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배우들>의 한 장면.

영화 <여배우들>의 한 장면. ⓒ (주)뭉클영화사


어느 날, 미실 고현정과 지우히메 최지우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윤여정, 이미숙, 김민희, 김옥빈도 함께다. 두세 명도 한꺼번에 보기 어려운 여배우가 무려 6명. 이들이 청담동의 한 스튜디오에 모인 까닭은 바로 패션지 화보를 찍기 위해서다.

밤샘 드라마 촬영으로 얼굴이 부어 촬영장에 가지 않겠다던 최지우는 패션지 기자의 통사정에 겨우 차에 오른다. 한편, 스튜디오에선 최지우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이 모두 모여 대기하고 있는 상태. 고현정의 심사가 이때부터 뒤틀리기 시작한다.

"꼭 이럴 때 늦게 와야 지가 스타인줄 안다!"

뒤늦게 촬영장에 도착한 최지우. 고현정은 그런 그녀를 졸졸 쫓아다니며 시비를 건다. 혈액형이 무엇이냐, 별자리가 무엇이냐,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어대며 온갖 안 좋은 말로 살살 약을 올린다. 한두 번은 억지웃음으로 참아 넘겼던 최지우. 고교시절 TV에 나오는 고현정을 보며 그녀를 동경했다던 최지우는 그러나 끝내 참지 못하고 폭발해 언성을 높인다.

이재용 감독의 신작 <여배우들>(12월10일 개봉)은 여러모로 독특하고 신선한 영화다. 세대를 아우르는 여배우 군단의 캐스팅부터 화제를 모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작품 속에서 이들 여배우 6명은 언제나처럼 다른 사람,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지 않는다. 여정, 미숙, 현정, 지우, 민희, 그리고 옥빈. 이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갖고, 자기 자신을 연기했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것을 그대로 담아낼 뿐이었다.

여배우들의 '진심'이 담긴 영화 <여배우들>

 영화배우 고현정이 30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여배우들' (감독 이재용)의 언론시사회에서 최지우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영화배우 고현정이 30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여배우들' (감독 이재용)의 언론시사회에서 최지우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유성호


이들이 영화 속에서 던지는 대사들은 시나리오에 적혀있던 것도 미리 외워둔 것도 아니다. 대부분 그 상황에서 그들이 하고자 했던 진심이 담긴 이야기다. 이재용 감독은 시놉시스 상의 기본적인 틀과 상황에만 손을 댔을 뿐, 그 안에서 여배우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말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배우들의 몫이었다.

고현정과 최지우의 실감나는 싸움 연기도 실제였다. 촬영 첫 날, 첫 번째 신에서 싸우게 된 두 여배우. 상황은 주어진 것이지만 그 안의 감정과 대사는 가짜가 아닌 진짜. 어쩐지 최지우의 이마를 튕기는 고현정의 손가락 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싶었다. 최지우도 그 장면에서는 심장이 떨리고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기존의 영화와는 조금 다르게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여배우들>은 기존의 상업 영화가 갖고 있던 틀과 공식을 대부분 무시해 버린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갈등도 없다. 사건이라고 해봐야 촬영 소품으로 쓰일 보석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이고, 갈등이라고 해봐야 고현정과 최지우의 신경전이 전부다. 그나마도 흐지부지. 영화는 일관되게 여배우의 보통 모습을 오버하지 않고 담담하게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중반이 넘어가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이 시대의 여배우가 사는 이야기'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촬영일은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바깥에는 펑펑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눈을 보자 괜히 싱숭생숭해진 여배우들, 보석이 도착하지 않아 촬영은 늦어지고, 때는 이때다 싶어 촬영장 한쪽에서 파티를 연다. 다소 모양새가 빠지긴 하지만 샴페인과 와인, 치즈와 캐비어를 곁들인 나름 훌륭한 파티다.

아픔 하소연할 곳 없어 답답한 '여배우들'

 영화배우 김민희, 고현정, 최지우가 30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여배우들' (감독 이재용)의 언론시사회에서 무대인사를 하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영화배우 김민희, 고현정, 최지우가 30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여배우들' (감독 이재용)의 언론시사회에서 무대인사를 하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 유성호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면서 배우들은 저마다 감춰뒀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낮부터 계속해서 최지우의 신경을 건드렸던 고현정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최지우의 '한류스타'라는 명함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런 최지우는 또 다른 한류스타 이영애를 부러워한다. 자신이 일본에선 한류스타로 통하고 있지만 중국에선 이영애의 그림자를 넘어설 수 없음에 질투 섞인 한탄을 한다.

김민희는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어느새 뒤돌아보니 서른이 코앞인데 이뤄놓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지도 못하고 나이만 먹어가는 것에 그녀는 우울해한다. 반면 김옥빈은 빨리 나이를 먹고 싶어 한다. 23살, 한창 좋을 나이에 그녀는 만사가 재미없다며 얼른 늙었으면 한다. 그 둘은 그렇게 상반된 고민거리를 털어놓으며 웃고 씁쓸해한다.

이미숙은 아무리 늙고 나이를 먹어도 '여자'이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사람이 아닌 '여자', 배우가 아닌 '여배우'로 보이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윤여정은 혀를 찬다. 가장 나이가 많은, 그래서 만사에 달관한 듯 보이는 여정은 자신이 섭외 1순위가 아니었다는 말을 우연히 듣고 그때부터 신경이 쓰인다. 자신을 밀어낸 섭외 1순위가 누구일까, 촬영 내내 그녀는 그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다.

각자가 저마다의 고민과 아픔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막상 그것을 풀어낼 곳이 없다는 데 그녀들은 모두 동의했다. 묘한 경쟁의식 탓에 동년배 연기자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되고, 어느새 벌어진 선후배 사이의 틈은 쉬 메워지지 않았다. 그녀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고민을, 아픔을 하소연할 곳 없어 답답해하고 있었다.

때론 웃으며, 때론 눈물 지어가며 덤덤하게 자신들의 속내를 토로하는 여배우들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까지 봐오고 생각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배우들의 이면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재미가 가득하지도 않았다. 이 시대의 여배우가 사는 이야기는, 평범한 우리네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배우 아니면 뭐할까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
[현장] 영화 <여배우들> 시사회

 영화배우 윤여정, 이미숙, 최지우, 고현정, 김민희, 김옥빈이 30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여배우들' (감독 이재용)의 언론시사회에서 취재진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배우 윤여정, 이미숙, 최지우, 고현정, 김민희, 김옥빈이 30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여배우들' (감독 이재용)의 언론시사회에서 취재진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유성호


"그렇게 술을 마시니까 쫓겨나지."
"내가 쫓겨났는지 어쨌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네가 봤어?"

살벌한 여배우들의 날선 말들이 오고 간다. 영화 속의 한 장면. 그러나 영화 속 이야기라고 하기엔 또 묘하게 실제 같다. 주연배우들이 모두 실제 자신을 연기하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진 영화 <여배우들>의 언론시사회가 지난 11월 30일 오후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렸다.

자신들도 아직 완성된 영화는 못 봤다는 주연 여배우들도 기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영화를 봤다. 영화가 끝나고 고현정은 감상을 묻는 기자에게 "영화 장면 장면마다 스태프들과 함께 고생하며 찍었던 것들이 생각났다"고 말했고, 이미숙은 "배우 아니면 뭐할까 싶을 사람들의, 그런 여배우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려 노력한 것 같다"고 대답했다.

'영화 속 자신을 연기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고현정은 "영화 속에서 내가 입고 나왔던 옷들은 대부분 실제 내 옷이었다"며 "나 혼자만의 연기보다는 전체 여배우들과의 조화에 신경썼다"고 말했다.

<여배우들> 이재용 감독은 "여배우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여배우들이 짜여진 각본 속에서 그저 만들어진 가공의 대사를 말하는 영화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며 "자유롭게, 그들의 삶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영화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잘 짜여진 웅장한 오케스트라보다, 실력 있는 연주자들이 즉흥연주를 하는 그런 재즈 같은 영화를 선보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여배우들 고현정 윤여정 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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