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는 불황이다. 고환율과 실업난 얘기가 아니다. 예상치 못한 <과속 스캔들>과 <워낭소리>가 숨통을 틔워주긴 했지만,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한국영화 말씀이다. 이제 준비된 4번 타자가 등장할 순서다. 오매불망 기다려왔던 세 감독이 한 달에 한 편씩 신작을 선보인다.

잊고 있었다면 섭섭할 세 감독, 박찬욱과 홍상수, 봉준호가 바로 그 주인공 되겠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4월 30일,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5월 14일을 개봉일로 확정했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5월 말에서 6월 초로 개봉 일을 저울질 하고 있다.

박찬욱은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 <괴물>로 각기 15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바 있다. 두 감독의 신작은 공히 한국영화의 불황을 타개할 구원투수로 기정사실화된 분위기다.

상업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저예산 HD영화를 천명한 홍상수의 신작을 끼워 넣는 것은 균형추가 기울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을 제외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칸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세 감독의 작품을 비단 관객 수로 재단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이 글은 우리 시대의 가장 활력 넘치는 세 작가의 신작을 고대하는 연애편지와도 같은 글이다.

 <박쥐> 제작보고회의 세 주인공 송강호, 김옥빈, 박찬욱감독

<박쥐> 제작보고회의 세 주인공 송강호, 김옥빈, 박찬욱감독 ⓒ CJ엔터테인먼트


할리우드도 인정한 찬욱씨의 뱀파이어 이야기 <박쥐>

'A PARK CHANWOOK FILM' 이란 자막과 함께 무지 화면 아래로 피를 빠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쁘긴. 그냥 저녁 먹던 중이었어. 자긴 먹었어? 난 조금 남겼어." 창백한 얼굴로 입가에 피를 묻힌 채 애인으로 추정되는 이의 전화를 받는 이 흡혈귀, 피아노를 연주하다 결국 헛구역질을 토해낸다. "속이 너무 안 좋아. 유통기한 지났나봐."

<쓰리 몬스터>의 포문을 열었던 3분여에 걸친 롱 테이크를 기억하는가? 중편 <CUT>의 이 강렬한 오프닝은 <박쥐>를 고대하는 첫 번째 단서다. 그러나 <박쥐>는 <CUT> 이전 10여 년 동안 숙성된 프로젝트다. 지난 3월31일 열린 <박쥐> 제작발표회에서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을 찍을 당시 송강호에게 대략의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밝힌 바 있다.

 <쓰리, 몬스터>의 뱀파이어 염정아

<쓰리, 몬스터>의 뱀파이어 염정아 ⓒ 영화사봄


두 번째 단서는 에밀 졸라가 1867년에 쓴 자연주의 계열의 소설 <테레즈 라캥>이다. 대략의 이야기만 봐도 박찬욱의 복수 연작들이 연상된다. 테레즈는 쇠약한 남편 카미유의 친구 로랑과 눈이 맞는다. 결국 로랑과 함께 남편을 살해한 테레즈는 극심한 환영과 고통에 시달리다 로랑과 동반 자살한다. 죽음과 욕망, 죄의식과 구원이란 박찬욱의 테마들이 넘실거린다.

세 번째 단서는 사제다. 박찬욱 감독은 구약의 복수와 신약의 구원을 모티브로 가져와 기독교적 원죄의식을 다뤄왔다. 그가 윤리적 딜레마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사제를 주인공으로 삼았으니 기대를 모을 수밖에 없다. 박찬욱 감독은 "신부를 소재로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에 뱀파이어를 구상하게 됐고, 그 후에 에밀 졸라의 소설을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박쥐>가 나오게 됐다"라고 설명한다.

"작품들 중 내 자신이 투영된 경우는 처음이다. 신부 상현의 나약하고 비겁하고, 궤변에 가까운 논리를 가지고 자기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점들이 나와 아주 닮았다. 제일 애착이 가는 영화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한 한 명의 관객의 입장으로 봤을 때도, 나의 취향에 가장 맞는 영화기도 하다."

뱀파이어가 목덜미를 무는 그 찰나의 순간은 금기된 섹스와 욕망을 은유한다. "뱀파이어는 불사가 아니에요, 그래도 내 피를 원하십니까"라는 수현의 대사처럼 뱀파이어는 생과 사, 그리고 육욕에 대한 명징한 아이콘이다. "여자를 잘못 만나 아주 곤경에 빠진 남자의 분투"를 겪는 사제 수현의 극한의 윤리적 딜레마는 분명 관객들에게 엄청난 강도의 심리적 고통을 전달할 것이 분명하다.

 <박쥐>의 송강호

<박쥐>의 송강호 ⓒ CJ엔터테인먼트


<박쥐>는 일찌감치 할리우드의 포커스피처스가 투자, 제작을 결정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분명 <올드보이> 박찬욱의 이름값이 한 몫을 했을 터다. "동서양의 문화 충돌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박쥐>에는 여러 가지 이슈가 담겨져 있다"라고 설명하는 박찬욱 감독. 그의 영화는 죄의식과 복수, 구원이라는 화두를 독창적으로 시각화해냄으로서 서구인들의 공감까지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뱀파이어가 되면서 인간적인 욕망에 눈 뜬 사제 수현은 보편성이 한층 강화된 캐릭터라 볼 수 있다. 어쨌든 우리는 박찬욱 감독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작품을 모국어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박쥐>가 유니버셜의 배급망을 타고 전세계로 훨훨 날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상수의 가장 재미있는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감독 구경남(김태우 분)은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초청돼 제천을 찾는다. 구경남은 영화제 프로그래머 공현희(엄지원 분)와 친구 부상용(공형진 분)과 그의 아내 유신(정유미 분)을 만나고, 여지없이 거나한 술자리가 벌어진다. 그리고 특강을 하게 된 제주에서 만난 선배 화백 양천수(문창길 분)와 그의 아내 고순임(고현정 분)과 묘한 관계를 맺게 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김태우, 고현정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김태우, 고현정 ⓒ (주)영화제작 진인사


언제나 지리멸렬한 지식인이 이성과 벌이는 해프닝 속에서 삶의 우연성과 일상성을 탐구했던 홍상수 감독. 그가 이번에 불러 낸 이 '구경'하는 '남'자가 이번엔 "괴물이 되지 말자"고 각오할까, "생각을 해야 한다"고 다짐할까, 그도 아니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투덜댈까.

<밤과 낮>에 이은 홍상수 감독의 9번째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베일을 벗는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그의 전작 <밤과 낮>을 그의 가장 사실주의적인 영화로 꼽으면서 "성남의 불안과 두려움의 여정이 막 끝났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라 잠시 돌아온 것뿐이다. 실은 돌아온 것도 아니다. 그는 아직 떠돌고 있다. 여행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정확하다. 이번 여정은 제천과 제주다. 홍상수의 남자인 '구경남'은 여전히 영화감독이고, 영화제와 특강 장소인 비일상의 공간을 배회하며, 술 마시고,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한국사회에서 얻었던 모든 불합리함과 통념의 억압이나 개인적인 욕망을 실현 못한 아픔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제가 선택한 형식과 저라는 재료를 통과해서 나오는 것이고요. 창작자들이 다 비슷하겠지만 자기가 잘 알고 영화적으로 잘 사용할 수 있는 인물형 몇 개가 있고, 그걸 평생 사용하는 것 같아요. 그 작가가 변화되면 인물의 행동이 변하기도 하고, 가끔 새로운 인물이 나오기도 하는 거죠."

지루한 변명일 뿐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홍상수에 대한 비판의 지점들은 매번 비슷한 등장인물에 비슷한 얘기를 동어반복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홍상수는 때로는 모방을, 때로는 공간을, 때로는 죽음을, 때로는 욕망이란 화두를 자유자재로 변주해 왔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일견 비슷한 듯 보이지면 서로 경쟁하며 촘촘하고 거대한 하나의 구조를 형성해 왔다. 일기체를 도입하고, 한국의 정반대편 공간에서 일상을 부여잡고 놓지 못했던 화가를 등장시켰던 <밤과 낮> 또한 홍상수의 변화 지점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밤과 낮>의 한 장면

<밤과 낮>의 한 장면 ⓒ 영화사봄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일단 공개된 내용만 본다면 춘천과 경주를 경유했던 <생활의 발견>과 가장 닮아있다. 제천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은 뒤 두 번째 공간인 제주에서 제천을 연상시키는 또 다른 인물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는 형식이 그러하다.

공간이 남자들의 심리에 미묘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점에서 이번에도 공간은 중요한 형식으로 작용할 듯 보인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후반부 부천이란 공간에서 두 남자와 한 여자의 파국을 지켜봤고, <밤과 낮>은 한국의 반대편인 파리에서조차 서울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았다는 점을 상기시켜 보자.

한편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저예산 영화를 표방했다. '구경남' 김태우과 고현정을 위시한 여러 스타들이 노개런티로 출연한 결과다. 이건 홍상수라는 예술가가 더 이상 상업영화 진영에서 영화를 만들기 힘든 형국이라는 슬픈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영화 중 가장 '재미'있다고 소문난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개봉일은 5월 14일 이다.

'봉테일'이 창조해 낸 아드레날린 가득한 모성애 <마더>

아직 <마더>는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다. 고작 포스터와 티저 예고편이 공개됐고, 개봉일 또한 6월 초 전후로 저울질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출발점은 역시나 감독 봉준호다.

"김혜자 선생은 국민엄마로 몇십 년 간 유명하시지만 전 좀 다르게 보였어요. 엄마가 아들을 위해서 어디까지 갈 수 있나, 극한의 지점까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한국에서 '국민엄마'이자 <엄마가 뿔났다>로 다시금 신드롬을 일으켰던 명배우 김혜자. 첫 번째 궁금증은 봉준호 감독이 어떻게 모성의 신화성을 해체하고 재구성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마더>의 티저 포스터

<마더>의 티저 포스터 ⓒ (주)바른손


힌트 하나. 봉준호 감독은 지난해 5월, 시나리오를 탈고하기 전 '필름2.0'과 한 인터뷰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2005)를 보면 잡설이 없다. 그냥 한 길로 걸어가면서 잽 없이 원투 펀치만 계속 날린다. <마더>도 그렇게 접근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최근 공개된 예고편에서 확인된 감정의 파고는 <괴물>과는 비교가 안 된다. 코미디 <플란더스의 개>는 차치하더라도, 간간이 유머와 조소로 앙념을 버무렸던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보다 훨씬 더 센 감정의 영화가 될 거란 짐작이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비슷하게 아들과 모성애로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부패한 1930년대 LA를 침착하게 묘파했던 <체인질링>이나 뜻하지 않은 살인범의 용서로 감내하지 못할 파국으로 치닫는 개인의 감정에 집중했던 <밀양>과는 다를 거란 얘기다.

일단 <마더>는 억울하게 살인자로 몰린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온몸 바쳐 부조리에 맞서는 어머니의 이야기다. 전주와 전라도를 주 촬영지로 지난 가을부터 올해 초까지 80여회 차 정도로 촬영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이즈만 놓고 보면 블록버스터 <괴물>과 <설국열차> 사이에 낀 소품이다. 그러나 작은 사이즈가 <마더>를 더욱 기대케 하는 이유다. 전작들과 달리 장르 법칙이나 특수효과 등에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인물의 감정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란 얘기다.

<살인의 추억>을 떠올려 보자. 봉준호 감독은 후반부 박두만과 서태윤 형사의 용광로와도 같은 감정의 파고를 온전히 관객에게 전이시킨 바 있다. <마더>의 핵심 또한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모성애가 극이 진행되면서 어떻게 변모되는가 하는 점이다.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 서태윤 형사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 서태윤 형사 ⓒ 싸이더스FNH


더불어 봉준호 감독은 항상 한국사회에 굳건히 발을 디딘 인물을 형상화시켜왔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1980년 군사정권을 비웃었고, 블록버스터 <괴물>에서조차 주한미군과 바이러스를 연결시키는 센스를 보여준 바 있다. 평범한 어머니가 지방 소도시에서 아들을 구원하기 위해 벌이는 고군분투는 그 자체로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맞서는 대결이 될 것으로 보인다.

관객의 눈을 가장 즐겁게 혹은 고통스럽게 할 요소는 물론 '국민엄마' 김혜자의 노련한 연기다.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홍경표 촬영감독과의 호흡이다(<살인의 추억> <괴물>은 김형구 촬영감독의 '작품'이다). <시월애> <지구를 지켜라> <태극기 휘날리며> <M>으로 스타일리시한 영상을 구현해냈던 홍경표 촬영감독이 과연 어떤 변화의 지점을 이끌어낼지도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사족 하나. 이 세 편의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에 대한 기대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5월 13일 개막하는 칸 영화제의 경쟁작 리스트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 특히나 <박쥐>는 <올드보이>에 열렬한 구애를 바쳤던 쿠엔틴 타란티노의 <인글로리어스 배스터즈>와 선의의 경쟁을 펼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프랑스에서 환영받았던 홍상수 감독이나 2년 전 <괴물>로 비경쟁부문을 뜨겁게 달궜던 봉준호 감독에 대한 기대도 저버리기엔 아직 이르다.

박쥐 마더 박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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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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