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였다. 소재로 음악을 다뤘다고 하면 '무조건'이다. 곡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 '무조건' 이것 하나다. '피아노협주곡 2번'. 피아노엔 젬병이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피아노깨나 쳤다는 사람도 쉽게 연주하기 힘든 곡임은 분명한 듯싶다. 이른바 '천재'들도 쉽게 범접하기 힘드니 말이다.

영화 <샤인(shine)>의 음악 천재 데이빗 헬프갓(David Helfgott·제프리 러쉬)은 이 곡을 연주하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숫제 정신을 놔버렸다.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킹왕짱 훈남 치아키(타마키 히로시)도 프로무대 데뷔곡으로 이 곡을 골랐다.

물론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For Horowitz·감독 권형진) 예외는 아니다.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경민(피아니스트 김정원·청년경민)은 자신의 재능을 알아준 선생님 지수(엄정화)앞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을 멋지게 뽐냈다.

나라 안이나 밖이나 매번 같은 공식, 질릴 법도한데 일단 연주가 시작되면 금세 넋을 잃고 빠져든다. 누가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았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에게 '거장'(巨匠)이란 말은, 그냥 붙은 꾸밈씨가 아니었다.

 변두리에서 피아노 학원을 하는 선생님 지수(엄정화)가 음악 신동 경민(신의재)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변두리에서 피아노 학원을 하는 선생님 지수(엄정화)가 음악 신동 경민(신의재)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 싸이더스 FNH



이야기는 비교적 단순하다. 음악에 천재적인 능력을 보이는 한 아이 경민, 그리고 변두리에서 피아노 학원을 하면서도 항상 최고를 꿈꾸는 선생님 지수가 만나 벌이는 휴먼드라마다. 그래서 살짝 안타깝다.

경민은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뒤 할머니와 함께 고물을 팔며 어렵게 생활한다. 게다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만 보면 힘없이 바닥에 주저 앉아버린다. 그리곤 두 눈을 가린 채 서럽게 목 놓아 운다.

지수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해외 유학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있다. "너는 왜 이 모양 이 꼴이냐"며 엄마가 꾸짖으면 "나도 유학만 갔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다"며 되레 성을 낸다. 사실 딱히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그녀에게 음악 천재 경민은 기회였다. 인생역전, 대박의 꿈, 로또(lotto)나 다름없었다. 콩쿠르에서 우승해 인정을 받으면, 단박에 천재를 길러낸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수는 이를 노리고 경민에게 관심을 보이고, 애정을 쏟는다. 하지만 막상 대회에 참가한 경민은 건반 한 번 건드려보지 못하고, 다시 땅에 주저 앉아버린다. 무대에 설치된 강한 조명 불빛을 보고 사고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실망한 그녀는 그날 이후, 아이를 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유일한 혈육이던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둘은 다시 만난다. 겉으론 스승과 제자 사이지만, 어린 경민에겐 그녀는 엄마나 다름없다. 지수도 어느새 대박을 꿈꾸는 선생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경민이 "엄마, 이제 엄마 말 잘 들을게"라며 울먹이는 장면에선 가슴이 먹먹해져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다. 영화 <열한번째 엄마>의 '찌릿'함보다 훨씬 강하다.

여기엔 역시 연기자의 몫이 크다. 어쩔 수없이 아이를 외국으로 떠나보내는 배우 엄정화의 얼굴에선 애틋함이 절로 묻어난다. 무대 위에서 보였던 농익은 여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피아노 천재 역을 맡은 신의재 군도 연기는 처음이지만, 건방지면서도 감수성 짙은 경민역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1층 피자가게 주인 광호역을 맡은 배우 박용우는 "핫핫핫"하는 호탕한 웃음소리로 이야기가 지루한 신파로 빠져드는 것을 막았다. "피자는 손으로 빚어야 한다"는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국내 최초 음악영화답게, 영화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맛깔스런 음악은 보는 이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쇼팽의 '강아지 왈츠',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모차르트의 '쾨헬 op.20' 바흐의 '인벤션' 등. 쌍팔년대식 표현으로, 주옥같은 클래식 명곡들이 콸콸 넘쳐난다. 게다가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서 흐르는 엄정화가 직접 부른 '나의 피아노'도 빼놓을 수 없다. 제작 싸이더스 FNH. 전체 관람가.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변두리 피아노 선생님 역을 맡은 배우 엄정화와 음악 신동 신의재 군이 촬영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변두리 피아노 선생님 역을 맡은 배우 엄정화와 음악 신동 신의재 군이 촬영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싸이더스 FNH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블로그(goster.egloo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호로비츠를 위하여 엄정화 신의재 권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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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내가 밉습니다. 화가 나도 속으로만 삭여야 하는 내가 너무나 바보 같습니다. 돈이, 백이, 직장이 뭔데, 사람을 이리 비참하게 만드는 지 정말 화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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