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영화의 내용을 암시하는 스포일러가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주>

ⓒ 오브젝트필름, 모티브시네마

 

어릴 적에 살던 동네는 변두리였지만 이웃들 간 인심이 좋고 큰 소리 한번 나는 일 없는 조용하고 평온한 동네였다. 흔히 이야기하는 강도·살인 같은 강력범죄들은 그야말로 TV 뉴스에서나 듣던 ‘남의 이야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에 멀쩡히 서로 안부를 주고받던 어느 이웃이 야밤에 침입한 강도에게 상해를 당하여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동네 분위기는 급변했다. 민심이 흉흉해졌고 아이나 부녀자들이 저녁에 홀로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어졌다. 근처 집값이 떨어진다고 불평하던 부동산 아저씨의 얼굴도 기억에 남는다. 막연하나마 범죄의 공포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그때 처음으로 체험했다.

 

흔히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세상이 많이 험해졌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정작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다수의 이들에게는 아무리 흉흉한 사건·사고라 할지라도 직접 가까이서 겪어보지 않는 이상, ‘내 일’이 아니라고 애써 외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눈앞으로 다가왔을 때, 그 공포는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가까워진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많은 이들에게 절절한 여운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이 먼 나라나 가상의 공간을 무대로 한 것이 아닌, 우리와 가까운 장소, 가까운 시대에서 벌어진 실화라는 점 때문이다.

 

<우리 동네>가 <쏘우>나 <유주얼 서스펙트>같은 할리우드 스릴러와 차별화되는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 동네>는 장르로서는 스릴러지만, 그 정체성을 분명하게 구분하자면 ‘생활밀착형 연쇄살인극’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기묘한 트릭이나 복잡한 고문도구, 기상천외한 살인흉기를 사용하는 ‘묻지마 살인마’ 따위는 나오지 않으며, 살인극의 무대도 고립된 섬이나 외딴 별장 같은 음침한 곳이 아닌 도심 변두리에 위치한 평범한 서민층 동네다. 살인의 주체가 되는 인물들 역시 얼핏 보기에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의 얼굴들을 하고 있다.

 

‘우리 동네’라는 친근하고 서민적인 어감과 ‘연쇄살인극’이라는 설정이 주는 부조화 속의 조화는 타인에 대한 잠재적 폭력성이나 미지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의 공포감을 상징한다.

 

사이코패스나 연쇄살인을 다룬 기존의 영화들이 ‘범인 찾기 놀이’와 잡다한 트릭을 통한 일종의 가상 두뇌게임 같은 이미지였다면, <우리 동네>는 살인이라는 범죄나 연쇄살인범이라는 악마가 결코 우리 주변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님을 일깨워준다.

 

얼핏 보기에 정상인의 모습을 띠고 있는 인물들이 가면 뒤에 살인마라는 또다른 정체성을 숨기고 있는 모습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천사의 얼굴에서 악마의 얼굴로 변할 수 있다는 이중성에 대한 두려움을 새삼 상기시킨다.

 

 영화 <우리 동네>의 세 주인공. 왼쪽부터 재신(이선균), 효이(류덕환), 경주(오만석).

영화 <우리 동네>의 세 주인공. 왼쪽부터 재신(이선균), 효이(류덕환), 경주(오만석). ⓒ 오브젝트필름, 모티브시네마

 

궁극적으로 <우리 동네>는 악연의 나비효과에 관한 영화다. 할리우드 영화가 살인의 주체나 과정에 집중한다면, 한국형 스릴러는 살인의 인과관계에 더 치중한다. 영화는 중반부에 접어들기 전에 일찌감치 범인의 정체를 드러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범인이 누구이고 어떤 방식으로 범죄를 저질렀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왜’ 살인을 저지르는가 하는 이유다.

 

영화는 사건의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세 남자의 캐릭터를 통해 이들이 살인이라는 주제로 얽히게 되는 과정, 이들을 둘러싼 기묘한 인연과 악연의 배경을 추적한다. 연쇄살인범 경주(오만석)와 효이(류덕환), 경주의 친구이자 형사인 재신(이선균) 세 사람은 모두 기묘한 악연으로 이어져 있다. 이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내면에 숨겨진 정신적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있다.

 

영웅이 악당을 추격하는 식이 아닌, 살인범이 살인범을 추격한다는 기묘한 설정, 연쇄살인과 모방범죄를 오가는 거울형 구조, 우연과 필연으로 얽혀진 인물들의 인과관계를 파헤치는 극적 구성은 흥미롭고 독창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논리적 인과론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오히려 후반부의 극적 긴장감을 오히려 해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세 인물을 둘러싼 정서적 '트라우마'는 극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중심축이기는 하지만, 우발적 사고에서 벌어진 살인을 넘어, 인물들이 연쇄살인을 즐기는 괴물로까지 변하는 과정을 설득하기에는 다소 허술한 측면이 없지 않다.

 

살인사건 자체가 이야기의 축이 아니라 인물들의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해 살인이라는 설정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느낌이다. 등장인물들이 변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설명하는데 집착하다가 오히려 논리적 비약으로 치달은 듯한 아쉬움을 준다.

 

세 인물을 둘러싼 연관관계를 히든카드로 내세우기보다, 극 초반부 보여줬던 인간의 잠재적 악마성과 이중성에 대한 고찰을 더 밀어붙였더라면 어땠을까. 연쇄살인이라는 범죄가 무서운 이유도 그것이 특정한 인과관계가 아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무차별 범죄라는, 예측할 수 없는 돌발성에 있다. 살인의 이유를 어린 시절의 정신적 상처 같은 한정된 틀에 가두려는 것은 오히려 캐릭터의 개성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세 주인공 중 가장 왜소하고 선해 보이는 얼굴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류덕환의 연기는 <리플리>의 맷 데이먼나 <에이치>(H)의 조승우를 연상시킬 만큼 인상적이었다. 다만, 극중에서 보이는 왜곡된 여성성과 모성에 대한 다소 과장되고 편협한 묘사, 그리고 실험적인 심리 드라마와 대중적 스릴러의 사이에서 고민한 듯한 흔적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2007.12.04 10:28 ⓒ 2007 OhmyNews
우리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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