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피살당했다. 그것도 아무 이유 없이. 미군은 피어슨(장근석 분)이 범인이라고 단정한다. 피어슨은 알렉스(신승환 분)가 죽였다고 말한다. 알렉스는 억울하다며 범인은 피어슨이라고 말한다. 둘 중 하나는 거짓을 말하고 있다. 물론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이런 공식을 가진 영화는 흔하다. 발에 차이는 스릴러 영화나 법정 영화나 추리 소설의 단골 테마다. 그러나 실화를 각색했다면 말이 달라진다. 허구처럼 보이는데 현실이라면, 현실이 꿈이나 상상의 세계보다 더 잔혹하다는 증거다. 범인(犯人)들의 모략과 음모가 있고, 범인(凡人)이라면 상상도 못할 국가 대 국가, 집단 대 집단 간의 알력 다툼이 벌어질 수 있다. 홍기선 감독의 <이태원 살인사건>이 딱 그런 영화다.

죽은 자는 있는데, 죽인 자는 없는 '이태원 살인사건'

ⓒ 선필름

이 영화는 1997년 미스터리한 재판 과정과 가해자 없이 피해자만 남긴 채 끝나버린 '이태원 햄버거가게 살인 사건'을 극화했다. 현대사는 이 사건을 검사에겐 치욕을, 피해자에게는 한을, 유가족에게는 눈물을, 국민들에게는 불신과 분노를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극장을 들어서기 전에 근심이 앞서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다리가 하나 부러진 의자에 앉을 때의 두려움이랄까. 주연 배우는 정진영과 장근석이다. 중년의 카리스마와 풋풋한 꽃미남 아이돌의 연기경쟁이 치열하다. 

감독은 1992년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2003년에는 <선택>을 연출한 홍기선 감독이다. 독립영화의 인장과도 같은 그가, 억압받는 민중과 한 시대의 양심과 신념을 대변했던 그 감독이, 장르 영화를 만들었니. 영화를 보기 전부터 지레 세 사람의 불협화음을 예상한다면, 당신은 선입견이 많은 사람이거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사람이 아닐까.

영화는 장르라는 외피로 지붕을 얹었고 기둥 역할은 배우들에게 맡겼다. 영화 속 진실 게임에 배우도 관객도 혼란스러워 할 즈음, 감독의 뚝심이 주춧돌처럼 영화를 받쳐준다. 지붕부터 보여주고 내부로 들어간다. 자연스레 관객은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장르적인 요소들을 먼저 만난다.

그러나 미국의 법정영화들처럼 거대 기업이나 국가를 상대로 한 지루한 공방전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물론 <이태원 살인 사건> 속에도 진실을 둘러싼 권력 다툼이 벌어진다. 미국과 한국의 동맹관계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거대 로펌과 사법부의 대립이 희뿌연 안개처럼 짙게 깔린다. 그러나 선명하지는 않다.

CF 속 꽃미남도 <베바> 강건우도 아닌 장근석, 눈에 띄네

오인과 오판의 발생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측면에서는 작년 국내에 개봉했던 수오 마사유키의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가 떠오른다. 물론 두 영화는 확연히 다르다. 수오 마사유키가 진짜로 억울한 이의 양심을 클로즈업 한다면, 홍기선은 억울한 척하는 이들의 위선을 클로즈업 한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초반부에 두 명의 용의자 피어슨과 알렉스의 진술이 각기 다르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아른거린다. 진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진술에 의해서 재구성된다는 명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점에서, 두 영화의 주제는 일맥상통한다.

배우들의 조화는 의외의 수확이다. 장근석은 더 이상 CF 속 꽃미남이 아니며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건우도 아니다. 영화 속에서 피어슨을 연기한 장근석은 말수를 최대한 줄였다. 안면 근육은 시종일관 긴장된 상태를 유지한다. 독한 남자의 전형이다. 그리고 또 다른 수확은 알렉스 역의 신승환이다. 그간 충무로에서 작은 조연으로 간간이 얼굴을 비추던 그는, 이 영화에서 재미교포 2세를 맡아 어눌한 한국말을 쓰면서 좌중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피어슨이 시종일관 입을 앙다물고 눈빛과 안면 근육의 미세한 떨림을 보여준다면, 알렉스는 정신없이 떠들어대고 과장된 행동을 한다. 사건 진술이 시작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눈빛 교환이 없어진다. 그들은 각자의 언어로 말하고 다른 곳을 쳐다본다. 둘 사이에는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겠다는 모종의 연대감이 흐른다.

감독의 페르소나는 '박 검사' 역을 맡고 있는 배우 정진영이다. 그는 유일하게 고민하는 자이며, 스스로의 양심과 확신을 의심하는 자다. 그는 홍기선 감독의 전작 <선택>에 등장하는 대사 "선택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 중 하나를 버리는 것이다"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한다.

영화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범인이 아니다

결국 지붕을 보여주면서 시작했던 영화는 내부를 해체시키고, 황망하게 드러나는 내부를 낱낱이 공개한다. 그러나 거기에도 진실은 없다. 거짓이 거짓을 낳고 있으며, 거짓과 거짓이 충돌하면서 중심에 있어야 할 진실은 튕겨져 나간다. 진실이 부재한 자리를 거짓과 위선이 점령해버린 꼴이다.

마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피해자의 영혼이 구천을 떠돌아다니듯이, 영화의 이야기는 원점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용의자들의 말을 거짓이라고 단정할 근거도 빈약하다. 애초에 거짓과 진실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진실이 끊임없이 재배치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영화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범인이 아니다. 범인은 둘이 아니라 한 명이다라고 믿는 박 검사의 확신이 영화의 핵심이다. 박 검사의 확신을 지탱해주는 직업윤리, 죄책감, 양심이야 말로 영화가 사수하려는 가치다. 영화는 법과 권력이 선과 악을 구분할 잣대가 될 수 없을지언정, 진실은 존재한다는 믿음만은 남겨둔다.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죽었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은 자의 뼈에는 진실이 아로 새겨져 있을 것이다.

이태원 살인사건 정진영 장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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