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판을 떠난 그는 더 이상 천하장사가 아니었다.'

씨름 천하장사 출신 격투기선수 이태현(32)이 아쉬움 많았던 MMA 생활을 접고 모래판으로 다시 돌아온다. 모래밭 대신 링에 발을 올려놓고 샅바를 잡던 양손에 오픈 핑거 글러브를 꼈던 그는 좋은 신체 조건(196cm)에 출중한 운동신경을 바탕으로 종합격투라는 험난한 무대에 도전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종목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고 결국 씨름 활성화라는 명분을 가지고 고향인 모래판으로 복귀하게 됐다. 김종화 구미시청 씨름단 감독은 국내 언론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이태현과 만나 10여 차례 설득한 끝에 내달 초쯤 계약하는데 합의했다"고 밝혔다.

일단 침체된 씨름시장에 이태현같은 스타플레이어가 돌아온다는 것은 분명 호재다. 하지만 이태현의 복귀는 씨름판에 미련을 가지고 복귀한 게 아닌 격투무대에서 자존심을 잔뜩 구긴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돌아오는 모양새라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야심차게 도전했던 종합격투 무대

 이태현에게 종합 격투는 단시간내에 정복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니었다.

이태현에게 종합 격투는 단시간내에 정복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니었다. ⓒ 프라이드


이태현은 씨름선수로 활동하던 시절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 18회, 지역장사 12회 등 굵직굵직한 성적을 쏟아냈다. 196cm의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힘과 균형이 잘 잡힌 씨름선수로 평가받았고, 그러한 명성을 바탕으로 2006년 9월 프라이드를 통해 MMA무대에 데뷔했다.

당시 격투계는 씨름스타 출신인 최홍만이 K-1에 무난히 입성했던 전례를 들어 모래판의 장사들에게 연거푸 추파를 던졌고 많은 선수들이 경제적 이유를 들어 무대를 옮기던 상황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태현은 씨름 경력으로만 따지면 최홍만을 능가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집중 조명을 받았다. 대부분 선수들이 입식 무대인 K-1을 선택한 것에 비해 종합무대인 프라이드를 활동 영역으로 정했다는 것도 많은 팬들의 관심을 끄는 요소였다.

씨름 밖에 몰랐던 이태현에게 격투 무대의 벽은 높았다. 그는 데뷔전에서 히카르도 모라에스(41·브라질)에게 현격한 기량차이를 드러내며 TKO로 무너지고 말았다.

신장 203cm의 노장인 모라에스는 이전 경기에서 표도르의 동생으로 유명한 에밀리아넨코 알렉산더(27·러시아)에게 펀치 연타를 내주며 15초 만에 굴욕의 넉 아웃 패를 당한 선수.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태현이 첫 경기부터 좋은 스타트를 끊을 수 있겠다"는 희망 섞인 예상도 나왔다. 하지만 짧은 준비 기간으로는 베테랑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씨름선수 출신답게 클린치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대적이 되었지만 타격에서는 아예 상대 자체가 되지 못했다. 

특히 이태현은 체력에 한계를 드러내며 격투기 무대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꾸준히 운동을 해왔지만, 씨름과 종합격투기는 근본부터 달랐던 것. 이태현의 이름 값을 믿고 기대했던 팬들 사이에서는 실망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고, 한동안 수많은 악평에 시달려야만 했다.

절치부심한 이태현은 1년 뒤 K-1 히어로즈 무대에서 야마모토 요시히사(38·일본)를 TKO로 제압하며 첫 승을 신고했다. 하지만 요시히사 경기만으로 이태현의 변화를 알기는 어려웠다. 요시히사는 2004년 2월 이후 전패를 기록하고 있던 선수로 통산 전적도 13승 23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김민수-최무배 등에게도 패하며 본의 아니게 코리안 파이터들의 승수를 늘려준(?) 역할까지 했던 선수라는 점도 요시히사를 저평가하는 요소가 됐다. 이태현과 격돌할 당시 요시히사는 말 그대로 '무늬만 헤비급 파이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당시 이태현은 첫 경기 때와는 사뭇 달라진 타격솜씨를 보여주며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잘 보여줬다. 하지만 그 변화의 척도를 가늠하기에는 상대가 너무 약했다는 지적이다.

모래판의 천하장사, 세계의 벽앞에 무너지다

이태현(사진 왼쪽)과 알리스타 오브레임 이태현은 호기롭게 '빅네임'의 상대를 지명했으나 결과는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 이태현(사진 왼쪽)과 알리스타 오브레임 이태현은 호기롭게 '빅네임'의 상대를 지명했으나 결과는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 드림


지난 6월 15일 일본 요코하마 아레나서 있었던 '드림(DREAM)4'는 이태현에게 종합무대에서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던 중요한 일전이었다. 상대는 국내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더치 사이클론' 알리스타 오브레임(28·네덜란드). 저평가와 고평가가 반복되던 선수로, 이태현으로서는 처음으로 맞서는 '빅네임'선수였다.

오브레임은 커다란 나무망치를 들고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무대를 향하는 입장부터, 난데없이 나타나 포옹으로 승리를 축하해주는 미녀 여자친구 등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선수로 유명하다. 라이트헤비급과 헤비급을 넘나들며 활약하고 있던 그는 타격-레슬링-서브미션 실력을 고루 갖춘 올라운드형 격투가로 명성이 높았는데 특히 헤비급으로 완전히 전향한 후에는 거칠 것 없는 상승세를 보여주던 상황이었다.

팬들 사이에서는 라이트헤비급 시절 그가 보여줬던 '내구력'과 '체력'의 약점을 파고들면 이태현에게도 승산이 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실제로 오브레임은 과거 안토니오 호제리오 노게이라, 척 리델, 마우리시오 쇼군 등과의 경기에서 초반 우세하게 경기를 펼쳐놓고도 역전패 당하는 등 뒷심이 없는 선수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팬들의 '희망사항'이었다.

막상 뚜껑이 열리자 오브레임과 이태현의 실력차는 예상보다 컸다. 오브레임은 마치 '스파링'을 하듯 손쉽게 경기시작 36초 만에 승부를 끝내버렸다. 오브레임의 빠른 공격은 이태현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으며 타격 기술 역시 격이 달랐다. 결국 이태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넉 아웃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최홍만의 활약으로 눈높이가 높아진 국내 격투 팬들에게 세계무대와의 현격한 차이를 알게 해준 한판이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태현은 좀더 쉬운 선수와 경기를 벌일 수도 있었지만 오브레임을 자신의 대전 상대로 스스로 선택했다고 알려져 있다. 호기 있는 배짱은 좋았으나 짧은 경력에 비춰봤을 때 '차근차근 한 계단씩 밟고 올라갔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물론 그러기에는 30살을 훌쩍 넘긴 나이가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이태현이 종합무대에서 구겨진 자존심을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모래판에서 회복할 수 있을지, 돌아온 천하장사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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