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여름 극장가에는 한국 공포영화가 두세편 정도 등장하곤 했다. 1998년부터 시작된 <여고괴담> 시리즈를 비롯해 <장화, 홍련>, <알포인트> 등이 평단과 관객의 사랑을 받았고 2007년에 나온 <기담>, 그리고 올해 나온 <불신지옥> 등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영화를 접한 관객들에게는 좋은 인상을 심어줬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반응을 얻었던 공포물들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심지어 악평 속에 간판을 내려야 했던 공포영화들도 수두룩했다. 빈약한 스토리와 이유없는 잔인함, 과다한 특수효과, 일명 '사다코'로 대표되는 여자 귀신의 무분별한 등장 등이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무엇이 진정한 공포인가'라는 생각없이 그저 무서움만 주면 된다는 안일한 발상은 한국 공포영화를 몰락시킨 가장 큰 원인이었다.

진정한 공포는 무엇인까? 꼭 귀신이 나오고 잔혹한 살인이 나와야 공포를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지금, 세상을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하는 지금의 나의 삶이 어쩌면 가장 큰 공포를 주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한 영화가 있다. 김태곤 감독의 <독>이 그것이다.

영화 처음부터 불안감이 밀려온다

서울의 아파트로 이사 온 형국(임형국)과 영애(양은용). 두 부부 사이에는 귀여운 딸 미애(류현빈)가 있고 영애는 곧 둘째를 출산할 예정이다. 만삭의 엄마와 귀여운 딸,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형국의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인다.

 서울의 아파트로 이사온 형국(임형국)의 가족들

서울의 아파트로 이사온 형국(임형국)의 가족들 ⓒ 인디스토리


형국의 사업을 도와주는 사장은 교회 장로다. 형국의 이웃에 사는 사장 부부는 형국과 영애에게 교회에 다닐 것을 권유한다. 두 부부는 교회에 다니게 되고 형국은 하나님을 신봉하며 거액의 돈을 헌금으로 내놓기도 한다.

그런데 부부는 미애를 끔찍이 아끼는 장로의 노모가 좋아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치매기가 있는 장로의 노모가 사망하고 그때부터 미애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만삭인 엄마의 배를 걷어차고 어린이집에서 노모가 불렀던 이상한 노래를 따라부르는 미애. 장로 부인은 그런 미애를 경계하라고 한다. 기울어지는 사업, 친구의 배신, 그리고 장로 부부의 기이한 행동 속에서 감춰졌던 형국의 과거가 서서히 드러난다.

<독>은 화려한 CG나 과도한 음향 등으로 불안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절로 불안감이 일 수밖에 없다. 첫 장면에 나오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면 이 가족에게 무슨 끔찍할 일이 생기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만삭의 영애, 아니 배우 양은용의 표정을 보면 더 그렇다.

 만삭인 영애(양은용)의 모습은 가족의 불안감을 잘 보여준다.

만삭인 영애(양은용)의 모습은 가족의 불안감을 잘 보여준다. ⓒ 인디스토리


교회에 탐닉하기 시작하는 형국의 모습은 정말 불안해보인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를 교회로 이끈 것이다. 허나 그가 교회에 나가는 이유는 예수를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불안을 씻기 위한 것이다. 장로 부부는 아예 믿음을 벗어나 무당식 '안수기도'를 일삼는다.

불안이 있지도 않는 귀신을 부른다

여기서 이 영화가 의도하는 '공포'가 나온다. 공포는 단순히 귀신이나 살인마가 등장한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감, 주위 사람들조차 믿을 수 없는 의심, 언젠가 자신의 끔찍한 과거가 드러날 것 같은 두려움, 이것이 바로 '공포'다.

그런 공포심이 있지도 않는 귀신을 만들어내고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람은 점점 이성을 잃고 난폭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곧 파멸로 이어진다. <독>은 이것을 제대로 보여준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포와 불안을 <독>은 무섭게 파헤친다. 그래서 관객은 섬찟함을 느낀다.

그간의 공포영화들이 문제가 된 것은 바로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내면의 공포'를 외면했다는 데 있다. 등장인물들이 잔인하게 죽어나가도 공포를 느끼기는 커녕 실소를 짓는 관객의 모습은 '보여주기식 공포'의 한계를 바로 느끼게 해 준다.

'보여주기식 공포'에 질렸다면 권할 만한 영화

 불안에 빠진 형국(임형국). <독>은 내면의 공포를 잘 담아낸 작품이다.

불안에 빠진 형국(임형국). <독>은 내면의 공포를 잘 담아낸 작품이다. ⓒ 인디스토리


1998년 인기리에 시작된 <여고괴담> 시리즈가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몰락한 이유는 바로 교육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한 전편과는 달리 자극적인 소재와 '놀래키기' 중심의 이야기로 점점 빠져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독>은 정말 반가운, 제대로 된 공포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어설픈 부분도 군데군데 드러나지만 화려한 기술을 쓰지 않아도 관객의 마음 속에서 공포를 이끌어내려는 김태곤 감독의 능력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작은 영화'가 때로는 '큰 영화' 이상의 힘을 보여준다는 것을, 그리고 '작은 영화'가 얼마든지 '큰 영화'의 교과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독>은 보여줬다. 그간의 싱거운(?) 공포영화에 실망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놓치지 말 것.

김태곤 임형국 양은용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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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솜씨는 비록 없지만, 끈기있게 글을 쓰는 성격이 아니지만 하찮은 글을 통해서라도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글쟁이 겸 수다쟁이로 아마 평생을 살아야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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