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섭 기자는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하지만 회사에서 퇴근하면 복서로 변신합니다. 현재 8년째 복싱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연재는 아마추어 복싱 선수 겸 시민기자가 지금 큰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 복싱의 인기를 되살려 보고자 마련한 기획입니다. 한국 복싱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챔피언은 물론 챔피언을 꿈꾸는 유망주를 중심으로 릴레이 인터뷰를 할 계획입니다. '아마추어 선수가 들려주는 복싱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홍수환씨가 아마추어 동호인 경기 결승전이 끝난 후 선수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홍수환씨가 아마추어 동호인 경기 결승전이 끝난 후 선수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이충섭


 왼쪽에서 첫번째가 김태식, 두번째가 이상호씨며 오른쪽에서 첫번째가 김정범, 두번째가 허버트 강씨다. 가운데 홍수환씨가 있다.

왼쪽에서 첫번째가 김태식, 두번째가 이상호씨며 오른쪽에서 첫번째가 김정범, 두번째가 허버트 강씨다. 가운데 홍수환씨가 있다. ⓒ 임해모


11월 27일 홍수환씨의 4전 5기 승리 30주년 기념식이 서울 대치동 스타복싱체육관 본점에서 300여 명의 지인과 팬들이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는 홍수환씨가 1977년 11월 27일 파나마에서 핵토르 카라스키야 선수와 WBA 주니어 벤텀급 타이틀을 놓고 겨루면서 4번 다운된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 결국 이긴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해 열렸다.

오후 6시부터 시작된 행사에서는 4전5기배 아마추어 선수권대회 결승 7경기, 플라이급 한국챔피언 손정오 선수를 비롯한 프로선수 시범경기 5경기, 기념식 및 축하공연이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전 WBA 플라이급 챔피언 김태식·허버트 강·오영호·이상호 등 한국 복싱을 주름잡았던 왕년의 복싱 스타들은 물론 동양챔피언 김정범, 한국챔피언 손정오 등 많은 현역 후배 복서가 참석했다. 또 박미경·장미화·이수미·김씨네 등 연예인들도 와 축하공연을 했다.

이날 행사 직전 홍수환씨와 한 인터뷰를 2회에 걸쳐 싣는다.

 홍수환씨가 후배들의 축사에 이어 답사를 하고 있다.

홍수환씨가 후배들의 축사에 이어 답사를 하고 있다. ⓒ 임해모


- 축하드립니다. 이런 유례 없는 행사를 열게 된 취지는 무엇입니까?
"두말 할 나위 없이 팬들에게 보답하고자 함입니다. 제가 기적처럼 승리한 원동력은 성원해준 팬들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성원해주시는 팬들에게 오늘같은 날을 통해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 핵토르 카라스키야 선수를 초청한 것으로 알았는데 오지 않았군요.
"역시 팬들의 도움으로 카라스키야 선수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는 지금 파나마의 산미겔리토(San Miguelito)시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기업과 관공서에서 강연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 둘의 사연은 인간극장에 나갈 만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하여간, 그 친구에게는 평생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타이슨보다도 더 앞서 세계 최연소 챔피언에 등극하려던 문턱에서 좌절해서는 만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은퇴를 하고 말았습니다. 제 경기 이후로도 몇 차례 경기를 했다가 패하고 말았거든요. 그 선수와 가족들을 초청했고 카라스키야도 휴가까지 얻어놨다고 분명히 전해 들었는데 막판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면서 못 오게 되었습니다. 내년, 내후년이라도 꼭 한 번 초대할 겁니다. 정 안 되면 제가 가도 되죠 뭐."

- 잠시 그 당시로 돌아가 보죠. 파나마에 도착했을 때 뭐가 인상적이었나요?
"왠지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파나마시티 공항에 내렸을 때 공항 건물 옥상에 자동차 한 대가 전시용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게 바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출하기 시작한 현대 포니 자동차였습니다. 참 뿌듯하고 인상적이었죠.

또 하나는 친형이 가게에서 북한제 마사지 오일을 사왔더군요. 파나마는 자유무역항이기 때문에 북한 제품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발라 보니 효능이 좋았습니다. 저희 가족은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월남했습니다. 이것도 왠지 기분전환이 되었습니다."

"하도 건방져서 이기고 싶었다"

- 기자회견장에서 일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상세히 얘기해 주시죠.
"경기 일주일 전에 파나마에 도착해서 바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내 바로 옆에 파나마의 영웅이자 '돌주먹'이란 별명을 지닌 로베르토 두란이 앉았습니다. 당시 두 체급을 석권한 두란은 플로리다에서 경기를 끝내고 고향으로 쉬러 왔다가 기자 회견에 합류한 것이었죠.

내가 앞에 있는 콜라를 집어 들고 마시려 했는데 두란이 갑자기 고개를 살짝 저으며 눈짓으로 마시지 말라는 사인을 보냈습니다. 약이 들어있다는 표시였는지, 그저 경기를 앞두고 탄산음료를 삼가라는 뜻이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두란이 내게 호의를 가지고 먹지 말라는 거였죠. 그의 충고대로 마시지 않았습니다.

두란이 어쨌거나 제게 호의를 보였다는 증거는 경기가 끝난 직후 제 호텔로 직접 찾아와 축하 인사를 건네며 살갑게 안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슈거레이 레너드, 토마스 헌스, 마빈 해글러와 싸우며 한 시대를 풍미한 세계적 철권의 축하를 받았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승리 덕분이었죠. 정신이 없어서 멋진 기념사진 한 장 남겨놓을 생각을 못했네요. 당시엔 정말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홍수환이 첫번째 타이틀을 잃게 된 알폰소 자모라와의 LA 방문 경기 장면

홍수환이 첫번째 타이틀을 잃게 된 알폰소 자모라와의 LA 방문 경기 장면 ⓒ 홍수환



 홍수환씨가 헤비급 시범경기를 치른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홍수환씨가 헤비급 시범경기를 치른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 이충섭


- 경기 당일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파나마 국가가 연주되기 전에 호르헤 루한 선수가 링에 올라서 카라스키야를 격려하더군요. 그 선수는 알폰소 자모라를 이기고 새 챔피언에 등극한 파나마 선수였습니다. 나는 알폰소 자모라에게서 첫 타이틀을 뺏겼고 재도전에서도 그에게 패했습니다. 알폰소 자모라는 제 경기까지 26전 KO승을 달리다가 저와의 12회전 경기 이후 사라테와의 논타이틀전에서 패했고, 곧이어 루한 선수에게 타이틀을 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루한은 제 천적을 꺾어준 선수인 셈이죠. 왠지 그가 고맙더군요.

파나마는 로베르토 두란, 호르헤 루한 등 이미 3명의 챔피언에 이어, 카라스키야까지 무려 4명의 챔피언을 이미 보유한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기자회견이건 경기 전이건 저를 쳐다도 안 보고 무시하는 표정이 역력했죠. 오죽하면 경기 후 내가 인터뷰에서 '자식이 건방져서 이기고 싶었습니다'라고 했겠습니까? 그 정도로 분위기는 압도적이었습니다."

- 4번 다운당할 때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자모라에게 연패하고 3년 간 절치부심 연습해온 게 억울해서라도 이대로 정신놓고 쓰러질 수 없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절대 제정신으로는 못 일어날 상황이었죠. KO로 지는 경우는 의식이 없어지든지, 의식은 있지만 더 이상 싸울 의욕이 없어 일부러 안 일어서든지 둘 중 하나죠. 또 연습량이 부족하면 일어나고 싶어도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관중들 총 쏘며 축제 분위기에 들떠"

- 오늘 시범경기를 한 손정오 선수도 1라운드에 다운된 후에 정신차려보니 8라운드를 뛰고 있더라고 했는데 이런 차원이겠네요?
"그렇죠. 저도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아놀드 테일러를 상대로 첫 타이틀을 획득(1974년 7월 4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하기 전에 박영석 선수와 한국 타이틀전(1974년 4월 20일)을 치를 때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10회에 다운을 당한 후 경기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나중에 경기장면을 TV 재방송으로 보니까 기억도 안 나는 11, 12라운드에서 제가 기가 막히게 잘 싸워서 판정승을 했더군요.

75년 8월 30일 올랜도 아모레스라는 돌주먹이랑 치른 경기도 기억납니다. 1회에 상대의 왼손을 피하면서 라이트 어퍼컷을 날렸고, 조금 뒤늦게 아모레스도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작렬했습니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박중훈과 안성기가 동시에 쓰러지듯이 둘 다 동시에 다운이 되었습니다. 저는 먼저 일어났고 아직 못 일어난 아모레스만 카운트를 했죠. 그 경기에서도 내내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홍수환 선수가 카라스키야를 KO로 눕힌 순간.

홍수환 선수가 카라스키야를 KO로 눕힌 순간. ⓒ 홍수환


 홍수환 선수가 카라스키야를 이기고 WBA 주니어밴텀급 타이틀을 차지한 뒤 김포공항에 입국해 환영 인파들에게 답례를 하고 있다.

홍수환 선수가 카라스키야를 이기고 WBA 주니어밴텀급 타이틀을 차지한 뒤 김포공항에 입국해 환영 인파들에게 답례를 하고 있다. ⓒ 홍수환


- 경기 장면을 보면 4번 다운당한 후 2라운드 끝까지 오히려 홍수환 선수가 더 공격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3라운드에 역전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2회전 끝난 직후 경기장은 흥분의 도가니였죠. 파나마가 당시 최다인 네 명의 세계 챔피언을 보유하게 되는 세리머니만 남았기 때문이죠. 당시 관중석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파나마는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나라라서 기쁨을 못이긴 관중들이 천장으로 총을 쏘아 대며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파나마의 경기장 천장은 구멍 난 곳이 많습니다. 파나마 관중은 모두 서서 3회전을 맞이했습니다. 트레이너인 조순현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수환아. 1회전만 더 뛰고 그만 두자.'

나는 한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말할 기운도 없었으니까요. 3회전을 알리는 공이 울렸습니다. 하지만, 카라스키야보다 더 먼저 뛰어나갔습니다. 경기 장면을 보면 제가 봐도 전사 로보트 같았습니다. 네 번 다운됐다는 기억이 조금도 없는 사람처럼 카라스키야를 향해 돌진하더군요. 저는 말 그대로 장렬한 전사를 원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이기려는 심정을 가질 상황이 아니었죠.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빗발치는 총탄을 향해 달려나가는 군인 같았죠. 이 경기 후 카라스키야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홍수환이 내 펀치력을 의식해서 뒤로 물러날 줄 알았다. 그런데 연신 맞받아쳐서 당황했다. 나는 모든 경기에서 초반에 KO로 이겼는데 막상 치고 들어오니 작전에 혼선이 오고 말았다.'

 행사장을 찾은 가수 박미경씨와 부인 옥희씨

행사장을 찾은 가수 박미경씨와 부인 옥희씨 ⓒ 임해모



 시범경기를 펼친 손정오(흰색), 손경진 선수 (한남체육관 소속), 손정오 선수는 내년 2월1일 뉴욕에서 세계타이틀 전초전을 치를 예정이다.

시범경기를 펼친 손정오(흰색), 손경진 선수 (한남체육관 소속), 손정오 선수는 내년 2월1일 뉴욕에서 세계타이틀 전초전을 치를 예정이다. ⓒ 이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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