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들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영화사진 살인 용의자 피어슨

▲ 영화사진 살인 용의자 피어슨 ⓒ 선필름


홍기선 감독의 영화<이태원 살인사건>은 살인범이 밝혀지지 않은 과거의 살인사건을 통해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불편한 현실을 다룬 영화입니다. 80년대 영화운동의 맹장으로 평가받는 홍기선 감독은 장산곶매가 광주항쟁을 소재로 만든 영화 <오! 꿈의나라>(1989)의 각본을 맡기도 했습니다.

서슬퍼런 80년대에 영화란 매체를 통해서 사회의 불평등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온 그의 작품세계를 감안한다면 <이태원살인사건>의 전개방식은 십분 이해할 수 있을듯 합니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1997년 발생한 실제 살인사건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피해자 가족의 동의를 거쳐 실명으로 피해자 이름이 공개된 이 영화는 모대학 휴학생으로 가해자에게 아무런 원한관계를 갖지 않았던 조중필씨가 햄버거 가게에서 무참하게 살해된 사건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사건 직후 미군수사대에게 범인의 신병과 진술을 넘겨받아 쉽게 처벌하는 듯 했지만 피의자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살인범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대법원을 거쳐 무죄로 종결된 사건입니다.

가해자인 두 사람 피어슨(가명)과 알렉스(가명)는 대법원 판결 이후 미국으로 출국했고 그 이후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제작 의도는 좋으나 배역은 아쉬워

영화사진 살인현장 검증

▲ 영화사진 살인현장 검증 ⓒ 선필름


홍기선 감독은 <씨네21>과 한 인터뷰에서 <이태원 살인사건>을 통해 실제사건이 가진 미스터리를 현실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이미 결론이 나있는 사건, 범인이 드러난 사건이지만 결국 처벌에 이르지 못한 사회 구조의 모순과 상처받은 사람들을 묘사하겠다는 것이 감독의 제작 의도입니다.

결론이 이미 나있는 데다가 범인을 처벌할 수 없다 보니 관객에게 카타라시스를 안겨줄 통쾌한 한방이 이 영화엔 없습니다. 통쾌한 한방이 없는 영화가 상업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는 아마도 제작자들이 더 잘 알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감독과 제작사의 지향점이 흥행보다는 사회적 불평등과 상처받은 사람들을 절절하게 묘사하는 데 있다면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선 매우 성공적입니다.

관객들은 피의자 두 사람이 무죄면 도대체 내 아들은 누가 죽였느냐고 울부짖는 유가족에게서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느끼지만, 황당한 판결의 배후에 가로놓인 사법체계의 모순과 한미 관계의 불평등성 노출에는 말문을 잃게 됩니다. 터져 나오는 분노는 없지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억울함과 무기력함이 후반부로 갈수록 스멀스멀 관객들을 찾아옵니다.

4년간에 걸친 고증, 40명에 달하는 사건 관련자들의 인터뷰 자료와 법적 분쟁에 대비한 탄탄한 준비작업을 바탕으로 영화는 감독이 의도한 정점에 도달합니다. 그 도착점이 아마도 상업적 성공과는 다른 방향일 가능성이 높지만 말입니다.

홍기선 감독의 제작 의도를 십분 감안한다 하더라도 배역에 대한 아쉬움은 한번쯤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독이 이 영화에 대해 지닌 문제의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사건해결의 책임을 맡은 주인공 박 검사(정진영)와 알렉스(신승환)의 변호사인 김 변호사(오광록)의 심리묘사가 중요합니다.

살인사건의 진실과 상관없이 의뢰인을 변호하지만 그 이면에 숨은 법조인으로서의 갈등을 온전히 보여주기에 배우 오광록의 연기는 아쉽습니다. 기존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이미지가 김 변호사 역에 대부분 그대로 재현되어 영화에서 필요한 극적 사실감과 긴장감을 이어가는 데 뚜렷한 한계를 노출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있고 체포된 가해자가 있지만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은 이 살인사건은 법적으로는 종결됐지만 아직 공소시효가 남아있습니다. 이 영화가 물꼬가 되어 감춰진 사건의 진실과 가해자를 밝힐 수 있도록 재수사가 이뤄지기를 진심으로 빌어봅니다.

이태원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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