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5월26일 저녁,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축구대표팀 평가전에서 공을 몰고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는 이천수 선수의 모습.

지난 2006년 5월26일 저녁,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축구대표팀 평가전에서 공을 몰고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는 이천수 선수의 모습. ⓒ 권우성

 

안녕하세요, 이천수 선수.

 

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조그마한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입니다. 전 스포츠 기자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축구를 종교로 정하고 있을 정도로 축구를 좋아합니다. 아니, 축구를 사랑합니다.

 

제가 축구와 인연을 맺게 된 대회는 바로 2002 한·일 월드컵입니다. 당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네덜란드 출신의 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휘에 따라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꺾고 월드컵 출전 사상 최초로 4강에 오르는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온 국민이 광화문 네거리에 모여서 '대한민국! 오~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한국의 승리를 기원했던 감동이 생생합니다.

 

이천수 선수를 처음 본 것도 2002 한·일 월드컵 때였습니다. 차두리 선수와 함께 고려대에 재학 중이던 이천수 선수는 빠른 스피드와 정교한 오른발 킥을 바탕으로 한국의 측면 공격을 확실히 책임졌습니다. 특히 왼쪽 또는 오른쪽 날개 공격수를 보면서도 가운데 공격수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 기질은 그야말로 우리나라 최고였습니다.

 

이천수 선수를 거론하면서 프리킥을 빼놓을 수 없겠죠? 사실 이천수 선수를 만나기 전까지 전 우리나라에서 고종수 선수가 프리킥을 가장 잘 차는 줄 알았습니다.

 

예리한 크로스와 빠르고 정확한 프리킥. 수원 삼성의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프리킥을 성공한 후 특유의 텀블링 골 뒤풀이를 시도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이천수 선수가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저는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프리킥을 멋지게 차는 선수가 있구나!'라며 감탄했습니다.

 

이천수 선수의 프리킥은 이탈리아 프로축구 AC 밀란에서 뛰는 데이비드 베컴을 쏙 빼닮았습니다. 상대 골키퍼의 허를 찌르는 완벽한 프리킥 코스에 높은 프리킥 성공률 까지. 이천수 선수는 '아시아의 베컴'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최고의 플레이를 선보였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날개 공격수를 넘어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거듭난 이천수 선수는 2003년 7월 레알 소시에다드에 입단했습니다.

 

우리나라 축구 선수 최초로 스페인 프로축구 무대에서 활약한 이천수 선수는 비록 1년 1개월 동안의 짧은 시간 이었지만 강한 인상을 남겨주며 한국 축구의 저력을 스페인 전역에 알렸습니다.

 

하지만 축구 실력 못지않게 톡톡 튀는 성격을 자랑했던 이천수 선수의 뒤에는 늘 '그라운드위의 악동', '문제아'라는 꼬리표가 붙었습니다. 이천수 선수를 좋아하는 팬의 입장에서 이런 비아 냥을 듣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2003년 5월. 울산 현대 소속으로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이천수 선수는 그랑블루를 향해 비신사적인 행위로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이천수 선수는 수원 서포터스를 겨냥해 손가락 욕설을 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천수 선수가 어깨가 탈구되어 몸을 가누지 못했지만, 그랑블루 쪽에서 '우리나라 좋은 나라', '잠꾸러기 없는 나라'라고 아유하는 노래를 부르며 비아냥댔기 때문입니다.

 

그 때 가장 절친했던 친구들은 저를  보고 '너는 왜 이천수 선수를 좋아하냐? 우리나라에 실력 좋은 선수들도 많은데, 이제 이천수 좋아하지 말고 차라리 다른 선수를 좋아해! 이게 뭐냐?'라고 놀리기도 했습니다.

 

2006년 10월 인천과의 경기에서도 역시 동료의 득점이 핸들링 판정을 받자 심판을 노려보면서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심한 욕설을 퍼부어 6경기 출장 징계 처분을 받았습니다.

 

공중파, 일간지를 비롯해 거의 모든 언론 매체들이 이천수 선수를 주목했습니다. 인터넷에는 '이천수 선수가 축구 선수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것 아니냐?', '아무리 축구를 잘하면 뭐하냐? 스포츠맨십이 없는데! 쯧쯧'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것도 제가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축구선수가 이런 악성 댓글과 욕을 받는 현실이 싫었습니다. 정말 이천수 선수를 비판하는 축구 기자들이 미웠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천수 선수는 갈수록 발군의 실력을 뽐냈습니다. '2006 독일 월드컵' G조 1차전 토고와의 경기에서, 0-1로 뒤지던 후반 9분. 전매특허인 오른발 프리킥으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습니다. 이천수 선수의 골을 바탕으로 한국은 안정환 선수의 역전 골이 터지면서, 월드컵 원정 첫 승을 따낼 수 있었습니다.

 

 2006년 6월 23일 저녁(현지시각) 독일 하노버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팀이 스위스에 0-2로 패하면서 16강 진출이 좌절되자 이천수가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장면.

2006년 6월 23일 저녁(현지시각) 독일 하노버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팀이 스위스에 0-2로 패하면서 16강 진출이 좌절되자 이천수가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장면. ⓒ 권우성

 

이천수 선수가 한국의 월드컵 원정 첫 승을 책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 대회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삼아 이천수 선수는 2007년 8월 네덜란드 프로축구 전통의 명문구단 페예노르트에 입단했죠.

 

섭섭하게도 1년 동안 뛰었습니다만 박지성, 이영표 선수에 이어 한국인이 네덜란드 무대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참 흐뭇했습니다.

 

저는 축구를 보기 어려운 강화도 산골 환경에서도 이천수 선수의 활약상이 담긴 하이라이트 영상을 꼭 소장할 정도로 이천수 선수를 응원했습니다.

 

2008년 여름, 짧은 네덜란드 생활을 마치고 K-리그 복귀를 위해 귀국하던 날. 저는 이천수 선수의 K-리그 복귀를 환영했습니다. 이천수 선수의 프리킥을 약 1년 만에 국내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죠.

 

그리고 이천수 선수는 K-리그 수원 삼성에 임대되고 나서 치른 첫 번째 경기에서 멋진 오른발 슈팅을 기록, 스타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물론 이 골은 이천수 선수가 수원에서 터뜨린 처음이자 마지막 골이었죠.

 

고질적인 발목 부상과 수원 삼성 선수단과의 불화 문제, 팀플레이 적응실패로 더 이상 그라운드에서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죠. 이천수 선수는 수원 삼성의 K-리그 우승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죠.

 

급기야 수원 삼성은 2008년 12월 구단 지시를 불이행한 이천수 선수에게 임의탈퇴를 신청했고, 이천수 선수는 무적 선수를 전락하며 축구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원 소속팀인 페예노르트로의 복귀, K-리그 다른 팀으로의 이적을 고민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전남 드래곤즈의 박항서 감독이 이천수 선수를 영입함에 따라 가까스로 선수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죠.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에서 무적 선수가 된 이천수 선수를 바라보는 제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2002년 이후 쭉 이천수 선수를 좋아했던 저를 원망할 정도였으니까요.

 

향긋한 꽃향기에 봄이 더욱 짙게 느껴졌던 3월 7일(토) 이천수 선수가 드디어 광양 축구 전용구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전남 드래곤즈의 소속으로 FC 서울을 상대로 한 '2009 프로축구 K-리그' 개막전에 교체 출장 한 것이죠.

 

저는 이 경기보다 30분 앞서 열린 수원 삼성과 포항 스틸러스 간의 공식 개막전을 빅버드(수원 월드컵경기장의 애칭)에서 직접 관전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천수 선수의 경기 모습을 직접 확인 할 수 없었지만 솔직히 한 골 정도를 예상했습니다.

 

그러던 찰나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는 축구팬 한 분에게서 문자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영우야! 축하해~ 이천수가 전남 데뷔골 터뜨렸대. 그것도 오른발 프리킥으로!' 공교롭게도 이천수 선수의 득점 소식이었습니다. 포항 스틸러스 응원석에 앉아있던 저는 포항 서포터스 마린스 틈에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이 골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이천수 선수가 프리킥 득점을 성공하기 전에 부심을 상대로 주먹감자와 총소리 제스처를 했던 것이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아무리 심판이 오프사이드 판정을 내렸어도 이런 행동까지 해야 했을까?'라고 생각했죠.

 

이천수 선수. 이 행동으로 당신은 K-리그 6경기 출장 징계와 제재금 600만원 부여, 사회봉사명령(페어플레이 기수 참여)을 받는 등의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올해로 7년 째 이천수 선수를 응원하고 있는 팬 입장에서 이 징계는 아주 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출장정지 기간 벌어지는 세 번의 홈경기 식전 행사에서 페어플레이 기수로 참여하는 것은 프로 선수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은 처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너무 상심하진 마세요. 이천수 선수 입장에서도 이번 징계를 구름판 삼아 더욱 더 큰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당신은 언제나 최고의 축구선수였으니까요. 빨리 훌훌 털어버리고 녹색 그라운드를 누비는 이천수 선수가 보고 싶습니다.

 

이천수 선수의 프리킥이 그리운 날. 이천수 선수가 보고 싶을 때 저는 이천수 선수가 실제로 착용했던 청색 축구화를 멍하니 바라봅니다. 예쁘게 늙어가고 있는 이 축구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저 흐뭇하기만 합니다.

 

언제까지나 이천수 선수를 응원하겠습니다. 이천수 선수가 축구화를 벗는 그 날 까지 말입니다. 건강하세요. 그리고 힘내세요! 항상 당신을 응원하겠습니다.

2009.03.12 10:15 ⓒ 2009 OhmyNews
이천수 감자 주먹 중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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