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타이거즈 투수 곽정철

KIA 타이거즈 투수 곽정철 ⓒ 유성호


지난 4월 26일 삼성과의 경기가 끝난 후였다. 샤워를 하고 있던 KIA 타이거즈 투수 곽정철(23)의 어깨를 동갑내기 투수 윤석민이 툭툭 건드렸다. 윤석민은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다.

"내가 '마무리 투수'를 하기로 했어. 너 아니었으면 안 했을 텐데…. 내가 마무리를 맡으면 네가 선발로 갈 거 같으니까. 우리 한번 잘해보자."

시즌 초반부터 '6인 로테이션'으로 운영됐던 KIA의 선발진은 6일 전인 4월 20일 '5인 로테이션'으로 재정비 된 터였다. 그 전까지 선발진에 이름을 올렸던 곽정철은 불펜으로 내려간 상태였다. 이날 곽정철은 선발 구톰슨에 이어 8회에 마운드에 올라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경기를 끝냈다. 그렇게 불펜 생활에 적응해가던 무렵이었다.

"솔직히 석민이는 우리 팀 에이스잖아요. 자기가 (마무리) 못하겠다고 했으면 그대로 선발투수 했을 건데 힘든 마무리를 맡는다고 하더라고요. 친구로서 그렇게 이야기해주니까 정말 고마웠어요."

간간히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곽정철은 "지금까지 올린 승수가 4승인데 이게 다 석민이 덕분"이라고 친구를 치켜올렸다.

윤석민이 마무리로 보직을 바꾼 후 다시 선발진에 합류한 곽정철은 5월 7일 히어로즈전에서 5이닝 2실점으로 시즌 2승째를 올렸고 19일 LG전에서는 5이닝 무실점으로 3승째를 거뒀다. 윤석민이 선발로 돌아온 후에도 부상으로  빠진 서재응의 자리를 채우면서 6월 5일 삼성전에서 7이닝 무실점으로 4승째를 거뒀다.

"그동안 선발로 나가서 승리투수가 될 때마다 경기 끝나고 인터뷰하게 되면 석민이한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근데 경기 MVP로 매번 다른 선수가 뽑히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죠. 그냥 평상시에 만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장난인줄 알고 잘 안 믿어요. 기사에 나면 석민이가 제 진심을 알아줄까요?"

2005년 입단 동기생 윤석민·이범석, 그리고 곽정철

 기아 투수 곽정철이 18일 저녁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9 프로야구 두산과의 경기에서 팀동료들과 함께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KIA 투수 곽정철이 18일 저녁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9 프로야구 두산과의 경기에서 입단 동기 윤석민(맨 왼쪽)과 나란히 앉아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 유성호


2005년 KIA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한 곽정철은 같은 해 2차 1번으로 지명받고 함께 입단한 윤석민과 함께 KIA의 미래를 책임질 투수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곽정철은 2005년 팔꿈치 수술에 이어 무릎 수술을 두 차례나 받으면서 재활군과 2군을 오가면서 사실상 1군에서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 반면 윤석민은 KIA는 물론 국가대표팀에서도 에이스로 성장했다. 그리고 한 살이 많지만 함께 입단한 이범석도 부상에서 벗어나 지난해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곽정철은 답답했다.

"투수에게 가장 힘든 게 뭔지 아세요? 남들 던지는데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거예요. 또 무릎 수술하고 나서는 남들 달리기 훈련할 때 나도 한번 저렇게 뛰어봤으면 원이 없겠는 거예요. 힘들 때마다 석민이와 범석이 형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죠. 내가 그래도 1차 지명 받고 들어왔는데 포기한다면 비겁한 사람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나도 저만큼 할 수 있다, 그런 자신감도 가지려 했어요."

마음은 굳게 먹었지만 매일 자신과의 싸움을 반복해야하는 재활의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다. 재활 프로그램이야 코치와 트레이너가 짜준다고 해도 그것을 얼마나 끈기 있게 반복하느냐는 오로지 선수의 의지에 달린 일이다. 나태를 물리쳐야 했고 술 한잔의 유혹도 견뎌내야 했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곽정철은 바다로 차를 몰았다.

"정말 힘들 때는 술 생각도 간절했어요. 근데 술 먹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무릎 연골이 또 찢어질 텐데, 그런 생각이 들면 못 마시죠. 또 재활하면서 힘들다고 술 먹고 염증 재발하고 그러다가 인생 끝나는 사람 많이 봤어요. 저는 혼자 드라이브하면서 바다를 많이 보러 갔어요. 바람도 쐬고 앉아서 생각도 하고.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 얼굴 보면 '이렇게 약한 마음 먹어서는 안되겠다, 힘들게 야구 선수로 키워주셨는데 꼭 보답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운동장으로 나가곤 했죠."

마음을 다잡은 후로는 두려움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수술을 경험한 선수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곽정철도 수술한 부위의 통증이 재발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어깨와 팔꿈치도 아플까봐 공을 세게 던지지 못 했고 무릎 수술하고는 다시 아플까봐 무서워서 땅에 발을 못 디뎠어요. 와인드업 자세에서 왼발을 내려놓는 연습만 한 달을 했어요."

2008년 첫 승... "살아남기 위해 던지고 또 던졌다"

 기아 투수 곽정철이 18일 저녁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9 프로야구 두산과의 경기 도중 불펜에서 몸을 풀며 투구연습을 하고 있다.

KIA 투수 곽정철이 18일 저녁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9 프로야구 두산과의 경기 도중 불펜에서 몸을 풀며 투구연습을 하고 있다. ⓒ 유성호

두려움을 이긴 것은 반복훈련이었다. 그리고 두려움을 떨쳐내자 그의 공은 점차 예전의 위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2008년 1군 마운드에 간간히 얼굴을 비치던 그는 9월 17일 히어로즈전에서 간절히 바라던 프로 첫승을 거뒀다. 그는 미니홈피에 "내 생애 너무나 행복했던 순간, 눈물이 날 정도로"라고 적었다.

하지만 곽정철은 기쁨을 잠시 유보하기로 했다. 내년 시즌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무리 훈련부터 시작해서 해외전지 훈련까지 그는 하루에 250개 이상 전력으로 던지고 또 던졌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KIA에는 좋은 투수가 많잖아요.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직구도 정말 빨라야 하고 변화구도 제구가 잘 되어야 해요. 그래서 체인지업도 배운 거고. 정말 살기 위해서 발바닥 안쪽이 찢어져도, 손에 물집이 잡혀도 그렇게 던졌던 거 같아요. 제 마무리 훈련부터 따져보면 올 시즌 전 던진 투구 수가 3000개 이상은 될걸요."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올 시즌 곽정철은 쟁쟁한 선후배들을 제치고 바라던 대로 살아남았다. 그것도 선발투수로. 그리고 그는 지난 4월 16일 롯데전에서 시즌 첫 승을 거둔 뒤 생애 첫 승을 거뒀을 때와 마찬가지로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했다.

"눈물이라는 게 참…, 작년에는 재활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었어요. 올해는 강철민 선배, 범석이 형 등 여러 선발 후보들과의 경쟁에서 내가 이겨서 선발진에 들었다는 사실, 그리고 시즌 첫 승을 했다는 게 너무 뿌듯해서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현재 곽정철은 서재응이 부상에서 돌아오면서 다시 중간투수진으로 왔다. 팀은 그에게 선발이 무너졌을 때 긴 이닝을 책임질 수 있는 스윙맨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그의 선발진 제외는 지난 12일 한화와의 경기에서 초반에 많은 득점을 지원받고도 스스로 무너져 내린 탓도 있다. 

"컨디션은 좋았는데 한화와는 악연인가 봐요. 5월에도 한화전에서 그랬거든요. 그래서 똑같은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했는데. 욕심이 앞서다 보니 쫓기게 되고 순간 내 밸런스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경기 끝나고 많이 힘들었는데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려고요. 이 두 경기에서 승리를 거뒀으면 6승인데…, 실패를 통해 문제점 보완해서 더 좋은 투수가 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죠." (필자 주 : 5월 13일 한화전에 선발 등판한 곽정철은 타자들이 5회까지 9점을 뽑아줬지만 4⅓이닝동안 '7실점-3자책'하면서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또 한달 후인 12일에도 3회까지 타자들이 10점을 먼저 뽑아줬지만 5회 볼넷을 남발하면서 강판되고 말았다.)

"나는 사실상 신인, 1군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

 기아 투수 곽정철이 18일 저녁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9 프로야구 두산과의 경기에서 7회초 1사 3루 상황에 최희섭의 우전안타로 역전을 시키자 더그아웃에서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KIA 투수 곽정철이 18일 저녁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9 프로야구 두산과의 경기에서 7회초 1사 3루 상황에 소속팀 최희섭이 우전안타로 역전을 시키자 더그아웃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 유성호


의기소침할 만도 한데 곽정철은 씩씩했다. 그리고 "사실상 신인이나 다름없는 내가 1군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다. 선수들이 으레 하는 빈말이 아니었다. 곽정철의 얼굴에는 아프지 않고 마운드에 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달은 사람의 의연함이 묻어났다.

"솔직히 붙박이 선발 투수로 대접받을 만큼 내 실력이 좋은 게 아니에요. 선발이든 스윙맨이든 패전 마무리든 열심히 하면서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올해 목표도 처음에는 10승해야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욕심을 버렸어요. 그저 소중함을 느끼면서 마운드에 올라가고 간절함으로 승부하려고요."

곽정철의 꿈은 머지 않은 미래에 윤석민과 함께 KIA 마운드를 이끄는 선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덤으로 '곽정철에게는 무시무시한 직구가 있다'는 소리도 들어보고 싶다.

"지금은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요. 석민이한테 많이 배우고 있죠. 체인지업은 조금만 더 던져보면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열심히 해서 석민이와 '원 투 펀치'를 이루고 우승 한번 해야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 있으니까 지켜봐 주세요."

단답형 인터뷰는 잊어주세요... "인터뷰 연습 많이 했습니다"

 KIA 타이거즈 투수 곽정철

KIA 타이거즈 투수 곽정철 ⓒ 유성호

인터뷰 내내 곽정철의 대답은 막힘 없이 술술 흘러나왔다. 과묵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말을 참 잘했다. 특히 올해 첫 승을 거둔 후 텔레비전 중계팀과의 인터뷰에서 단답형 답만 내놓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 그 인터뷰요? 저도 인터뷰하고 나서 후회 많이 했어요. 이건 아니다 싶었죠. 질문한 사람이 얼마나 무안했겠어요. 야구도 경험이 있어야 하지만 인터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 후로 인터뷰 연습 많이 했어요. 승리 투수가 되면 꺼내놓을 이야기도 준비하고 말하는 연습도 했죠. 근데 그 뒤로 인터뷰할 기회가 없네요. 하하"

18일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곽정철은 실력과는 또 다른 면에서 진짜 '프로' 야구선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곽정철 윤석민 기아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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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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