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흔히 투수놀음이라고 한다. 특히 포스트시즌과 같은 단기전에서 경기를 압도할 수 있는 확실한 '에이스'의 존재는 승리의 보증수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포스트시즌에서는 에이스가 사라졌다. 아니, '선발투수'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고 표현하는 게 적합할 것이다. 좋은 선발투수의 덕목 중 하나는 '이닝 이터'(Inning Eater)로서의 역할이다.

 

선발투수는 최소한 5이닝을 던져야 승리투수가 되고, 에이스급이라면 6~7 이닝 이상은 물론 완투도 가능해야 한다. 현대 야구에서는 좋은 선발투수를 평가하는 덕목으로 퀼리티 스타트(6이닝 이상 3실점 이하)라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최대한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마운드 운용에 안정감을 불어넣고 팀 승리를 이끈다는 것이, 경기의 첫 번째 투수인 '스타팅 피처'(Starting Pitcher)에게 내려진 사명이다.

 

올해 포스트시즌은 그야말로 '선발 투수들의 무덤'이 되어가고 있다. 롯데와 삼성의 준플레이오프 3경기를 포함하여 이번 플레이오프 4차전까지 선발승을 거둔 투수는 PO 3차전의 삼성 윤성환(5이닝 1실점) 단 한 명밖에 없다.

 

 삼성 선발투수 배영수가 8일 저녁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2008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1차전 롯데와의 경기에서 역투하고 있다.

5이닝을 채운 몇 안 되는 선발투수 중 한 명인 삼성 배영수 ⓒ 유성호

5이닝을 채운 투수도 준플레이오프 1차전의 삼성 배영수와 플레이오프 3차전의 두산 이혜천을 포함해 고작 3명 뿐. 완봉이나 완투는 언감생심이고, 퀼리티 스타트를 기록한 투수조차 아직 한 명도 없다.

 

이것은 각팀의 스타일과도 무관하지 않다. 플레이오프에서 격돌하고 있는 두산 김경문 감독과 삼성 선동렬 감독은 모두 선발을 믿지 못하고 불펜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감독들. 두 팀은 모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팀들답지않게 선발 요원 중 10승대 투수가 전무하다.

 

반면 롯데는 올시즌 8개구단 중 가장 안정적인 선발 로테이션을 꾸린 팀이었지만, 포스트시즌에 들어서는 믿었던 선발진이 모두 초반에 붕괴되며 제몫을 다하지 못했다.

 

선발의 부진은 당연히 불펜의 과부하로 이어진다. 플레이오프가 흔히 불펜 시리즈라고도 하지만, 이번 플레이오프처럼 선발이 아예 3이닝도 채우지 못하고 번번이 강판당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가뜩이나 체력 부담이 높아지는 단기전에서 불펜 투수들의 피로도는 그야말로 최악까지 치닫는다.

 

삼성의 1, 2선발 배영수와 존 에니스, 두산의 1, 2선발 김선우와 맷 랜들은 모두 5이닝을 채우지 못했다. 특히 이번 플레이오프에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두 번 선발 등판한  김선우는 1차전에서 2이닝, 4차전에서 다시 2.1이닝 만에 조기 강판되며 불펜 혹사의 주범이 되었다.

 

올해 두산과 삼성의 플레이오프 성향은, 타격전도 투수전도 아닌 '소모전'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경기가 박빙으로 흐르거나 장기전으로 치달을수록 양팀 모두 가장 먼저 소모하는 것이 불펜 투수들이다. 1~2이닝 정도를 책임져야할 불펜 요원들이 사실상 '준 선발'에 가까운 롱 릴리프로 소모되면서 구위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 겉보기에 경기가 타격전으로 치닫는다고 해도 감독으로서는, 마운드 운용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고민이다.

 

20일 대구경기장에서 벌어진 플레이오프 4차전은 오랜만에 화끈한 타격전이 펼쳐진 경기였다. 전날 3차전에서 무려 13안타를 때리고도 고작 2득점에 그치는 집중력 부족으로 2연패를 당한 두산은, 4차전에서 무려 21안타를 작렬하는 화력쇼 끝에 12-6으로 삼성을 대파했다.

 

그러나 5차전 이후의 득과 실을 감안하면 오히려 두산이 손해를 본 경기나 마찬가지였다. 삼성은 선발 이상목이 1이닝 만에 5실점을 당하며 조기강판되었으나 남은 8이닝을 전병호(4이닝)-조진호(4이닝)로 메우며 단 3명의 투수만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초반 일찌감치 점수차가 벌어지자 '필승 계투조'라고 할 수 있는 정현욱-안지만-권혁-오승환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등판했던 지난 3차전에서 두산이 오히려 정재훈-임태훈-이재우 등 주력 불펜들을 아껴 4차전에서 마운드를 유리하게 운용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선동렬 감독은 정규시즌부터 승산이 있는 경기와 없는 경기에 명확하게 선을 긋고 있다. 5회 이상 리드한 경기에서 삼성은 47승 2패의 가공할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리드를 빼앗긴 경기에서 역전승을 거둔 경우는 별로 없다.

 

 두산 투수 이재우가 16일 저녁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8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1차전 삼성과의 경기에서 8대 4로 승리를 한뒤 포수 채상병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이번 플레이오프는 불펜투수가 팀의 승리를 책임지고 있다. 두산 투수 이재우가 16일 저녁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8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1차전 삼성과의 경기에서 8대 4로 승리를 한뒤 포수 채상병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 유성호

반면 두산은 대승으로 쉽게 풀어갈 수 있었던 경기에서 김선우의 조기강판으로 불펜 필승카드라 할 수 있는 정재훈과 임태훈을 어쩔 수없이 낭비해야했다. 정재훈은 사실상 선발에 가까운 3.2이닝, 투구 수 72개를 기록했고, 임태훈도 2이닝 동안 투구 수 28개를 기록하며 당장 다음 5차전 출전이 불투명해졌다. 오승환이 있는 삼성에 비하여 확실한 고정 마무리가 없는 두산은 구위가 좋은 불펜 투수들을 최대한 아껴두어야 했던 상태.

 

김선우가 5이닝 정도만 버텨주었더라도 두산은 다음 경기에서 훨씬 유리하게 마운드를 운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김경문 감독은 이겨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1선발로 낙점한 김선우의 부진으로 시리즈가 만일 7차전까지 갈 경우, 최종전에서 내보낼 선발요원도 마땅치 않다는 이중의 부담을 안게 됐다.

 

21일에 펼쳐질 5차전 선발투수는 배영수(삼성)와 맷 랜들(두산)이다. 이 경기도 역시 선발투수들이 얼마나 이닝이터로서의 역할을 해주느냐가 관건이다. 만일 5차전에서 경기에서 불펜 싸움으로 접어들게 되면 유리한 쪽은 삼성이다. 이번 포스트시즌이 끝나기 전에 과연 제대로 된 '투수전'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 궁금해진다. 

2008.10.21 11:08 ⓒ 2008 OhmyNews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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