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이 9월 들어 때아닌 '가을잠'에 빠져들었다. 중상위권팀들이 너나 가릴 것없이 치열한 순위 경쟁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유독 두산만큼은 남의 집 불구경바라보듯이 경쟁에서 열외되어 유유자적한 행보를 보였다.

9월초 두산의 페넌트레이스 3위 확정이 굳어지면서 사실상 김경문 일찌감치 포스트시즌 준비 체제에 돌입했다. 1·2위를 추격하기에는 너무 멀어져버렸고 그렇다고 4강싸움을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김경문 감독은 쓸데없는 '헛심'을 쓰기보다는 오랜 강행군에 지친 주축들이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비축하는 재충전을 선택했다.

'유유자적' 두산의 때아닌 가을캠프

 두산 김경문 감독이 29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리는 200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3차전 SK와의 경기에 앞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두산 김경문 감독 ⓒ 유성호

두산은 최근 경기에서 순위경쟁과 무관한 약체 팀들과의 대결에서는 베스트 멤버들을 제외하는 1.5군 위주의 라인업을 선보였다. 또한, 전체 투수진을 고르게 1이닝 이상 기용하는 '스프링캠프'식 마운드 운용을 선보이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일부의 원성을 듣기도 했지만 두산은 결과에 크게 개의치않았다.

물론 소득은 있었다. 올시즌 내내 강행군에 혹사당했던 불펜진이 모처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얻었고, 잔여경기에서 부담없이 컨디션을 조절하며 포스트시즌에 맞춰 구위를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벤치멤버들의 경쟁력을 입증한 것도 성과다. '화수분'으로 불리는 두산의 백업요원들은 최근 경기에서 주전들 못지않은 쏠쏠한 활약을 선보이며 김경문 감독에게 포스트시즌 엔트리를 구성하는데 행복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두산은 김경문 감독이 취임한 지난 2004년 이래 6시즌 연속 5할 승률을 기록했고. 5번이나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하지만 우승의 감격은 한번도 맛보지 못했다. 오히려 정규시즌 2위와 한국시리즈 준우승만 세 차례나 기록했다. 김경문 감독은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통하여 우승의 한을 풀기는 했지만, 정작 국내 무대에서 그와 두산에게 따라붙는 '2인자'의 이미지는 오래된 콤플렉스다.

또한 지난 2년간 2위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직행한 것과 달리, 올해는 준플레이오프로 한단계 '강등'되어 가을잔치의 시작이 더욱 불리해진 셈이다. 하지만 두산은 오히려 여유만만하다. 팀분위기나 전력은 오히려 지난 2년간보다 더욱 탄탄해졌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올시즌 두산은 정규시즌부터 속출하는 부상병동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초반 이후 한번도 3위권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을 만큼 안정된 전력을 자랑했다. 무너진 선발진, 실종된 발야구에도 불구하고 두산이 기복없는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두산 야구의 시스템이 안정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구를 내보내도 제몫을 다하는 풍부한 선수층, '김경문의 아이들'로 불리는 유망주들의 꾸준한 성장세는 두산 야구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두산은 내친김에 올해 가을잔치에서 한국 프로야구 27년사에서 단 2번밖에 없었던 '3위의 반란'을 꿈꾸고 있다.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해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한 7.4% 확률의 주인공이 바로 두산이기 때문이다.

2001년의 기적을 꿈꾸는 두산

두산은 지난 2001년, 정규시즌 3위(65승63패)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준 PO에서는 한화, 플레이오프에서 현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시리즈에서는 호화군단 삼성을 격파하며 우승컵을 안은 바 있다.

2001년은 한국야구 사상 역대 최고의 타고투저 시즌 중 하나로 꼽혔고, 이런 현상은 포스트시즌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두산은 삼성과 한국시리즈 사상 최고의 타격전을 펼치며 각종 타격부문 진기록을 경신했다.

단일리그로만 치러진 역대 한국프로야구 사상 3번 시드로 우승컵을 거머쥔 것은 1992년의 롯데와 2001년 두산뿐이다. 1999년 한화가 정규시즌 승률로는 4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라 우승까지 차지했지만 당시는 드림과 매직리그로 분리된 양대 리그 체제였다. 그리고 정규시즌 1위가 아닌 팀에 한국시리즈에서 '업셋'을 달성한 마지막 사례도 두산이다.

2001년 이후 지난 7년간은 모두 정규시즌 1위 팀이 한국시리즈까지 통합제패했다. 우승팀은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하위시드팀은 단계별로 준 PO와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핸디캡'을 부여하는 한국형 포스트시즌 제도에서 하위팀의 우승은 기적에 가까워지고 있다.

또한 두산은 이보다 한 해 앞선 2000년에는 2위로 한국시리즈에 올라 현대에 초반 3연패로 뒤졌으나 이후 3연승을 내달리는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여 한국시리즈 사상 전무후무한 '역스윕'에 가장 근접했던 팀이기도 하다. 큰 경기에서 빛을 발하는 두산 특유의 뚝심야구는 포스트시즌에서 더욱 빛을 발했던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두산이 '어게인 Again 2001'을 노리기 위해서는 역시 선발진의 고민을 먼저 해결해야한다. 지난 2년간 두산을 내내 괴롭혀온 '선발 에이스' 부재는 아직 확실하게 해소되지 않았다. 김선우가 최근 잘해주고 있지만, 포스트시즌 같은 큰 경기에서 7이닝 이상을 믿고 맡길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이용찬의 부진으로 인한 마무리 난조도 막판 아킬레스건으로 떠올랐다. 마운드 운용에서 포스트시즌의 시작과 끝을 책임져야 할 김선우와 이용찬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대진운도 중요한 변수다. 준플레이오프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은 후보군 중에서 두산은 삼성에는 11승 7패로 우위지만, 롯데에는 9승 10패로 열세를 보였다. 현재로서는 삼성보다는 롯데와 다시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롯데는 리그에서 KIA 다음으로 선발투수진이 뛰어난 팀이다.

준플레이오프에 오르면 지난 2년간 한국시리즈에서 계속 앞길을 막아온 '천적' SK와 재회할 가능성이 높다. 두산은 올해 SK에 9승1무7패로 근소한 우위를 보였지만, 최근 16연승 행진을 달리며 가파르게 살아난 SK는 포스트시즌이 더욱 부담스러운 상대다. 두산은 최근 2년간 한국시리즈에서 연이어 만나 1차전 승리의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해 시리즈 역전패를 당한 바 있다. 두산 선수들에게 있어서 SK는 KIA보다도 더 포스트시즌에서 만나기 싫은 상대다. 두산은 올시즌 KIA를 상대로 12승 7패의 우위를 보였다.

정중동의 9월을 보내고 있는 두산이 과연 가을잔치에서 또 한번의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느긋하게 준 PO 파트너를 기다리고 있는 두산이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보여줄 행보가 기대를 모은다.

야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