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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세계는 갖가지 테러로 병들어 가고 있다. 여러 실타래로 꼬여있는 미움들과 오해들로, 아니면 탐욕들을 풀기 위해 세계는 아픔으로 붉게 물들어 간다. 우리는 피를 보지 않으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다. 애초부터 이해시키기 위함이 아닌 듯 하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아파하며 공포를 느껴야 하는가? 테러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오늘도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고민한다. 필자도 부족한 지식으로 한 영화를 설명하며 테러에 대한 문제를 나만의 방법으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시내 한 가운데 서로 얼굴을 맞대며 위풍 당당히 서 있던 한 쌍의 빌딩. 그 빌딩을 향해 여객기 몇 대가 날아왔다. 모두들 처음엔 단순한 비행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불과 몇 초 뒤 전 세계의이목을 집중시킨 폭발이 일어났다. 세계를 호령하는 초 강대국 미국의 심장부에서 믿지 못할 테러가 일어난 것이다. 이 테러에 충격을 받은 미국 정부는 여러 나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악의축` 중 하나로 지목 됐던 이라크를 침공한다. 미국의 종전 선언으로공식적인 `보복전`은 끝이 났으나, 아직도수 많은 사람들이 보복 테러의 위협과 전쟁 후유증 속에 살아가고 있다.

9.11테러에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분명 제목엔 뮌헨 리뷰라고써 있는데. 지금 아래에 내가 적을 영화의 간략한 줄거리를 읽어 보신다면 왜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전쟁으로글을 시작했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1972년 9월 5일 뮌헨 올림픽 당시 `검은 9월단`이라 불리는 팔레스타인 테러 집단이 이스라엘 선수 및 관계자 11명을 인질로 잡는 사건이 일어난다. 독일 경찰들의 실수로 테러에 가담한 단원들과 인질들이 모두 죽는 것으로 21 시간 동안의 인질극은 끝이 나고 만다. 이에이스라엘 정부는 `신의 분노 작전`이란 보복 테러를 계획하고, 모사드(이스라엘 전보 기관)의 일원인 애브너(에릭 바나)를 중심으로 작은 팀을 꾸린다. 이 작은 팀은 겉으로 보기엔 일상적인 평범한 소시민처럼 보이나 앞으로 일어날 수 많은 살인 사건의 중심이 된다.

어느 정도 감이 잡혔는가? 그렇다 테러에 이은 또 다른 테러라는 것. 끝이 나지 않는 뫼비우스 띠처럼 계속 해서 반복되는 무의미한 힘 싸움 말이다. 이것이 영화 뮌헨의 기본 골격이다. 한 사람을 살해하면 그 사람을 대변하는 또 다른 인물들이 나타난다. 그 인물은 또 다른 테러를 자행하고 암살단은 그 자를 처형한다. 끝 없는 악순환일 뿐이다.   

영화의 감독 스필버그는 말할 것 없는 세계적인 명장. 이 영화에서 너무나 철학적이고 민감한 정치적 문제를 다뤘다. 하지만 그 주제보다 더 만만치 않은 것은 배우들이다. 트로이의 애릭 바나(애브너), 샤인의 제프리 러시(애프라임), 증오의 마티유 카소피츠(로베르)가 그들이다. 이 배우들은 그 당시(캐스팅 되었을 당시) 연기력을 검증 받았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받지 못한 배우들이었다. 게다가 주역 애릭 바나를 캐스팅한 이유가 더욱 재미있다. «강인하면서도 두려움을 지닌 눈빛» 이것이 스필버그의 대답이다.

강하면서도 두려워한다... 모순적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모순적이다. 보복 테러를 감행하기로 한 애브너의 암살단은 어린 아이와 가족들은 죽이지 않는다는 룰을 세운다. 충분히 인간적인 배려이지만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일이다. 아버지를 잃은 남은 가족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 할 것이며 그 충격으로 한 평생을 살아갈 어린 아이의 미래를 어떻게 책임 질 것인가?

가족은 애브너가 암살단의 리더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가족이 우선이다. 자신의 가족의 안위를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해내고 만다. 가족이란 아버지,어머니 그리고 그 둘의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 이것이 조금 발전하면 친척이요, 조금 더 발전하면 한 씨족이 형성되고 이 씨족들이 더욱 더 발전해 나가면 민족이 되는 것이며, 한 국가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영화 초반의 애브너와 그의 만삭된 아내와의 베드신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보여준다. 이런 가족의 소중함 때문에 자신이 꼭 죽여야 하는 적의 가족에게서도 고향에 남아있는 자신의 가족이 생각 났을 것이다. 이것이 모순된 룰을 만든 원인이다.  

영화의 흐름은 주인공의 감정의 변화에 따라 흘러가고 그 감정의 변화들은 색감을 통하여 나타난다. 애브너가 임무를맡기 전의 배경과 옷을 살펴보자. 배경은 중동이다. 아주 정열적이고 따스한 느낌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애브너의 옷들도 따스한 느낌이다. 맡은 임무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보여주는 것. 하지만 임무를 맡을 때의 모든 상황들은 어둡고 칙칙하다. 살인을 저지르는 장소(유럽)나 옷들이모두 우울하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성공적인 임무 수행의 만족감보다도 의미 없는 살인에 대한 회의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끝으로 애브너의 귀환에서는 차가운 모습들이 자주 보인다. 영웅이된 자신, 그리고 아내와의 재회의 기쁨보다도 더 큰 아픔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아픔은 자신을 잃은 남자의 파멸이 준 상처에서 오는 것이다. 남자는 가족을 위해 임무를 수행했지만, 이젠 자신의 가족이 타깃이 될 거라는 생각에 안절 부절한다. 마지막 베드신을보자. 아내와의 첫 번째 베드신에서 보여준 사랑의 환희와는 너무도 다른, 인간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과 분노가 폭발되는 파멸의 과정을 보여준다. 가족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행한 모든 행위들은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듯. 자신이 죽였던 그들도 자신의 민족을 위하여 일하던 사람들이었단 걸 깨달았다는 듯.           

"식사하실래요?"

영화를보고 난 뒤에도 기나긴 여운을 남겨주는 이 한 마디. 영화는 간절하고도 간결한 애브너의 이 대사 한 마디와 뒤로 보이는 맨하탄의 풍경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그리고 당당히 서있는 쌍둥이 빌딩도. 마치 30여 년 후 이 곳에서 165분간 보여주었던 이 사건이재발하리라는 것을 얘기해주는 것처럼.

가도가도 끝이 안 보이는 뫼비우스의 띠. 이 띠를 끊을 대안은 없는 것 일까? 아니다. 이미 2000여년 전에 유대 땅에서 메시아라 불리던 분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안이다. 이 구절을 끝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나는 너희에게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말라.
누구든지 네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으로 돌려대며
(생략)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장 39-44절)»

뮌헨 테러 스필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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