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개막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열린 부산 수영만 야외상영관. 대형 스크린이 올라가고 있다.

▲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열린 부산 수영만 야외상영관. 대형 스크린이 올라가고 있다. ⓒ 성하훈


영화가 종교라면 영화광은 신도다. 극장에 모여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는 사원에서 신도들이 기도를 올리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리고 기도 아니 영화가 끝나면 다시 극장이라는 사원을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9일간의 기도회가 시작됐다.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그 화려한 막을 올린 것. 개막식이 열리기 수 시간 전부터 수영만 요트경기장 안과 밖을 채운 부산 시민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뜨거웠다.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하던 날

개막식 장소인 수영만 요트경기장으로 향하는 도로는 개막 두어 시간 전부터 정체돼 걷는 게 오히려 빠를 정도. 걸어서 도달한 수영만 요트경기장 입구는 말 그대로 장사진이었다. 요트경기장 주변의 육교는 스타를 보기 위해 달려온 중고등학생 팬들에 이미 점령된 뒤였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는 충무로가 텅 빈다는 속설이 있다. 소문은 현장에서 확인됐다. 레드카펫은 충무로를 고스란히 옮겨온 듯 했다. 장내 5천여 관객이 자리한 가운데 벌어진 레드카펫 행사는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행사의 백미. 사회를 맡은 배우 정진영·김정은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국내외 영화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폐막작으로 선정된 <나는 행복합니다(윤종찬)>의 배우 현빈과 이보영을 비롯해 안성기·강수연·김소연·신민아 등 70여 명의 배우가 화려한 조명 속에 등장했고 정창화, 하명중 감독의 모습도 보였다. 특히 한국영화계의 노장 유현목 감독은 휠체어를 타고 입장해 눈길을 끌기도.

해외 배우로는 한국계 미국배우 아론 유를 포함 총 11명이 참가한 가운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누도 잇신 감독과 그의 신작 <구구는 고양이다>의 배우 우에노 주리 또한 레드카펫을 빛낸 인물이다. 올해 뉴 커런츠상 심사위원장으로 부산을 찾은 프랑스의 배우 안나 카리나는 검은 중절모에 검은 양복을 선보여 연륜이 묻어나는 여유와 꺾이지 않는 카리스마를 자랑하기도 했다.

칸·베를린보다 시민친화적인 부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 문성식


칸이나 베를린처럼 레드카펫을 극장 밖에 마련해 극장 안으로 입장하지 못한 시민들 위주로 펼쳐지는 레드카펫 행사와 부산의 그것은 사뭇 달랐다.

황금종려상이나 금곰상을 걸고 영화제 기간 동안 초청된 영화들이 경쟁을 하는 이들 유럽의 국제영화제는 대중이 범접하기 힘든 엘리트주의를 은근히 과시하곤 한다. 이를테면 개막식장을 가득 메운 초청자들에게 '올해의 심사위원'을 소개하고 개막선언을 한 뒤 바로 개막작 상영에 들어가는 것이다.

반면 부산은 경쾌했다. 장내에 입장한 관객들은 평소 쉽게 볼 수 없었던 '스타'들에 환호하며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카메라 소지는 비록 금지됐지만.

뉴 커런츠상·선재상과 같은 시상 부문이 있다 해도 이것이 부산국제영화제의 메인 메뉴는 아니다. '영화백화점'이라는 말 그대로 영화제 기간 동안 해운대와 남포동을 오가며 영화를 보고 전 세계 영화의 흐름을 맛보는 것이다. 개막식에서 펼쳐지는 레드카펫 행사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스타와 관객에게 선사하는 윙크라 할 수 있다. 순간을 즐기는 것.

그래서였을까. 개막식을 찾은 스타와 관객은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고 또한 그것을 마음껏 즐겼다. 레드카펫 위 배우가 손을 들어 인사하면 일제히 손을 흔들며 화답할 정도로 순박한 동시에 화끈한 부산의 관객들은 좋아하는 배우의 얼굴이 드러날 때마다 뜨겁게 환호했다.

하이라이트는 단연 장동건이었다. 장동건이 레드카펫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자 장내는 떠나갈 듯한 환호성으로 들끓었다.

최진실 사망 소식에 '술렁'... 빈소 찾은 이병헌 불참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 문성식

침울한 소식도 있었다. 개막식에 참가하기로 약속한 배우 몇몇이 레드카펫 행사에 불참 의사를 밝혔다는 소문이 잠시 돌았던 것. 13일 아침 돌연 자살해 충격을 던져준 배우 최진실씨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러나 고 최진실씨 빈소를 찾은 배우 이병헌만 개막식 시간을 맞추지 못해 불참한 것 이외에 이변은 없었다.

뉴 커런츠 심사위원으로 부산을 방문할 예정이었던 이란의 사미라 마흐말바프 감독의 불참 소식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파리의 공항에서 탑승 대기 중이었던 마흐말바프가 호흡곤란을 일으켜 병원으로 급히 이송됐으며 병원에서는 당분간 거동하지 말라고 요구했다고.

때문에 올해 뉴 커런츠 심사위원단은 안나 카리나, 배우 이화시, 독일 제작자 칼 바움가르트너, 인도 감독 산토시 시반 등 4인 체제로 운영될 예정이다.

레드카펫 행사가 마무리되고 이어진 허남식 부산시장 겸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의 힘찬 개막선언과 함께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져 수영만 요트경기장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최근 몇년 새 경쟁하듯 솟아오른 고층 아파트들이 반쯤 머리를 숙인 대형 스크린을 병풍처럼 둘러싼 형상은 도시 속의 축제를 새삼 실감케 했다. 스크린 오른 쪽으로는 환하게 불을 밝힌 광안대교 위로 자동차들이 한가로운 행진을 벌이는가 하면 그 아래로 정박한 요트들이 일렬로 늘어서 바다의 도시 부산을 유감없이 뽐내기도.

부산영화제, 미지의 영화에 주목하다

올해로 제13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는 133편의 월드프리미어와 인터내셔널을 선보인다. 뿐만 아니라 60개국 총 316편에 달하는 작품이 부산을 찾아 전체 상영 편수 또한 역대 최대. 그러나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방점을 찍은 것은 역대 최대의 상영 편수가 아니라 '한국영화'다.

'한국영화 산업이 어렵다'는 한탄이 부쩍 늘어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영화 프로그램을 부각시킴으로써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하려 노력하겠단다. 이를테면 한국영화를 포함한 아시아 영화 관련 펀드를 한자리에 모으는 '아시아 필름펀드포럼'이나 국내 젊은 프로듀서들이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투자자를 찾는 'KPIF' 등의 행사를 마련해 실질적인 제작 네트워크의 기반을 닦겠다는 포부가 그것.

동시에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영화를 위한 축제라는 영화제의 정체성에도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미지의 영화를 발굴하고 아시아 영화를 새롭게 바라보는 특별 기획프로그램이 다수 보이는 까닭이다.

올해 개막작으로 카자흐스탄 영화를 선정한 것도 같은 맥락. 예술적, 대중적 지명도가 높은 아시아 감독의 작품으로 영화제의 문을 열어온 관례를 떨치고 무명에 가까운 카자흐스탄 감독의 영화에 개막 스크린을 할애한 것이다.

루스템 압드라쉐프 감독이 연출한 <스탈린의 선물>이 주인공. 이것은 지난해 칸국제영화제가 보여준 '미지의 영화'를 향한 기대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지난해 칸은 루마니아의 무서운 신예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 황금종려상을 안겨줌으로써 국제무대에 덜 알려진 루마니아 영화에 주목했다. <4개월...>은 촬영 6개월 전까지도 제작비가 없어 촬영이 불투명했던, 전형적인 저예산 영화다.

개막식에 앞서 마련된 기자회견에서 압드라쉐프 감독은 <스탈린의 선물>의 제작비 80%가 개인 호주머니에서 나왔다며 카자흐스탄의 척박한 제작환경을 소개한 바 있다. 하여 <스탈린의 선물>과 <4개월...>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수작이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카자흐스탄 영화'라는 말이 낯설 뿐 카자흐스탄은 그러나 구 소련의 비옥한 영화 전통의 저력을 간직한 나라.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포토월 앞에선 개막작품 '스탈린의 선물' 감독과 배우들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포토월 앞에선 개막작품 '스탈린의 선물' 감독과 배우들 ⓒ 문성식


낯선 나라 카자흐스탄 영화가 한국에 낯설지 않은 까닭

<스탈린의 선물>은 '삶'이 '생존'의 단계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누군지 잊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대를 고통스러운 어조로 들려준다. 1949년 구 소련 정부에 의해 아르메니아·한국·체첸 등 120만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던 시절로 돌아간 카메라는 유대인 꼬마 사쉬카의 눈이다.

영화의 원제는 <스탈린에게 보내는 선물>이지만 중의적 표현을 감안해 <스탈린의 선물>로 탈바꿈 했다고. 1949년 구 소련 정부는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맞아 최초의 핵폭탄 실험을 감행했다. 그리고 핵실험은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양산했다. 스탈린의 생일날 인민들에게 안긴 죽음의 선물이 바로 핵실험이었던 것.

다른 하나는 사쉬카의 꿈이다. 사쉬카는 스탈린에게 70회 생일 선물을 보내면 부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예루살렘을 배회하는 어린양의 환영은 어쩌면 스탈린에 도달하지 못한 사쉬카의 선물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영화의 바다 부산에서 오는 10일까지 9일 동안 계속될 항해 도중 만나게 될 것이다. 카레이스키(고려인)라는 소수민족이 걸었던 까닭에 결코 우리와 무관할 수 없는 역사의 뒤안길을.

부산국제영화제 스탈린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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