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편집자말]
극장 안. 영화 예고편이 끝나고 영화관 불이 다 꺼지면, 눈을 크게 뜬다. 귀를 쫑긋 세운다. 가슴이 쿵쾅 거린다. 어떤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 설렘과 긴장감이 좋아 극장을 찾는다.

오늘은 소녀인지 숙녀인지 모호한 한 여성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리운 듯, 조금은 두려운 듯 누군가를 찾아가는 표정이 오묘하다. 영화 <파주>는 그렇게 시작한다. 화면 속 그녀를 태운 택시가 달리는 길에 안개가 자욱하다.

'그의 차는 흰 안개의 터널로 들어섰다. 백발마녀의 머리카락같이 가느다란 안개의 결이 촘촘히 그의 차를 감싸기 시작했다.'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에서 주인공 최인호가 무진시에 들어섰을 때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겹쳐진다. <도가니>가 청각장애인학교 '자애학원'을 둘러싼 아픈 현실을 파헤치고 있다면, <파주>는 형부와 처제라는 금지된 관계를 둘러싼 아픈 사랑을 파고들고 있다.

이 모든 게 사랑했기 때문에? 때문에!

 영화 <파주>는 '파란의 러브스토리'를 표방한다.

영화 <파주>는 '파란의 러브스토리'를 표방한다. ⓒ TPS컴퍼니

'파란의 러브스토리.' 영화포스터는 110분간의 <파주>를 이 여덟 글자로 압축한다. '파란'(순탄하지 아니하고 어수선하게 계속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시련)의 뜻대로 영화는 8년여를 넘나들며 순탄치 않은 사랑의 과정을 그린다.

첫사랑과의 불미(!)스러운 사건 끝에 주인공 중식은 죄책감을 안고 파주를 찾는다. 그곳에서 만난 은수.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못했지만" 그녀와 결혼한다. 은수의 유일한 혈육인 동생 은모.

그녀는 중식이 처음부터 탐탁지 않았다. 언니를 빼앗긴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 적개심을 가출로 표현했던 은모. 그 가출로 인해 사고가 나고 언니 은수가 죽는다(스포일러라고? 그렇다. 미안하다. 그래도 영화사에서 나온 소개 글보다는 양호하다).

사실 사랑이야기는 지금부터다. 형부 중식과 처제 은모가 단 둘이 살게 된다.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 펼쳐진다. 그렇게 4년여가 흐르고, 어느 날 갑자기 은모가 중식 곁을 떠난다. 사랑했기 때문이란다. 다시 3년 후, 그녀가 중식 곁으로 돌아온다. 중식은 파주,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사랑했기 때문이란다.

사랑은 경작되는 것이라 했거늘, 어찌 <파주>는...

 언니 은수가 죽은 후, 형부 중식과 처제 은모가 함께 살게 된다.

언니 은수가 죽은 후, 형부 중식과 처제 은모가 함께 살게 된다. ⓒ TPS컴퍼니


이제 그 '사랑' 이야기 좀 해보자. 신영복 교수는 "사랑이란 생활의 결과로서 경작되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영화 얘기에 너무 고루한 인용을 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또 혹자는 '첫눈에 반한 사랑'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8년여의 연애 끝에 결혼한 필자는 '경작하는 사랑'에 더 끌린다.

그렇다면 중식과 은모는 언제 사랑을 농사 지었을까. 아마도 함께 산 4년여의 시간 동안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전후로도 감지되는 감정의 선은 있지만…. '농사짓는 사랑'에선 <파주> 홍보 문구가 강조하는 '문제적', '금지된'은 중요하지 않다. 그 뒤에 붙는 '관계'가 중요할 뿐이다. 나와 너가 무엇을 주고 받았는가. 주고 받은 그 무엇에 따라 설렘도 생기고 행복도 느끼고 가슴이 시리기도 하고 슬픔에 북받치기도 한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중식과 은모의 사랑에서 이런 감정들을 느끼지 못했다. 한 순간, 유치장에 갇힌 중식에게 옷가지들을 챙겨다주러 간 은모.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볼 때 보이던 눈빛의 흔들림. 그 순간 '아, 이들이 사랑하고 있나' 싶었을 뿐이다.

그들의 눈빛은 서로를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영화는 중식이 고백하던 한 장면을 빼고는 그들이 사랑하고 있다는 힌트를 주지 않는다. 시의 행간을 읽듯 영화의 장면 사이에서 사랑을 읽어야 한다. 마지막 장면까지도 관객 상상의 몫으로 남겨둔다. 마지막까지도 그들의 사랑 찾기가 쉽지 않았던 나는 '내 사랑의 내공 부족'을 탓하며 극장을 나서야 했다.

내가 아는 사랑만 사랑이 아니니

나로서는 사랑 찾기엔 실패했지만 영화 <파주>가 주는 소소한 즐거움들은 있다. 앳된 중학생부터 성숙한 20대 여성까지 은모가 겪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실감나게 보여준 배우 서우. 너무 달콤해서 비현실적이었던 <커피프린스>의 최한성이 아닌 죄책감에 시달리며 홀로 소주잔을 들이키는 김중식을 현실적으로 연기한 배우 이선균.

이 두 배우를 비롯한 언니 은수, 첫사랑 자영 등을 연기한 배우들의 연기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 울림을 만든 박찬옥 감독을 <질투는 나의 힘> 이후 7년 만에 만났다는 것도 반갑다.

그럼에도 마음이 안개 자욱한 <파주> 속 거리를 걷는 것 같다고? 이 개운치 않은 마음 갈피의 원인을 꼭 알 필요는 없다. 중식도 그러지 않았나. "모르는 편이 나은 게 있다"고. 내가 아는 사랑만 사랑이 아니지 않은가.

영화 파주 박찬옥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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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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