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식 한화 감독이 30일 오후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2009 프로야구 미디어데이'에서 올시즌 포부를 밝히고 있다.

김인식 한화 감독. 사진은 지난 3월 30일 오후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2009 프로야구 미디어데이'에서 올 시즌 포부를 밝히는 모습. ⓒ 유성호

'국민감독' 김인식 감독이 결국 정들었던 한화의 지휘봉을 내려놓게 됐다. 올시즌 빙그레 시절이후 23년만에 꼴찌를 기록하며 역대 최악의 성적을 거둔 한화는 이미 한대화 삼성 수석코치를 새로운 사령탑으로 영입하고 김인식 감독은 팀 고문으로서 위촉하며 팀 개편에 대한 의지를 명확하게 했다.

김 감독의 퇴진은 많은 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당초 PS 진출은 어렵더라도 최소한 5~6위 정도만 되었더라도 김인식 감독의 재계약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만큼 검증된 경력에다가 야구계 전반을 아울러 폭넓은 지지를 받고있는 지도자도 쉽게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계약 마지막해 거둔 최악의 성적은 국민감독조차도 극복해내기에는 힘에 부쳤다.

김인식 감독의 퇴진을 바라보며 역시 WBC 이야기를 하지않을 수 없다. 지난 3월 WBC 대표팀을 맡느라 소속팀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이 팀성적에 영향을 미친 부분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김인식 감독 어느 누구도 맡지 않으려던 '뜨거운 감자'가 된 대표팀 감독직을 주변의 요청에 못이겨 떠밀리듯 수락해야했다.

사실 그가 맡지 않는다고 해도 누구도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거동은 불편했고, 팀 성적은 좋지 못했으며 주변의 기대나 돌아가는 상황들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김인식 감독은 고심 끝에 대임을 수락했다. 작게 보면 정과 의리에 흔들렸다고 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있어야 야구가 있다'는 확실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회 준비기간에도 악재는 끊이지 않았다. 김 감독이 원했던 프로야구 현역 감독들의 대표팀 코칭스태프 합류 고사, 박찬호와 이승엽의 대표팀 은퇴, 김병현의 여권분실 해프닝, 속출하는 부상선수 등등, 여러 가지 난제들이 속출했지만 김 감독은 주변의 상황에 대하여 한번이라도 비난하거나 원망한 적이 없다. 그저 주어진 현실 아래서 묵묵히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노감독의 빛나는 결단력과 뚝심은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1회 대회를 능가하는 준우승이라는 값진 성과로 되돌아왔다. 비록 일본에 패배 우승컵은 놓쳤지만, 대회 내내 보여준 김인식 감독의 과감한 결단력과 뚝심의 용병술은 많은 이들의 찬사를 자아냈다. 세계 무대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선수들을 이끌고 메이저리거들이 즐비한 강호들을 연파하며 한국프로야구의 저력을 보여준 김인식의 신화는 일약 국민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김 감독을 '국민감독'으로 급부상시켰다.

하지만 좋았던 시절은 거기까지였다. WBC를 무사히 마치고 소속팀에 복귀한 김인식 감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한화의 초라한 현실과 코앞으로 다가온 프로야구 시즌 개막이었다. 세대교체 실패로 인한 노장들의 노쇠화, 유망주들의 더딘 성장이 발목을 잡았고, 노감독이 자리를 비운 동안 한화의 상황은 당초 김 감독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나마 4~5월 5할 승률을 맴돌며 선전하던 한화는, 김태균·이범호 등 주축선수들의 줄부상과 마운드의 붕괴가 겹치며 6월에 꼴찌로 전락했고, 이후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했다. 김인식 감독도 프로 지휘봉을 잡은 이래 1992년 쌍방울 감독 시절 이후 17년 만에 당해 본 꼴찌였고, 한 시즌 최다 기록인 12연패와 두 자릿수 연패 2회라는 불명예 기록도 추가했다. 하루하루가 김인식 감독에게는 가시방석과도 같았다.

어쨌든 총책임자로서 김인식 감독이 성적부진에 대하여 일정부분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화의 몰락은 김인식 감독만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누적된 한화 구단의 구조적인 문제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한화는 몇 년간 이렇다할 외부로부터의 선수 보강이 없었고, 투자에도 인색했다.

우수 선수들이 운집한 수도권과 달리 지역연고의 유망주 발굴도 가뭄에 콩 나기였다.  김인식 감독이 2005년 한화 부임이래, '재활의'라는 닉네임을 얻을만큼, 전성기가 지난 노장선수들을 다시 불러들여 팀의 고령화를 부추기고 세대교체를 지연시켰다는 비판을 받은 것도 알고보면  이런 속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화는 김인식 감독이 부임할 때부터 우승전력과는 거리가 있었다. 99년 우승 신화를 일궈냈던 레전드 투수진은 김인식 감독이 한화에 첫 발을 내딛을 당시 이미 전성기가 지나고 있는 상태였고, 류현진·김태균 같은 뛰어난 젊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전반적인 선수층은 얇았다. 그런 팀을 이끌고 김인식 감독은 3년연속 PS진출과 1회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일궈냈으며 지난해도 PS에는 탈락했지만 마지막까지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김인식 감독이 무능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김인식 감독에게 2009년은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넘나드는 시간이었다. 불과 반년 전만 하더라도 '국민감독'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자리매김했던 김인식 감독은 이제 꼴찌팀 감독으로서 쓸쓸하게 물러나는 운명을 맞이했다.

한국야구가 김인식 같은 노장의 경험과 연륜을 잃는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김인식 감독은 김성근 SK 감독과 함께 프로야구에 몇 안 남은 60대 노장이었다. 91년 쌍방울 시절부터 두산·한화를 거치며 프로통산 980승을 달성한 김 감독은, 대망의 1000승 고지에 단 20승만을 남겨뒀다. 고령의 나이와 건강을 감안할 때 김인식 감독이 언제 다시 프로팀 지휘봉을 잡을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운 부분이다.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라지만, 만일 김인식 감독이 WBC 사령탑을 맡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한국야구는 불편한 몸의 노장에게 예전부터 너무 많은 짐을 떠넘겼지만 그에 걸맞은 보답은 해주지 못했다. 그가 조금만 더 이기적이었다면, 조금만 더 냉정했다면 어쩌면 지금같은 운명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또 김인식 감독이 아닐 것이다. 김인식 감독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겼던 한국야구계와 야구인들이 공통의 부채의식을 느껴야할 부분이다.

아쉬운 결말이지만 김인식 감독은 떠나는 순간까지 어떤 핑계도 원망도 없었다. WBC 대표팀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특유의 소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제자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했을 뿐이다. 그런 긍정과 믿음의 정신이야말로 노감독의 매력이기도 하다. 비록 몸은 노쇠했지만 야구를 향한 열정과 감각은 아직도 팔팔한 20대 못지않은 노감독에게 아직 은퇴는 이르다. 김인식 감독이 언젠가 다시한번 프로팀의 지휘봉을 잡아서 멋지게 명예회복하는 날을 기다려본다.

김인식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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