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로 봄꽃 소식이 더디기만 했던 지난 주말(3월 26~28일) 제주도를 다녀왔다. 제주도로 떠난 지난 주말 서울은 때를 잊은 꽃샘추위로 을씨년스러웠지만, 바다 건너 제주는 역시 포근한 기후였다. 한라산 높은 곳에 전날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을 뿐, 제주시내 동네 골목가엔 활짝 핀 벚꽃이 탐스럽게 피어있는 봄날이었다.

봄꽃이 북상하는 반대 여정으로 제주도를 찾은 이유는 한라산을 종주하는 트레일런(trail run, 산악달리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한라산을 오르내리는 대표적인 등산코스인 성판악에서 백록담, 백록담에서 관음사, 어리목에서 윗세오름, 윗세오름에서 영실 등 4개 코스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울트라마라톤대회다.

 지난 27일(토) 눈에 덮힌 한라산 백록담

지난 27일(토) 눈에 덮힌 한라산 백록담 ⓒ 유태웅


이 대회는 매년 이맘때 제주도 일원에서 열리는 제주국제울트라마라톤대회 종목 중 하나다. 올해는 특히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IAU(국제울트라마라톤연맹) 공인 100km 아시아선수권대회도 함께 열렸다. 지난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이번 대회에 국제울트라마라톤연맹 회장과 사무총장이 직접 제주도를 찾았다. 국내 동호인 선수 외에도 160여 명의 외국인들도 참가했다.

울트라마라톤이란 마라톤 풀코스 42.195km 이상을 달리는 마라톤대회를 말한다. 이번 대회는 50km, 100km 부문의 스피드울트라 부문과 제주도를 해안도로 따라 일주하는 200km 부문, 한라산을 두 번 오르내리며 제주도를 왕복 종단하는 트레일런148km부문으로 동시에 진행됐다.

 IAU(국제울트라마라톤연맹) 회장인 Dirk Strumane

IAU(국제울트라마라톤연맹) 회장인 Dirk Strumane ⓒ 유태웅


단 20명만 참가한 '악명(?) 높은' 한라산트레일런148km

힘든 종목이라는 소문이 돌아서였을까? 대회 참가자 현황을 살펴보니 한라산트레일런148km 종목은 신청자가 31명이었다. 이중에서 대회날 실제 레이스에 참가한 선수는 단 20명. 제주 지역 한 언론엔 트레일런148km 종목은 울트라마라톤 고수들만이 참가하는 대회로 소개되기도 했다.

대회날 오전 6시 정각에 각 종목 참가선수들은 탑동공원에 마련된 출발, 완주 지점에서 일제히 정해진 코스로 출발했다. 20명이 조촐하게 출발한 트레일런148km 선수들은 다른 종목 참가자들과는 달리 동이 터오는 제주시내 거리를 관통해 먼저 성판악까지 19.1km를 달렸다.

 제주 한라산트레일런 148km코스를 달리는 주자들

제주 한라산트레일런 148km코스를 달리는 주자들 ⓒ 유태웅


제주시 탑동공원에서 성판악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이다. 마라톤 하프코스를 오르막길로 달려야하는 셈이다. 마침 동이 터오는 제주 시내 아침은 포근하기만 하다. 탁 트인 제주시내 도로변 인도를 달려 1131번 도로로 들어서니 제주만의 특별한 주변 풍경이 그나마 피로를 덜어낸다. 

구불구불 오르막길과 평지가 반복되는 1131번 5.16도로는 양옆으로 넓은 초지와 깊은 숲이 번갈아 드러난다. 간혹 길가에 '로드 킬' 당한 작은 동물의 사체가 눈에 띈다. 설치류로 보이는 동물의 사체는 온전한 형태로 길가에 누워 있다. 도로옆 흙가로 옮겨놓고 싶지만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다. 죽음이라는 것은 생명체 크기의 작고 큼이나 종의 구분을 떠나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다.    

 성판악 가는 길에 만난 '로드킬' 당한 동물의 사체

성판악 가는 길에 만난 '로드킬' 당한 동물의 사체 ⓒ 유태웅


5.16도로를 따라 달려 성판악에 도착해 체크 포인트에서 잠시 간식과 물을 보충한 다음 본격적인 한라산 등산코스에 오른다. 이른 아침부터 백록담에 오르고자 하는 수많은 등산객들 사이를 비집고 빠른 걸음으로 오르다보니 이틀 전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해발고도 1300m부터는 아이젠을 착용하는 등산객들이 더 늘어난다. 비좁은 등산로를 조심스럽게 추월해 가며 한라산(1950.1m) 정상에 오르니 주변은 눈으로 뒤덮여 있고, 백록담 물은 얼어있다. 체크 포인트에 도착시간을 확인받고 하얀 백록담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백록담에서 관음사 등산로에 있는 탐라계곡 탐방로

백록담에서 관음사 등산로에 있는 탐라계곡 탐방로 ⓒ 유태웅


관음사로 하산하는 등산로도 역시 눈으로 덮혀 있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성판악 코스보다는 등산객이 한산해 잰 걸음으로 하산을 서두른다. 관음사 휴게소로 내려오는 코스 아랫부분은 탐라계곡 생태탐방로가 조성되어 있다. 제주 토양의 생태환경이 숲과 계곡 속에 잘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관음사 휴게소 체크 포인트에서 컵라면으로 힘을 보충한 후 1117번 제1한라관광도로를 따라 어리목으로 향한다. 왼편으로 어승생(1172m)을 두고 오른편 넓은 초지에선 제주산 조랑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초지에 놓인 무덤은 제주만의 특색을 보여준다. 어승생승마장과 천왕사 입구를 지나 삼거리에서 1139번 1100도로로 들어선다. 길고 긴 도로를 따라 윗세오름에 오르는 어리목에 도착한다.

 관음사에서 어리목 가는 길목 어승생승마장 인근

관음사에서 어리목 가는 길목 어승생승마장 인근 ⓒ 유태웅


어리목휴게소 체크 포인트에서는 제주특산품인 한라봉을 맛본다. 달콤한 것이 마치 오렌지 맛과 비슷하다. 이곳에서 어리목계곡을 건너 윗세오름(1741m)에 오르는 코스는 대회 중 가장 힘든 여정이다. 한라산을 두 번 오르는 셈이기 때문이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니 백록담 서측 암벽과 윗세오름이 한 눈에 들어오는 만세동산에 이른다.

해발고도 1400m부근 사제비약수터에서 잠시 목을 축인 후 윗세오름대피소 체크 포인트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젠 윗세오름에서 영실 방향으로 하산하는 코스다. 깎아지른 듯한 암봉과 넓은 시야가 한눈에 들어선다. 병풍바위를 지나 오백나한상을 닮은 영실기암을 거쳐 하산길을 재촉한다.

 어리목에서 올라 만세광장에서 바라 본 윗세오름과 백록담 서벽

어리목에서 올라 만세광장에서 바라 본 윗세오름과 백록담 서벽 ⓒ 유태웅


이 구간에선 바람이 세차고 기온도 크게 떨어져 몸에선 심한 한기가 느껴진다. 서둘러 등산로를 따라 하산을 마치니 영실 휴게소 체크 포인트에서 대회 운영요원들이 따스한 떡국을 내어준다. 허기지고 추운 몸에 따스한 떡국이 들어가니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한라산 등산코스를 모두 통과했으니 이곳부터는 이제 편안한 주로인 셈이다.

영실휴게소에서 국립공원 영실지소를 지나 영실입구까지 내려오는 길에선 야생 노루떼를 만났다. 그동안 사람들을 많이 접해서인지 노루들은 인기척에도 서둘러 피하지 않는 여유마저 보인다. 그동안 제주도는 숱하게 다녀왔지만 4~5m 가까이서 많은 야생 노루를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다. 자연이 잘 보존된 숲 속에서는 노루가 거니는 모습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영실 입구에서 다시 1100도로를 따라 제주탐라대학교로 내려와 제2산록도로 길목으로 들어서니 서귀포시내 야경이 멋지게 펼쳐진다. 일직선상으로 뻗은 길고 긴 도로가 지루한 느낌이다. 문득 바닥에 BIKE 110km라는 오래된 표식이 눈에 들어온다. 매년 여름이면 제주에서 열리는 철인3종경기 사이클 중간지점 표시다. 동호인들 사이에서는 '마의 돈내코 언덕'으로 불리는 코스다.

 영실휴게소에서 1100고지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야생노루

영실휴게소에서 1100고지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야생노루 ⓒ 유태웅


토요일 저녁 깊은 밤, 서귀포 시내 야경이 내려다 보이는 제2산록도로와 돈내코를 홀로 지나면서 많은 상념에 젖어든다. 지나온 삶이 마치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휘감아 돌기도 하고, 앞으로 내딛여야 할 삶의 목표에 대한 무수한 생각과 계획들이 아이디어로 떠오른다. '두 발로 걷는 행위가 곧 생각하는 발전소'라고 말한 어느 걷기 예찬론자의 말을 실감하게 된다.

이 무수한 상념 속에는 마지막 고정 체크포인트이자 바꿈터인 95km 지점 서귀포월드컵경기장까지만 달리자는 판단도 포함된다. 편안한 마음으로 서귀포월드컵경기장 체크 포인트에 도착하니 지점 도착 제한시간에서 30분을 남긴 시간(새벽 12시 30분)이다. '시간도 충분한데 제주까지 와서 중간에 접으면 아깝지않느냐'는 운영요원에게 '제주까지 와서 몸에 무리를 주고 싶지는 않다. 오늘은 맛만 보는 것으로 하겠다'는 말로 화답했다.

먼저 도착해 쉬고 있던 다른 참가선수 한 명의 마지막 유혹(?)마저 뿌리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대회 운영차량에 탑승해 제주시내로 되돌아왔다. 차량에 탑승해 돌아오는 1139번과 1117번 도로는 서귀포 시내를 빠져나와 제주시내를 향해 달리는 100km 이후 대회 코스였다. 차 안에서 따스한 온기로 몸을 녹이면서 차창 밖으로 간간히 보이는 주자들의 마지막 투혼을 말없이 격려해주었다.  

 한라산을 두 번 오르내려야 하는 트레일런148km 주자들

한라산을 두 번 오르내려야 하는 트레일런148km 주자들 ⓒ 유태웅


완주의 고통보다는 봄을 맞는 제주를 즐기는 울트라마라톤 천국

이번 대회는 종목별 완주율이 각각 55~66%선이었다(100km종목 88명/132명, 200km종목 96명/152명, 148km종목 11명/20명). 다른 울트라마라톤대회에 비해 완주율이 무척 낮은 편이다. 반면에 천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제주도 해안도로를 따라 전체를 일주하거나 혹은 그 절반만 일주하는 코스는 울트라마라톤에 그리 어렵지 않은 지형이다.

결국 처절한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며 느끼는 완주의 환희보다는, 봄을 맞는 제주도 풍광을 무리없이 즐기고싶은 지리적 환경이 주는 영향이지 싶었다. 실제로 한라산트레일런148km 종목에 참가해 한라산 등산코스를 모두 밟고 서귀포까지 종단한 95km지점까지 경험해 보니, '제주까지 와서 꼭 무리할 필요는 없잖아?'하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

 아시아에선 최초로 IAU100km아시아선수권대회가 열린 2010제주국제울트라마라톤대회

아시아에선 최초로 IAU100km아시아선수권대회가 열린 2010제주국제울트라마라톤대회 ⓒ 유태웅


대회 후 전체 완주율을 보니 이런 생각은 굳이 개인적인 느낌만은 아니지 싶었다. 최종 148km까지 완주했으면 완주메달과 자부심은 얻을 수 있겠지만, 투혼의 후유증으로 제주에서 남은 일정과 귀갓길을 고통(?) 속에 보냈을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제주시내와 서귀포 도로가에 피어있던 하얀 벚꽃 군락, 하루종일 오르내렸던 멋진 한라산, 따스한 봄 기온이 가득한 제주의 푸릇한 바다를 뚜렷하게 가슴에 담아 온 것은, 바로 이러한 여유가 있어 가능하지 싶기도 하다. 비록 완주 못한 변명이라 할지라도.

▲ 제주 한라산트레일런 148km 코스 . ⓒ 유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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