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포스터

<박쥐> 포스터 ⓒ 모호필름


<박쥐>가 베일을 벗었다. 이름값 그대로다. 박찬욱은 여전히 박찬욱이었다. 지난 24일 용산 CGV에서 열린 언론 시사회엔 근래 들어 가장 많은 수의 기자들과 영화관계자들이 몰려들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이후 3년, 박찬욱의 이름값에 대한 영화계 안팎의 지대한 관심을 입증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뚜껑을 연 지난 주말, 인터넷 포털은 송강호와 김옥빈의 노출 기사로 도배가 됐고, 댓글 또한 마찬가지였다. 선정성이나 스타에 집중하는 인터넷의 과민함이야 재론할 게 없다지만, <박쥐>에 대해 쏠린 관심은 분명 과도하게 편향됐다.

반면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 "이 작품이 그의 최고작이라고 단번에 확언할 순 없다. 하지만 <박쥐>는 명백히 걸작이다. 아찔하다"는 이동진 기자의 평부터 "영감을 바랐다면 흡족할 것이고 장르적인 쾌감을 바랐다면 후회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발전과 확장이고, 또 다른 의미에선 배반과 고착의 영화다"는 허지웅 기자의 평까지 그야말로 취양대로 각양각색이다.

박찬욱 감독은 "너무 잔인하거나 피가 많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이다"라며 조심스런 속내를 내비쳤다. 하지만 평가가 엇갈리는 건 비단 폭력이나 표현의 수위 탓이 아니다. 노출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박쥐>는 뜨거운 감정을 마구 분출했던 <올드보이>보다는 침착하면서 냉소적인 유머로 점철되어 있던 <복수는 나의 것> 쪽에 더 가깝다. 관객들이 뱀파이어가 된 사제 상현(송강호 분)의 행동에 감정이입을 할 여지가 극히 적다는 뜻이다.

개봉을 앞둔 영화를 두고 섣불리 재단하는 것은 아직 일러 보인다. 그러나 문맥을 잘라놓은 따옴표 기사 몇 개로 박찬욱의 최신작에 편견을 갖는 것 또한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화제의 중심에 선 <박쥐>에 관한 몇 가지 궁금증을 박찬욱 감독과 배우들의 이야기를 단서로 풀어나가 보자.

노출, 이 정도 수위라면 괜찮아!

 <박쥐>의 뱀파이어 사제 상현

<박쥐>의 뱀파이어 사제 상현 ⓒ 모호필름


"10년 전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땐 이 부분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촬영하기 1년 전, 작품을 준비하면서부터 핵심적인 장면이 될 것이란 걸 알았고 감독님과 함께 고민을 많이 했다. 꼭 필요했고 우리가 원했던 강렬하면서도 정확한 장면이라 전혀 이견이 없었다." - 송강호

기자간담회에서 송강호가 밝힌 노출에 관한 뒷얘기다.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닌 치밀한 계산에 의한 장면이란 점에서 놀라움을 더한다. 필요한 장면이었고 더욱이 그 노출이 뭔가 강력한 상징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뜻이다.

먼저 송강호가 연기한 상현이 어떤 경로로 노출을 하게 되는가가 중요하다. 요약한 이야기는 이렇다. 신부 상현은 아프리카에서 진행된 백신개발 실험에 참여했다 500명 중 처음으로 살아남았다. 그 뒤 상현은 수혈 받은 피로 인해 뱀파이어가 되고, 그 사실을 모르는 환자들은 그를 신봉한다.

그 와중에 상현은 어릴 적 친구인 강우 가족을 만나게 된다. 심약한 남편 강우(신하균 분)와 못된 시어머니 사이에서 핍박받던 태주(김옥빈 분)와 피를 갈구하던 상현은 눈이 맞고 결국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게 된다.

하지만 태주의 꼬임에 넘어가 상현은 강우를 죽이게 된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상현과 태주 앞에 강우(귀신)가 출몰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처절하게 싸우던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파격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박쥐>의 팜므파탈 태주

<박쥐>의 팜므파탈 태주 ⓒ 모호필름


"관객의 한 사람으로 이 영화를 봤을 때, 그 장면의 연기가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화면 위치, 사이즈, 구도 모두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뭔가 보여주는 것 보다 감추지 않았다는 기분이 든다. 그 뉘앙스의 차이는 영화를 봤다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 송강호

짧지만 강렬한 노출 장면은 상현의 속죄의식과 결부되어 있다. 자의든 타의든 살인이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상현은 자신을 신봉하던 병자들을 찾는다. 그의 벌거벗은 아랫도리가 그대로 비춰질 때, 상현은 그릇된 욕망을 스스로 질타하고, 그런 자신을 추앙하는 환자들에게 경고를 보낸다.

"구원을, 속죄를 위해 가장 치욕적이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뒤 잘못된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상현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줬다. 그건 종교인인 상현의 순교적인 행위다. 찍을 때도 그렇고 굉장히 숭고한 느낌이 들었다." - 송강호

송강호의 설명처럼 <박쥐>는 '복수 3부작'의 마지막 영화인 <친절한 금자씨>를 지배했던 속죄와 구원의 테마를 또 다시 꺼내든다. 뱀파이어가 된 건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지만 육욕을 필두로 욕망에 탐닉한 것, 그리고 사람들이 연이어 죽어나가게 된 것 모두 상현의 선택에서 비롯됐다. 상현은 사제로서의 소임을 훌훌 벗어던지는 듯보였지만 종국엔 자신의 죄 값에 대한 책임에서까지는 자유롭지 못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극점에 선 치정멜로

"사랑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동경하는 감정이 아닌가 싶다. 사제인 상현의 욕망 중 가장 멀고 가질 수 없었던 감정도 바로 사랑이다. 불륜은 그걸 더 부각시키고, 사랑에 입체감을 주기 위한 구조일 뿐이다." - 박찬욱 감독

박찬욱 감독은 영화의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오래 전부터 품고 있다고 밝혔다. 욕망과 치정, 살인과 죄의식이 넘실거리는 이 소설의 기본 얼개에 종교와 뱀파이어란 박찬욱의 관심사가 더해진 셈이다.

 <박쥐>의 박찬욱 감독

<박쥐>의 박찬욱 감독 ⓒ 모호필름

먼저 종교. 병원에 근무하는 상현은 시작부터 환자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에 절망한다. 그가 'eve'란 이름(에덴동산의 선악과를 연상시키는)의 바이러스 퇴치를 위한 백신 개발 프로젝트에 몸을 던지는 것도 바로 그러한 헌신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다. 하지만 그가 피를 마셔야만 살 수 있는 뱀파이어로 변했을 때, 사정은 180도 달라진다.

박찬욱 감독은 불륜의 모티브에 사제라는 설정을 더함으로서 욕망과 죄의식의 딜레마를 가열차게 밀어붙인다. 더욱이 살인을 해야만 살 수 있는 뱀파이어의 속성 또한 극 속에서 살인을 좀 더 편하게(?) 자행할 수 있는 구실로 기능한다. 공공연하게 B급 정서를 찬양해왔던 박찬욱 감독은 뱀파이어란 설정을 통해 뼈가 뒤틀리고, 피가 튀기는 살인과 흡혈 장면을 강렬하게 시각화했다.

그럼에도 방점은 '사랑'에 찍힌다. 파격적인 시각적 스타일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엄연히 <박쥐>는 태주와의 사랑으로 인해 파멸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영화의 영문 제목인 'Thirst(갈증)'는 사랑과 욕망에 목마른 상현의 처지를 대변하는 탁월한 제목이다.

상현과 태주의 키스와 정사 장면의 극사실적인 묘사는 동정인 상현의 육욕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다. 그런데도 그런 상현의 사랑과 속죄의 감정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건 박찬욱 감독 특유의 냉소와 유머 때문이다.

그럼에도 <박쥐>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이유

"10년 전엔 과장된 유머가 없는 영화를 만들 생각이었다. 어둡고 폭력적인 영화를 연상했지만 천성이 장난이 제어가 안 되는 성격이라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 장난기가 발동했다. 심각하고 진지하고 폭력적인 순간일수록 예상 못한 유머를 넣는 것이 좋다. 억지스럽지 않다면 그게 인생이 아닌가,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 박찬욱 감독

<박쥐>는 '복수 3부작'을 능가하는, 냉소 가득한 유머로 점철되어 있다. 오대수의 내레이션으로 승화됐던 <올드보이>의 위트 수준이 아니다. <복수는 나의 것>의 한 장면, 유괴되어 익사 당했던 딸이 "아빠, 왜 나한테 수영을 가르쳐주지 않았느냐"고 꿈에 나타나 아빠를 타박하는 장면만큼이나 차갑고 냉소적인 유머가 넘쳐난다.

 <박쥐>의 김옥빈, 송강호

<박쥐>의 김옥빈, 송강호 ⓒ 모호필름

15년간 감금되어있던 오대수의 복수 심리에 철저하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던 <올드보이>의 정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장르 팬들이 아니라면 익숙하지 않은 '뱀파이어 월드'의 속성을 진지한 듯 낄낄대며 관조하는 박찬욱 감독의 시각에 관객들이 온전히 반응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박쥐>는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테레즈 라캥>에서 따온 이야기와 뱀파이어의 설정과 표현들이 가끔 덜컹거리며 매끄럽지 못한 이음새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분명 130여 분의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질 만큼 강렬함의 연속으로 채워져 있다.

정정훈 촬영 감독 이하 충무로의 1급 스태프들이 뭉친 기술력 또한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다. 대한민국 대표배우 송강호는 쉽지 않은 캐릭터를 무난히 소화해냈고, 무엇보다 중후반 이후 광기와 혼돈을 오가는 김옥빈의 연기는 <박쥐>의 발견이다.

<박쥐>는 박찬욱 감독이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하지만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엇비슷하게 반복되는 테마와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결과,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자명해 보인다. 그건 더욱이 영화적인 소양과도 무관한 취향의 문제다.

상업성과 작품성 모두에서 평가를 받았던 박찬욱 감독. 칸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박쥐>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는 향후 박찬욱 감독과 대중들의 거리를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작용할 것이다.

박쥐 박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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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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