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에도 어김없이 공포물이 대거 선을 보인다. 화제작 가운데 하나인 <여고괴담5:동반자살>.

올 여름에도 어김없이 공포물이 대거 선을 보인다. 화제작 가운데 하나인 <여고괴담5:동반자살>. ⓒ 씨네2000


가만히 앉아 있어도 무더위로 온몸이 나른해지는 여름. 열대야와 지루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탈출하고 싶은 당신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시원한 팥빙수 한 그릇, 그리고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오싹한 공포영화 한 편이 제격이다. 어느 때보다  무더운 여름이 예상되는 올 한 해, 2009년, 무더위를 서늘하게 날려줄 공포영화들이 극장가로 몰려들었다.

올 여름에도 한국 공포물 <여고괴담 5:동반자살>을 비롯해 <비명><요가학원><4교시 추리영역>, 외화로는 일본의 대표적인 공포물 시리즈인 <주온>, 샘 레이미 감독의 <드래그 미 투 헬><메디엄> 등 다수의 공포영화들이 벌써부터 관객들의 머리를 쭈뼛 서게 하고 있다.

공포영화는 매년 여름 블록버스터와 함께 극장가 흥행 구도를 양분하는 단골손님으로 꼽힌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무서운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일까. 많은 볼거리를 놔두고 대체 왜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끔찍한 장면들, 꿈에 나올까 무서운 귀신이 출몰하는 괴담을 굳이 보고싶어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무서운 이야기를 찾는가

공포영화는 통제할 수 없는 가상 현실을 통해 현대인의 근원적 욕망과 카타르시스를 표현하는 예술장르다. 인간과 사회의 본성에 대한 가장 원형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포물은 멜로, 코미디와 함께 가장 오래된 장르물로 꼽힌다. 대중은 공포영화 속 가상현실에서 벌어지는 '자극'을 통해 일상탈출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킨다. 특히 오늘날에는 많은 이들이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타듯, 공포체험을 하나의 짜릿한 오락적 쾌감으로서 즐기기도 한다.

또 공포영화는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통하여 그 시대의 사회적 이슈를 담아내기도 한다. 공포영화들은 '사회적 억압'이 이뤄지는 시대와 공간에 대한 저항의 정서를 표방한다. 국가와 민족, 시대별로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대인의 욕망과 복잡한 정체성을 조명하는 데 있어서도 '충격과 공포'라는 테마는 대단히 유용하게 쓰인다.

미국 공포물의 경우, 좀비 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나 <사이코><텍사스 전기톱 살인마>같은 연쇄살인범을 다룬 영화들은, 냉전기와 베트남 전쟁, 고도 자본주의 사회를 두루 거치며 소외된 현대 미국인들의 불안한 심리를 상징하는 기제로 활용됐다. 또 90년대 후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크림>이나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류의 청춘 슬래셔 무비들은 사회에 대한 10대의 반항심리와 섹슈얼리티를 가벼우면서도 도발적으로 그려낸 '팝콘 호러물'로 주목받았다.

국내 대표적인 공포물로 꼽히는 <여고괴담>은  매 시리즈마다 입시 경쟁, 은둔형 외톨이, 집단 따돌림, 동성애 등 한국 10대들의 세계와 학원사회의 음지에서 벌어지는 문화를 정면으로 조명하며 주목받았다. 한편 일본 공포물의 르네상스를 불러온 <링>이나 <착신아리>, 한국의 <폰> 등에서는 전통적인 원혼 이야기에 비디오, TV, 휴대폰 등으로 대변되는 첨단 디지털문화에 대한 현대인의 공포심리를 결합시켜, 세계적으로 '퓨전 호러무비'의 서막을 알리기도 했다.

한국 공포영화, 어디쯤 와있나

 영화 <분홍신> 포스터

영화 <분홍신> 포스터 ⓒ 청년필름

한국 공포영화는 60년대 <월화의 공동묘지>로 대표되는 고전 납량물의 전성시대 이후 한동안 침체기를 맞이했으나 1997년 영화 <여고괴담>의 대성공을 기점으로  중흥기를 맞이했다. 이후 충무로는 매년 여름에만 3~4편 이상의 공포영화를 꾸준히 배출했고, 공포영화는 여름 장르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영화계가 공포영화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포영화는 일단 철저히 틈새시장을 노리는 장르다. 블록버스터처럼 큰 흥행을 하진 않아도 꾸준한 수요가 있으며, 톱스타 섭외나 많은 제작비를 들이지 않고도 완성도높은 장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통상 한국 영화의 평균 순제작비를 30억원(2008년 기준)으로 봤을 때, 공포영화의 제작비는 일반상업영화의 1/2 내지는 1/3 수준 정도로 평가된다. 요즘처럼 장기불황으로 영화에 대한 투자가 잔뜩 위축돼 있는 상황에서 공포 영화만큼 확실한 '저비용 고효율' 장르도 없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공포영화는 대대적인 소재 확장에 도전했으나 시행착오에 부딪혔다. 국내 공포물의 단골소재였던 학원물(여고괴담, 고사:피의 중간고사)에서부터,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체험하는 군대이야기(알포인트, GP506), 미에 대한 여성의 욕망(분홍신, 신데렐라), 사이코패스(검은집)와 병원 공포물(기담, 리턴)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등장했다. 2007년은 한국 공포영화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오랜만에 등장한 사극 호러 <전설의 고향>을 비롯하여 <검은 집><해부학 교실><기담><므이><리턴><두 사람이다> 등이 대거 선을 보였지만 흥행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여기서 한국 공포영화는 전통적인 '원혼의 복수' 내지는 할리우드 슬래셔물을 흉내낸 '무차별 살인극'같은 가상의 공포에서 벗어나, 점차 일상의 무대와 역사적 배경으로까지 시공간을 확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소재확장과 장르적 완성도에 대한 나름의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2007년 개봉한 공포영화들이 대중과의 소통에 실패하며, 이듬해에는 공포장르의 기획 자체가 대폭 감소하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2008년 전국 180만 명을 돌파한 <고사: 피의 중간고사>의 '깜짝 성공'은 역설적으로 경쟁작 감소로 인한 수혜를 누리며, 국내에 여전히 공포영화에 대한 꾸준한 수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경우다. 전형적인 여름 기획영화였던 <고사>의 성공은  완성도에 대한 혹평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기획력과 마케팅의 승리'로 꼽힌다. 

마침 경쟁작이 없었던 희소성, 공포영화 주관객층인 10~20대를 노린 기획영화라는 컨셉이 적중하며 수혜를 톡톡히 누렸다. 또 그해 가장 먼저 개봉한 공포영화는 반드시 흥행한다는 영화계 속설은, 그 이후 개봉한 <외톨이>와 <사요일>의 흥행 참패를 통해 증명됐다. <고사>의 성공사례는 한여름에 주로 집중 개봉되던 최근 국내 공포영화들의 개봉시기를 대폭 앞당기는데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2009 공포 3대 키워드 '여성, 학원, 충격효과'

 영화 <전설의 고향>의 한 장면.

영화 <전설의 고향>의 한 장면. ⓒ 윈텍필름


<고사>의 성공 이후, 이에 고무된 충무로에 올해 다시 공포영화 제작붐이 불었다. <여고괴담5-동반자살>을 시작으로 <요가학원><4교시 추리 영역><비명> 등으로 이어지는 올해 한국 공포영화의 경향은 '과거로의 회귀'로 정의내릴 수 있다.

지난 2년간의 시행착오에서 영향을 받은 듯, 올해 공포영화는 새로운 소재와 형식의 개발보다는 익숙한 공식에 초점을 맞췄다. 2007년에 절정을 이뤘던 한국 공포물의 장르적 변주가 기대에 못미치는 흥행 결과를 낳으면서, 무리한 실험보다는 익숙한 형식과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전통적인 공포물이 다시 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학원문화와 사춘기 여고생들의 세계를 꾸준히 조명해온 <여고괴담>은 이번엔 '동반자살'을 새로운 소재로 선택했다. 죽을 때도 함께 함께 하자는 피의 우정을 맹세한 친구들 중 한 명이 먼저 자살한 후 남겨진 친구들에게 찾아오는 의문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

영화 <요가학원>은 현대사회의 외모지상주의와 미에 대한 강박이 빚어내는 파국을 다룬다. 알파걸 증후군, 거울 중독증, 다이어트 등 나름의 콤플렉스를 지닌 여성 캐릭터들이 아름다움을 소유하고자 요가학원에 모이면서 벌어지는 질투와 갈등의 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영화 <주온>의 한 장면.

영화 <주온>의 한 장면. ⓒ 쇼박스(주)미디어 플렉스

<4교시 추리영역>은 살인사건에 휘말린 남녀 고등학생이 4교시가 끝나기 전까지 범인을 찾아나가는 학원 탐정물로 이번 여름 개봉작 중 유일하게 미스터리 스릴러 요소를 덧입힌 공포물이다. 신들린 소녀를 둘러싼 욕망을 다룬 미스터리 공포물 <비명>은 신들린 소녀를 통해 무속신앙과 사이비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소재적인 면에서 올시즌 공포물의 키워드는 크게 '여성, '학원', 그리고 '충격효과'로 꼽을수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학원이나 학교이고, 10~20대 여성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룬다. 학원물은 다소 해묵은 소재지만, 가장 친숙하면서도 안전한 테마이기도 하다. 특히 공포영화의 주 수요층인 10대~20대 학생과 여성 관객층을 공략하는데 있어서, 학원이야기만큼 폭넓은 공감대와 흥미를 자극하는 소재도 찾기 힘들다.

공포물의 흥행은 여성들의 '비명 데시벨'에 좌우된다는 농담이 있을만큼, 공포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의 역할 구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성들 사이의 질투, 오해, 경쟁심같은 미묘한 감정싸움이 갈등의 축을 이루며, 여기서 단순해진 스토리 대신, 충격적인 원혼의 등장같은 독창적이고도 잔인한 '비주얼의 강화'는 올해 공포영화의 경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복잡하게 꼬인 이야기보다는,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공포영화 본연의 '충격효과'에 주력하는 느낌이다. 한국 공포영화는 2000년대 이후 스릴러 장르와 본격적으로 결합하면서, 관객의 두뇌싸움을 유도하는 추리극이나 결말에서의 충격적 반전이 한동안 필수공식처럼 자리 잡았다. 하지만 최근 영화들이 지나치게 난해한 스토리라인과 복잡한 구성으로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는데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최근에는 단순하고 알기 쉬우면서도 확실한 메시지를 표방하는 작품들이 다시 늘어나고 있는 것.

톱스타보다 신인이나 아역 배우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도 올해 공포영화의 복고적 경향을 대변한다. 신인 스타의 산실 <여고괴담> 시리즈는, 5편에서도 오연서, 장경아, 손은서, 송민정, 유신애 등 새얼굴을 대거 기용했다. '아역스타' 유승호는 <4교시 추리영역>을 통해 호러물에 첫 도전하며, TV 트렌디 드라마의 단골 히로인 유진(요가학원)과 남상미(비명)도 출사표를 던졌다. 새로운 스타들의 탄생과 함께, 인지도 있는 배우들이 공포물에서 얼마나 기존 이미지를 깨는 새로운 캐릭터를 보여줄 지도 관심사다.

'싼값'에 만들어 '장사'하면, 공포영화 미래는 없다

 영화 <해부학교실> 포스터.

영화 <해부학교실> 포스터. ⓒ (주)청어람

한편으로 이같은 올해 개봉한 한국 공포영화의 복고 경향은 자칫 '퇴행'과 동의어로 해석될 소지도 많다. 지난 몇 년간 공포영화는 기본 수요층이 확실하고, 낮은 제작비로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계산에 따라 장르적 완성도보다는 흥행공식을 답습하는 공산품같은 영화들이 범람한 면이 없지 않았다.

특히 올해 개봉작들이 노골적인 복고경향을 표방하면서, '사다코(링)의 후예들'을 연상시키는 닮은꼴 여자 원혼들의 범람이나, 개연성 없는 잔인한 장면을 남발하는 것은 영화의 완성도 측면에서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공포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노하우를 지닌 연출가와 작가의 부재, 지나치게 당장의 수익성으로만 접근하려는 근시안적인 마인드는 한국 공포물만의 독창성이나 장르적 완성도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중요한 것은 흥행공식의 답습만이 아니라 관객이 원하는 공포영화 본연의 매력을 잃지 않으면서 다양한 형식 실험과 사회적 공감대를 아우를 수 있는 주제의식의 발굴에 달려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공포영화를 지탱하는 것은 한(恨)의 정서다. 일본이나 서양처럼 잔혹한 복수극의 광기나 공포감 자체보다는 '죽은 자의 사연'에 귀를 기울여 원혼이 왜 복수극을 펼칠 수밖에 없는지 인과관계를 밝히고 한을 풀어주는데 주력한다. 여기서 인간에게 원혼은 단순히 배척해야만 하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서로 사는 세계만 다른 존재일 뿐이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소통'을 강조하며, 죽은 자의 한을 풀어주고 사연을 교감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전통적인 한국공포물의 특징이다.

최근 공포영화들이 무분별하게 일본이나 서구 스타일의 호러물을 차용하면서, 이야기의 '개연성'이나 한국적인 정서가 희박해지고 있다는 것은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공포영화를 '싼값에 만들어서 장사할 수 있는' 공산품 정도로 취급해서는 장르의 미래가 없다. 탄탄한 각본과 정서적 흡인력, 주제와 표현방식의 조화를 통해 장르적 완성도를 높이는 것에 한국 공포영화의 미래가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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