠 때 처방전을 찾기 위해 시집을 편다. 톨스토이의 통찰대로, 행복한 사람들의 이유는 대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그 오만가지 상처의 사례가 시에 들어있다.

발생 가능한 사건과 충돌 가능한 감정이 정결한 언어로 상차림 돼있다. 시를 읽다 보면 생각이 가지런해지고 울렁증이 가라앉는다. 시라는 언어의 상찬 덕에 삶은 종종 견딜 만해진다. 식탁 위에 말라붙은 김칫국물도 생이 흘리고 간 빨간 구두발자국이 된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세계를 감각할 수 있으므로 고통도 충분히 아름답다. 시 안에서는.

이창동의 <시>. 고통스러워서 아름다운 영화다. 이 상투적인 표현을 피해갈 수 없겠다. 영화 <시>를 보면서 시집을 읽을 때처럼 설득 당했다. '고통이 아름다울 수 있다.' 66세 미자는 이혼한 딸이 맡긴 중학생 손자와 단둘이 허름한 아파트에서 간병인으로 밥벌이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하지만 레이스 머플러와 꽃 모자, 프릴치마로 치장하고 하느작 하느작 거닐며 예쁜 꽃과 대화하는 동화 속 소녀 캐릭터다. 탐미주의자 미자(美子)이면서 손자 입에 밥 들어가는 걸 제일 행복으로 아는 보통 엄마 미자(米子)이기도 하다.

미자가 '시 강좌' 수강신청을 할 무렵 힘겨운 일들이 생긴다. 알츠하이머병이 미약하게 시작되고, 간병하는 이가 한 번만 자달라고 애원하고, 동네에서 투신 자살한 여학생 성폭행 사건에 손자가 가담한 것을 알게 된다.

평소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말하곤 했다. 주님은 한쪽 문을 닫을 때 동시에 다른 쪽 문을 열어놓는다고. 그다지 동의하진 않지만 그 논리를 빌자면, 미자에게 '시'라는 출구가 생긴 것이다.

 시상을 찾기 위해 그 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을 주시하며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는 미자

시상을 찾기 위해 그 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을 주시하며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는 미자 ⓒ 파인하우스필름(주)


번개처럼 이미 와 있는 사건들을 미자는 시를 쓰며 헤쳐 간다. 손바닥만한 수첩을 수시로 꺼내어 느낌과 생각을 한 줄 한 줄 밀고 나간다. '오백만원만 주세요', '협박하나'는 미자의 가장 애절한 시구다.

원래 시는 지독한 리얼리즘이다. 하지만 고통의 서사를 통째로 스캔하여 보여주면 시가 아니다. 마음 아픈 것만으로는 결코 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파란만장 인생을 소설 같다고 말하지 시 같은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다. 시는 전개가 아니라 함축, 분출이 아니라 절제다. 그리고 시는, 기필코 아름다움에 관여해야 한다.  

이창동의 <시>는 그런 점에서 시의 본령에 매우 충실한 작품이다. <밀양>에서 전도연이 목 놓아 울며 분출했다면 <시>에서 윤정희는 속울음 삭이며 흐느낀다. 미자는 삶에서 만나는 고통스러운 긴장을 안고 끌고 가다가 마침내 시를 분만한다. 몸 속에서 뜨거운 해가 쑥 빠져나오듯이. 부패와 부조리로 막힌 세상을 시가 뚫는다.

죄의식을 모르는 수컷들의 세계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미자. 병든 이의 몸을 연신 씻겨내는 미자. 손자의 때 낀 발톱을 정성스레 깎아주는 미자. 더러움을 벗기고 어여쁨을 보려는 미자. 아름다움에 연연하는 이에게는 새로운 통찰이 움트고, 길가에 떨어져 터진 살구를 연민하는 이는 윤리적인 선택을 내리게 돼 있다고 나는 믿는다.

세상이 더럽고 추하고 짐승스럽다고 하더라도, 더러움이, 추함이, 짐승스러움이 세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김현). 그것이 문학의 실천적 본성이며, 기복이 없는 일급 이창동의 영화 <시>다.

이창동 윤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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