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유도 경기가 열린 베이징 과학기술대 체육관에서 한 사나이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60kg급 금메달리스트 최민호였다. 얼마나 만감이 교차했는지 그의 눈물은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시상대에서도 그칠 줄 몰랐다.

 

11일 같은 장소에서 또 한 사나이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최민호의 그것과 달랐다. 아쉬움과 절망이 교차하는 눈물이었다. 73kg급 결승전에서 한판으로 패한 왕기춘이었다.

 

그칠 줄 모르던, 스무 살 왕기춘의 눈물

 

 11일 베이징 과학기술대체육관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유도 73kg급 결승전에서 왕기춘이 한판 패 당한 뒤 얼굴을 감싸쥔 채 주저앉아 있다.

11일 베이징 과학기술대체육관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유도 73kg급 결승전에서 왕기춘이 한판 패 당한 뒤 얼굴을 감싸쥔 채 주저앉아 있다. ⓒ 남소연

보통 유도나 레슬링 같은 비인기 종목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기 전까지는 일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왕기춘은 달랐다.

 

왕기춘은 올림픽을 앞두고 열렸던 대표 선발전에서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그랜드슬램(올림픽·아시안게임·아시아선수권·세계선수권)'을 달성한 '한판승의 사나이' 이원희를 물리쳤다.

 

그 순간부터 왕기춘은 큰 부담을 안아야 했다. 분명 정정당당한 선발전을 통해 베이징 행 티켓을 따냈지만, 사람들은 세계를 군림하던 '유도 황제' 대신 스무 살의 어린 선수가 올림픽에 나가는 것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왕기춘의 목표는 당연히 금메달이었다. 2007년에 19살의 나이로 출전했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던 왕기춘이었기에, 금메달은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었다.

 

왕기춘은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직행했다. 최민호처럼 시원스런 한판 행진을 벌이진 못했지만, 안정된 수비와 압도적인 체력을 바탕으로 상대를 하나하나 제압해 나갔다.

 

결승전 상대는 아제르바이잔의 엘누르 맘마들리. 작년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에서 꺾었던 상대다. 왕기춘은 자신이 넘쳤다. 그러나 결과는 한판 패.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13초 만에 승패가 엇갈렸다.

 

왕기춘을 지도한 안병근 감독도, KBS 해설위원으로 참여한 '라이벌' 이원희도, 왕기춘의 금메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국민들도 모두 얼어 버렸다. 물론 그 순간,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바로 왕기춘 본인이었을 터.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매트에 누워있던 왕기춘은 맘마들리와 포옹을 하고 경기장을 내려오며 곧 굵은 눈물을 쏟아냈다. 방송 3사를 통해 방송된 인터뷰에서도 왕기춘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얼마나 아쉬웠을까. 보는 사람들마저 숙연하게 만든 장면이었다.

 

"은메달도 값진 것이니 울지 말라"고?

 

하루가 지나도 왕기춘의 눈물은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오마이뉴스>에서 한 기사를 읽었다. 박상규 기자가 쓴 '패자의 웃음, 한국의 파이셔가 그립다' (8월 12일자)가 그것이었다.

 

그 기사에는 왕기춘이 흘린 아쉬움의 눈물과 같은 날 여자 57kg급에서 은메달을 따낸 데보라 가리벤스타인(네덜란드)의 환한 웃음을 비교했다. 왕기춘이 이틀 전 최민호에게 패했던 루드비히 파이셔(오스트리아)처럼 승자를 배려하는 모습이 없었던 게 다소 아쉬웠다는 내용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이자 '이원희'라는 짐까지 떠안고 베이징으로 향한 왕기춘과 메달 가능성이 낮았던 노장 선수 데보라를 비교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데보라는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내긴 했지만, 작년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9위에 머물렀고 같은 해 유럽 선수권대회에서도 7위에 그친 선수. 이번 올림픽에서는 북한의 계순희를 비롯한 우승 후보들이 일찌감치 탈락하는 바람에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린 것이다.

 

반에서 7등을 하던 학생이 전교 2등의 성적표를 받았으니 기뻐하는 것은 당연지사 아닌가. 

 

한국 선수들이라고 해서 왕기춘처럼 언제나 은메달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사격 여자 10m 공기소총의 강초현(은메달)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역도 여자 75kg 이상급의 장미란(은메달)이 보여준 '아름다운 미소'를 벌써 잊었단 말인가. 이번 올림픽에서도 마찬가지다. 12일 열린 남자 자유형 200m 결승에서 은메달을 딴 박태환은 1위 펠프스(미국)에게 웃으며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11일 베이징 과학기술대체육관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유도 73kg급 결승전에서 패한 왕기춘이 아제르바이젠 엘누르 맘마들리와 은메달, 금메달을 각각 목에 걸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11일 베이징 과학기술대체육관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유도 73kg급 결승전에서 패한 왕기춘이 아제르바이젠 엘누르 맘마들리와 은메달, 금메달을 각각 목에 걸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남소연

반면에 지난 아테네 올림픽에서 '드림팀'으로 불리던 미국 농구대표팀은 동메달을 따낸 후 시상식에서 작은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렇듯 선수마다 각자 처한 상황이 있는 것이다. 세계 정상의 선수에게는 은메달이 '아쉬움'일 수 있고, 그보다 낮은 기량의 선수에게는 은메달이 뜻밖의 '기쁨'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땀을 흘린 선수가 정상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에 굵은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왜 값진 은메달을 따내고도 웃음을 보이지 못하냐고 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물론 지난 9일 최민호에게 한판으로 패하고도 먼저 다가가 뜨거운 포옹을 나눈 파이셔의 행동은 분명 멋지고 아름다웠지만, 모든 선수가 그렇게 행동해야 할 의무는 없다.

 

'은메달도 소중하다'고 강요하지 마라. 그렇게 얘기하지 않아도 '은메달의 가치'는 선수들이 더 잘 알고 있을테니까….

2008.08.12 14:31 ⓒ 2008 OhmyNews
베이징 올림픽 왕기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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