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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으로 정이 안가는 인간

똥파리를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똥파리 그 자체의 혐오스러움 때문에 그럴 기회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헌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무엇이 보이는 줄 아는가? 그것은 햇볕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빛나는 등짝의 광택이다. 더럽고 냄새나는 똥파리에게서 등짝의 광택, 그 영롱함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생각. 그래, 세상엔 추한 것을 추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거겠구나. 단정할 수 없는 반대의 사실들이 슬며시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인 것이다.

사람도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많다. 영화 <똥파리>의 상훈도 그런 인간이다. 상훈은 도저히 인간적으로 정이 안가는 인간이다. 재미있는 것은 '상훈'역을 맡은 감독 겸 주인공 양익준이 3년전에 출연했던 단편의 제목이 <인간적으로 정이 안가는 인간>(감독 손원평 2005>)이었다는 점이다. 그 영화에서도 양익준(용희)은 도저히 보통 사람이 봐서는 뭐 저런 인간이 있나 할 정도로 정 떨어지는 캐릭터이다.

그러면 직접 연출까지 한 장편 데뷔작 <똥파리>에서의 '상훈'은 어떨까? 오히려 '용희'보다 훨씬 더 심하고 독하다. 심한 욕설은 기본이고 빌려간 돈을 받으러 다니는 건달이면서도 같이 일하는 후배들을 막 대하는 파렴치한 인간이다. 태어난 배가 다르지만 그를 위하는 누나에게까지 뱉지 않아야 할 욕을 하고, 심지어 아버지를 상습적으로 구타하기까지 한다. 어디 뉴스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이, 그런 '상훈'에게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묘한 인간의 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연민'과는 좀 다른 개념의 것인데,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았던 인물에게서 우리는 피와 눈물을 보게 됨으로써 그를 내편에 넣고 싶을 정도로 동요된다. <똥파리>는 인간적으로 정이 안가는 상훈이 인간적으로 정이 가는 인간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폭력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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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는 분명 '가족 영화'의 범주 안에서 깊게 생각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흩어진 '상훈'의 가족이 과연 회복될 수 있는가를 질문하고 무너져가는 연희의 가족을 보여줌으로써 '가족'이 실제로는 얼마나 개인 개인에게 공포스럽고 지겨운 존재임을 각설하게 만든다.

'상훈'과 '연희'를 이어지게 해주는 고리가 '폭력'이라는 것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으로 여동생과 어머니를 잃은 상훈에게 '폭력'은 당위적으로 그가 끌어안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폭력'에서 벗어나기는 커녕 그 안에서 침몰되어 간다. 연희로 인해 어느 정도 삶의 희망을 얻고 세상에 손짓할 무렵, 상훈은 자신이 쌓아 놓은 '폭력'이라는 덫에 오히려 밟히고 만다.

그것은 상훈 자체의 몫일 뿐더러 그의 무거운 짐이다. 연희 또한 상훈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폭력을 수용하는 자세에 좀 차이가 있다. '상훈'은 분명 어렸을 적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표면적으로 분출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폭력의 악순환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연희'는 포장마차에서 일하시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건달들의 폭력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희는 그것을 극복하려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를 죽인 상훈을 따뜻하게 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폭력의 실체를 상훈과 연희는 뼈져리게 실감하지만 두 명 다 그것을 막아내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악순환되는데, 연희의 동생 영재가 상훈의 아버지, 상훈으로 되풀이하던 폭력을 그대로 행사하는 것 자체에서 비극의 짙은 냄새가 자극한다.

연희는 상훈의 가족과 함께 새로운 연대를 추구할 수 있는 듯해보이지만, 그의 동생은 그것의 정 반대 시점에서 자신과 멀어지고, 상훈이 버리려고, 그만 포기하려고 했던 건달의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그러니 도무지 이 폭력의 악순환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특별히 섬뜩하고도 잊기 힘든 장면은 연희가 동생이 포장마차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행동을 보는 것인데, 그것은 어머니가 죽을 때 연희가 봤던 장면과 너무나 비슷해 그것을 보고 있는 연희나 또 그 장면을 보고 있는 관객이나 상당히 혼란스럽고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는 짐승만도 못한 인물들은 <똥파리>를 보는 우리에게 그 '폭력'이라는 더럽고도 악한 실체가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빈번하게 자행되고 사라지기 힘든 것임을 자각케 하는 것이다.

수상한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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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닮아 있다. 상훈과 연희. 그들의 가족은 붕괴되었거나 붕괴되어가지만 결코 그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나비와 꽃처럼 그들이 만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기 때문. 그것을 표현하고 싶어하거나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서로 상대방이 자신처럼 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30대 중반의 건달과 10대 여고생의 연대가 그들이 사용하는 반말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상훈은 잃어버린 여동생, 연희는 재역할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그들 스스로 대신하는 데서 느껴지는 어떤 유대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유대는 상훈의 가족과 함께 특별한 관계로 이어져 가는데 연희는 그것을 반기고 또 반긴다.

그들의 이 수상한 연대가 절정으로 치닫는 부분이 있다. 한강으로 연희를 부른 뒤 연희의 무릎에 머리를 파묻은 상훈. 상훈은 연희에게 아버지에게 잘하라고 얘기한다. 그것을 들은 연희도 말한 상훈도 그냥 말없이 펑펑운다. 아버지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상훈은 이제 그렇게 화를 풀거나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용서를 구할 아버지가 없다. 연희 또한 자신이 처한 현실이 아버지에게 잘하기에는 너무나 버겁다. 그러므로 상훈과 연희가 내쏟는 눈물은 더욱더 처절해 보인다.

햇볕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빛나는 똥파리, 양익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양익준이라는 인물은 독립영화계에서는 꽤 연기 잘하는 배우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몇 편의 단편을 거쳐서 만든 장편 <똥파리>로 연기는 두말할 나위 없고 연출까지 훌륭하게 해내는 감독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 같다.

그는 이 영화에서 건달 그 자체이고 폐륜아이며 인간을 사랑할 줄 아는 '상훈'으로 완벽히 분해 있다. 그 정도로 그의 연기는 '눈이 부시다'라고 말할 정도로 뛰어나다. 더불어 데뷔작에서 느껴지는 강한 생동감이 <똥파리>에 있다. 제목 자체에서부터 양익준은 평범한 영화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역시 그 의지에서 벗아나지 않는다.

제작비 조달의 어려움이 있었던 만큼 그의 첫 작품에선 땀과 노력의 흔적이 느껴진다. 영화 자체로 봤을 때는 몇 번은 웃음 지을 수 있고, 몇 번은 눈물 지을 수 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성찰할 수 있는 깊이도 있다. 난 '똥파리'가 어쩌면 상훈뿐 아니라 양익준의 모습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햇볕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빛나는 등짝의 광택을 가진 사람. 양익준은 좀 말하기 우습지만 적어도 내겐 똥파리였으면 좋겠다. 더불어 불쾌하거나 영롱한, 하지만 현실을 과감없이 그린 그의 소중한 작품 <똥파리> 또한 환하게 빛나길 바란다.

똥파리 양익준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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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2008 시네마디지털서울 관객심사단 2009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심사단 2010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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