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들 덕택에 어느 나라나 자국어 외에 영어까지는 스크린을 통한 대화 음성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반면 그외 제 3국의 언어는 비록 많은 사람이 쓰고 있다고 해도 익숙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중국영화도 대사음 때문에 못보겠다는 사람도 봤다.

블록버스터라 해서 극장에 갔는데 귀에 몹시도 거슬리고 낯선 언어가 나온다면 어떻겠는가. 아마 비위가 약한 이들은 극장을 뛰쳐나올는지도 모른다. 그럼, <노킹 온 어 해븐스 도어>라는 독일영화를 무난히 잘 소화하신 분, 그리고 감명을 받으신 분들에게 추천할 만한 영화를 소개한다. 만약, 독일어 대사가 귀 간지럽고 집중이 안 되어 몸이 꼬이는 분들은 적당히 예고편으로 만족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국내 배급사 홈페이지조차 없다. 독일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은 포스터 그림 파일.

국내 배급사 홈페이지조차 없다. 독일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은 포스터 그림 파일. ⓒ Bernd Eichinger

독일 적군파의 발생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바더 마인호프'는 <해운대>같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해리 포터>와의 싸움 속에서 살아남기 힘든 영화다.

서두에 이야기 했던 대사의 언어문제도 그렇고, 기껏 홍보타이틀로 내세우는 감독의 20년 된 영화,<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조차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일 뿐더러 유명배우들이라고 하지만 죄다 접해보지 못했던 독일배우들로 가득한 탓이다.

한 걸음 양보해서, 유럽과 남미, 중동 등의 영화를 두루 편식 없이 섭렵한 이들이라도 영화가 이야기하는 지금은 설득력을 거의 얻지 못하는 '적군파'에 관한 이야기라니, 그냥 누가 현란하게 써 놓은 리뷰만으로 적당히 머릿속에나 구겨 넣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볼 만하다. 장장 15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견디게(?) 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바로 우리가 처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다. 혹 우리가 '적군파'라도 결성해서 국가권력에 대항하자라는 이야기냐는 분도 있겠지만 나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속'은 나중에 이야기 하고, '껍질'만 보자면, 무려 이천만 유로의 제작비(독일영화 사상 최고)가 들었고 52여 명의 대사 출연진(오히려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과 쉴 새 없이 터지는 각종 액션 장면들이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당시 시위장면 묘사 적극적인 정부대항을 주장하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의 모습

▲ 당시 시위장면 묘사 적극적인 정부대항을 주장하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의 모습 ⓒ Bernd Eichinger


이국적인,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듯한 도입부의 장면은 눈을 스크린으로 집중하게 만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이들을 뒤로, 남녀노소 할 것 없는 나신(裸身)들이 아주 자유분방하게 해변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다. '그래 바캉스란 바로 저런 것'이라고 외칠 이도 있겠지만, 영화의 주제로 볼 때 이는 당시의 그네들이 얼마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 속에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의 일부다. 취조와 재판중의 담배나 이슬람국가에서 옷벗은 일광욕 등 그들은 거침없고 자유분방하며 누구에게나 당당했다.

누드비치에서 처음 등장하는 주인공인 '울리케 마인호프'는 당시의 독일에서 잘 나가는 글쟁이였다. 진보적인 시각에서 기사를 써서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고 있었는데 그녀가 느닷없이 '테러리즘'에 몸을 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RAF(Rote Armee Fraktion) 독일 적군파의 시작은 지식인과 행동파인 '안드레아즈 바더'와 그녀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이 바로 적군파의 1세대다.

바더 마인호프 그룹의 흥망성쇠를 담담하고 냉정하게 보여주는 카메라는 '나는 적군파 지지자도 아니고 비판도 하지 않아'는 감독의 말을 전하는 듯하다. 오히려, 훈련 받으러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조직으로 간 그네들의 망나니 같은 행동(그곳의 동지들을 무시하는 일광욕이나 전술적 유격 훈련거부, 사격훈련 태도)에 이르면 보는 이들은 과연 저것들이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놈들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호르스트 헤롤드 국장 경찰이라면 이정도는 되야지 하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이해'를 통해서 범죄를 줄이려는 노력이 눈물겹다.

▲ 호르스트 헤롤드 국장 경찰이라면 이정도는 되야지 하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이해'를 통해서 범죄를 줄이려는 노력이 눈물겹다. ⓒ Bernd Eichinger


반면 '호르스트 헤롤드'(당시 독일 연방 경찰국장)의 신중한 이해심이 영화 전반부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그들과 달리 폭력과 억압만을 강조하지 않고 이해를 통해서 부드럽게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마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라는 대사는 지금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다. 이해가 필요한 '고위층'들이 눈여겨봐야 할 인물이다.

1967년에서 1977년까지의 바더 마인호프 그룹과 연관한 무수히 많은 살육과 폭력이 영화속에서 줄을 선다. 1967년 이란 팔레비 국왕의 방문을 항의하는 시위대를 경찰이 과잉 진압하는 과정에서 한 학생을 경찰이 총으로 쏘는 사건으로 시작해 적군파를 다루는 영화의 곁가지이긴 하지만 이를 계기로 독일의 68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백화점 폭파로 주목 받게 된 이들은 독일 우익신문인 빌트(Bild) 지 공장의 배달차량을 방화하고, 이어지는 정부 고위 인사들의 암살과 자신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신문사에 대한 폭탄테러, 은행 강도, 동지 석방을 위한 비행기 납치와 장관 납치, 해외 독일 대사관 점거 및 인질극 등이 차례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보는 것은 폭력으로 얼룩진 그들의 과거뿐이다. 우리도 있었고 어느 나라에나 있었던 일이다. 이를 보고 누가 옳고 그르기를 따지기를 떠나 수없이 희생되는 생명을 보면서 과연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분명 경찰국가 속에서 인권이 희생되고 우로 우로 향하는 국가 기관의 보수적 행태를 국민으로서 견디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의 결과가 무엇인지 신랄하게 보여준다.

영화 전반을 통해 가장 충격적인 것은 우습게도 '감옥'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의 차이다. 현재와 과거, 무려 40년의 격차 속에서도, 과거의 독일과 지금 대한민국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 영화를 보며 내가 대한민국 사람임을 슬프게 한다.

이게 원룸이야 감옥이야 이런 데라면 무주택자나 노숙인들를 위해 임대해주어도 될 듯 하다.

▲ 이게 원룸이야 감옥이야 이런 데라면 무주택자나 노숙인들를 위해 임대해주어도 될 듯 하다. ⓒ Bernd Eichinger


대중적으로 큰 인기가 없고 극악한 테러리스트로서 갇힌 그들의 감방 안에는 버젓이 책장과 책상, 타자기, 라디오, 티브이가 존재하고 있다. 담배도 자유스럽고 그들끼리 모여서 토론하고 이야기할 기회도 충분히 주어진다.

죄 없는 외국 관광객을 폭행하고 미란다원칙의 낭독도 없이 무자비한 연행을 자행하는 지금의 우리 경찰과, 전 대통령을 압박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고 개인의 사적 편지를 임의로 편집해서 공개해버리는 사법권 앞에서 내 몸이 한 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검색을 통해 이미 이 영화를 보았던 블로거들의 대부분이 국내 개봉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점친 이유도 위와 같은 영화 내의 묘사 때문이었다. 물론 폭력적인 정부대항의 방식이 더 큰 이유겠지만 말이다. 사십 년 전 당시 독일 중죄수보다 못한 작금의 대한민국 국민인권의 비교. 마음이 아플 뿐이다.

그런데, 국민 대다수가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법안통과가 날치기로 이루어지는 오늘의 국회에 대한 연대저항의 방법은 무엇일까. 하긴 촛불만큼 대단한 효과를 본 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요즘 경찰이 광장을 봉쇄하고 사람들이 조금만 모이는 것에도 벌벌 떠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영화 초반, 빌트지 운반차량 방화사건을 기술하는 '마인호프'는 기사에 다음과 같이 쓴다.

'하나의 돌을 던지는 것은 범죄지만 천개의 돌을 던지는 것은 정치적 행위이다. 차 한 대를 불태우면 범죄이지만 천대의 차를 불태우는 것은 정치적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당시 그들의 폭력에 대한 당위성을 대표한다.

갑자기 물과 가스 없이 최루액을 뿌리는 헬기 아래서 기껏 볼트와 너트를 무기로 한 새총으로 무장한 쌍용자동차의 직원들이 특히 대부분 백수인 젊은이들의 대중적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슬퍼진다. 마취총을 발사하고 최루탄을 쏘고, 물대포를 쏴도 그냥 맞고만 있어야 하나. 방어를 위한 소극적 공격에도 연일 무뢰배나 폭도로 포장되는 덩치 큰 신문들이 뉴스방송까지 진출하는 것은 또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가.

그나저나 극장을 찾기도 쉽지 않다. 전국에서 서울의 두 군데 개봉관이다. 대기업이 장악한 극장가의 문제를 들추자면 또 한 꼭지를 쓰고도 남겠지만, 명색이 블록버스터인데 서울의 일부 예술영화 상영관에서나 관람이 가능하니 말이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인가. 개봉관이 앞으로 확대될 일도 없겠지. 또 슬프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본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RAF 독일적군파 바더마인호프 쌍용자동차 시위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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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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