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4월 10일, 박건배 해태 타이거즈 구단주는 시즌 첫 경기를 마친 선수들을 모아놓고 불고기 파티를 열어 주고 있었다. 석쇠 위에 고기들이 올려지고, 올해도 지난해처럼 한 번 열심히 해보자는 구단주의 한 말씀을 곁들인 건배 순서도 지나갔다.

이제 고기가 한참 익기 시작했고, 많이들 들라는 손짓과 더불어 구단주가 먼저 한 점 들기까지 했는데도 선수들은 미동도 않고 있었다. 이제 지나치게 익은 고기는 뻣뻣하게 굳어져갔다.

@IMG@
"뭣들 하나, 어서 먹어"

김응용 감독의 목소리가 무겁게 재촉했다. 그러나 젓가락에 손을 대는 선수들은 없었다. 구단주는 헛기침을 하며 땀을 닦아냈다. 이제 불길은 고기를 새까맣게 태우기 시작했고, 연기가 자욱하게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불고기 화형식' 사건이었다. 지난 해 우승을 이루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숙소사정은 더 나빠지고, 메리트시스템도 아예 사라지자 구단에 대해 벌인 선수들의 무언의 시위였다. 구단주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를 일어섰고, 감독의 거친 질책이 쏟아졌다. 그러나 선수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김응용 감독이 그 사건의 주역으로 지목한 것은 김일권이었다. 팀 선수구성의 중심인 군산상고 출신으로 1972년 황금사자기에서 부산고에 4점차로 끌려가다가 9회말에 뒤집은 '역전의 명수' 사건의 주역이었던 고참인 데다가, 지난 십여 년간 가는 곳마다 지도자나 단체와 충돌을 빚어온 그가 아니고는 벌일 수 없는 일이었다고 믿은 것이다.

'군산상고 역전의 명수'에서 '풍운아'로

사실 그의 야구인생은 그야말로 '풍운아' 그 자체였다. 군산상고의 1번 타자 겸 유격수로 뛰면서 '역전의 전설'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은 1972년을 거쳐 이듬해 전국 고교무대 최고의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받으며 3학년 시절을 마감한 그는 곧바로 실업 무대로 뛰어들었다.

170cm 안팎의 작은 체구로 빠른 몸놀림이 특기인 선수였지만, 그는 방망이도 매서웠고 장타력까지도 빠지지 않았다. 한국야구가 사상 처음 국제무대에서 우승을 했던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때도 개최국인 니카라과와의 경기나 미국과 벌였던 결승전에서는 김봉연을 3번, 장효조를 5번에 거느린 채 4번 타자로 기용되었던 것이 바로 김일권이었다.

그래서 실업무대 도루왕은 대개 맡아놓다시피 했지만, 이따금 단기리그에서는 타격이나 홈런 타이틀도 심심치 않게 따내는 그였다.

그러나 실업야구 선수로서 4년째를 맞아야 할 1977년, 그는 갑자기 학업과 야구를 병행하고 싶다며 대학 진학을 선언했다. 고교 동기들이 대학 졸업반에 들어서던 때였다. 소속팀 상업은행이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그는 유유히 한양대학교 77학번으로 등록을 해버리고 만다.

그 해, 만일 그가 갑작스런 대학 진학을 강행하지 않았더라면, 그 해 대학을 졸업하고 실업무대에 데뷔했던 김재박이 역사적인 7관왕을 완성하는 것은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일단 도루왕 타이틀 하나만큼은 원래 주인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과 '항명'의 대표 주자, 프로에 데뷔하다

대학 무대에 데뷔하자마자 그는 어린애 팔 비틀듯 풋내기 투수들의 공을 받아쳐 춘계대학연맹전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군 입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나이였던 그는 1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육군 경리단으로 소속을 바꾸어야 했고, 제대를 하던 80년에는 돌연 복학 대신 실업무대 복귀를 선언하는 변덕을 부리고 만다.

물론 이유 없는 변덕은 아니었다. 제대 한 달을 앞두고 모친상을 겪은 데 이어 결혼을 결심한 그로서는 한가한 학업 대신 당장의 생활을 위한 월급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선수들 발목을 단단히 묶어놓는 걸로 팀 운영의 최우선과제를 삼는 야구팀들은, 실업팀 선수가 대학에 진학할 경우 졸업하기 전에는 다른 팀으로의 이적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실업 선수들이 대학을 매개로 자유롭게 팀을 오가는 길을 막아두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일권은 끝내 복학을 거부하고 야인으로 떠돌았다. 당시 한양대 지휘봉을 잡고 있던 김동엽 감독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IMG@

1980년은 일본 동경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리던 해였다. 두 해 뒤 82년 대회를 서울로 유치해두고 있던 한국으로서는 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일이 절실했고, 대표팀의 외야수 겸 붙박이 1번 타자 김일권은 소속팀도 없이 버티고 있었다.

결국 야구협회는 무적 상태의 김일권을 대표팀에 선발하는 예외적인 조치를 취했고, 그는 그 대회에서 득점과 도루, 두 개의 개인타이틀을 따내며 한국팀의 준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결국 이듬해 복학을 하기는 하지만, 2학년에 올라갔던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되자 마음이 다시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실업팀간의 규정 때문에 실업무대 복귀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새로 생긴 프로팀이라면 가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표선수로 뽑히고도 중간에 숙소를 탈출해 선수자격정지라는 징계를 당했고, 대표팀 복귀를 조건으로 용서를 받고도 또다시 탈출해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해버리는 대형 사고를 연쇄적으로 저지르고 다닌다.

마치 그라운드를 헤집으며 상대팀 내야진을 괴롭히듯, 이탈과 항명을 밥 먹듯 하며 팀과 협회의 골머리를 썩여오면서도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실력 때문이었다. 전국무대 우승 한 번에 목을 매는 학교 팀에서부터 경쟁사 팀을 이겨 그룹 수뇌부를 즐겁게 하는 일에 목을 매던 실업팀, 그리고 국제무대에서의 '국위선양'에 목을 매던 국가대표팀까지 공․수․주를 넘치게 갖춘 선수는 미워도 절대 버릴 수 없는 카드였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1982년 3월 28일, 창단식에 불과 14 명의 선수만을 참석시킬 수 있을 만큼 심각한 선수부족에 시달리던 해태 타이거즈는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롯데 자이언츠에게 2-14로 대파당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고, 유일한 해결책은 이미 대표팀을 이탈해 타이거즈 훈련장에 와있던 김일권의 징계를 풀어내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야구협회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프로야구 정착을 위해 모든 관련단체는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각하'의 지침 때문이 아니라도, 하필 같은 해 치러지는 '단군 이래 최대의 스포츠 행사' 세계 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에 스타급 선수들은 모두 빼앗긴 채 위태로운 첫 발을 내딛은 프로야구의 위기감에 일말의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야구협회는 '국가대표팀 영구제명'이라는 무의미한 단서와 더불어 선수자격을 복권시켰고, 김일권은 3월 31일 청룡과의 경기부터 출장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치러진 팀의 80경기 중 65경기에 나서 .270의 타율과 11개의 홈런을 때려냈고, 무려 53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53개의 도루는 팀당 경기수가 108경기로 늘어난 87년에 가서야 이해창이 한 개 차인 54개로 넘어설 수 있었던 기록이었다.

무조건 뛴다, '대도의 원조' 김일권

@IMG@

프로 시절만 놓고 보자면, 김일권이 특별했던 것은 오직 도루 때문이었다. 물론 1982년에 기록한 11개의 홈런은 김용희, 이종도 같은 다른 팀의 중심타자와 어깨를 나란히 한 리그 공동 7위에 해당했지만, 결국 2할5푼 대의 타율에 28개에 그친 홈런, 3할 대 초반의 장타율로 남은 그의 통산기록을 놓고 보면 두드러지는 부문이 도루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틈만 나면 뛰는 것으로 유명했다. 김재박이나 이해창 같은 당대의 경쟁자들에 비해 턱없이 낮은 타율과 출루율에도 항상 더 많은 도루를 기록했던 것은, 기회가 올 때마다 항상 뛰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투수들도 일단 그가 살아나가면 일단 뛴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알고, 견제구도 던지고 공을 빼보기도 하면서 내야진에 비상을 걸었다. 그러나 그렇게 미리 확정된 상황 속에서도 상대 배터리는 그를 잡아내지 못했고, 사람들은 '역시'를 연발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도루 기록에 쫓기는 스타일의 선수는 아니었다. 도루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기리그가 끝날 때까지 단 3개만을 성공시키고 있던 1984년에도 도루왕이 자신의 것이라는 자신감을 놓지 않고 있었고, 결국 후기리그에만 38개를 성공시키며 3년 연속 도루왕에 올라 장타자들로 치자면 '거포' 쯤으로 비견될 찬사인 '대도'라는 호칭을 그대로 자신의 별명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거침없이 달려가던 그가 처음으로 버림받았던 것이 바로 1988년이었다. 원년부터 3년 연속 도루왕에 오른 것을 비롯해 국내에서 가장 넓은 수비범위를 자랑하며 팀 외야진을 이끌던 그의 위상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1986년부터였다. 2할7푼 대는 유지해주던 타율이 갑자기 1할대로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전공인 도루도 22개로 급격히 줄어들면서 팀 내에서조차 서정환과 이순철에 이어 '넘버 3'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거기다 신인 이순철은 도루뿐만 아니라 외야 수비 능력 면에서도 김일권에게 크게 뒤처지지 않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데뷔 첫 해 3할 대를 치며 10개 이상의 홈런을 뽑아내는 방망이의 매력에서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격정적인듯 하면서도 날카로운 냉정을 잃지 않는 김응용 감독이 칼을 빼든 것이 그 순간이었다. 4년 전, '불고기 화형식'의 괘씸함과 낭패감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의 자리를 얼마든지 비우고도 남을 천재 외야수 이순철을 확보한 그는 이제 실력마저 바닥이 나버린 삼십대 중반의 말썽꾸러기를 과감하게 정리해버렸다.

김일권은 '선수들의 무덤' 태평양 돌핀스로 보내졌다. 맞상대도 없는 현금 트레이드였다. 돌핀스는 전신인 슈퍼스타즈와 핀토스가 그랬고, 훗날 레이더스가 그랬듯 다른 팀의 퇴물들로나마 선수 진을 구축해야 했던 약체 팀이었다. 은퇴를 끝내 거부하던 많은 선수들이 그 팀을 거쳤지만, 결국은 스스로 은퇴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결을 삭이기 위한 시간을 주는 곳일 뿐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8년, 김일권은 주먹 한 개쯤 위로 바짝 올려 잡은 방망이를 들고 나와 프로무대 첫 3할 타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도루도 26개를 성공시키며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선수들의 무덤' 돌핀스에서 이룬 제2의 전성기

트레이드가 일반화되기 이전, 그리고 팀마다 지역 연고의 이미지가 강했던 그 시절, 트레이드는 곧 '버림받음'을 의미했기에 대개의 선수들은 독을 품고 보복의 칼을 갈았고, 그래서 이적 첫 해 반짝 활약을 선보이는 선수들도 종종 있었다.

김일권의 1989년 활약 역시 사람들이 '반짝'으로 이해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9년, 그는 팀이 일으켰던 돌풍 한가운데서 활약하며 그것이 반짝 활약이 아닌 '제 2의 전성기'임을 입증했다. 

1989년, 그의 타율은 2할6푼 대의 '평소실력'으로 돌아왔지만, 무려 62개의 도루를 성공하며 시즌 최다도루 신기록을 갈아 치워버렸다. 타이거즈에서 자신의 자리를 대신한 후배 이순철이 지난 시즌 기록한 58개의 신기록에 다시 네 개를 얹은 기록이었으며, 4년 후 전준호가 75개의 기록으로 넘어서기 전까지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대기록이었다.

항상 최강팀 타이거즈의 선봉에 섰던 그의 발은, 그 해 약체팀 돌핀스의 빈약한 방망이의 몫까지 짊어진 채 큰 걸음으로 달리곤 했다. 그는 진루타 하나도 힘겨운 타선 대신 직접 발로써 한 베이스를 더 확보했고, 상대 수비진의 작은 틈이라도 놓치지 않고 비집어 승리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해주었다.

@IMG@

삼성 라이온즈와 1승 1패로 맞서있던 준플레이오프 3차전, 영웅 박정현이 9회초 2사까지 1실점으로 버티다가 허리 통증으로 쓰러져 실려 나갔던 바로 그 경기 10회말. 선두타자로 나선 김일권은 안타로 출루해 쉬지 않고 도루자세를 취해 투수의 신경을 긁다가 결국 투수가 폭투를 던진 틈을 타 3루까지 내달렸다.

곽권희가 김일권의 태그 업을 대비해 한껏 앞으로 들어 와있던 상대 중견수의 뒤쪽으로 타구를 떨어뜨렸을 때, 김일권은 홈을 밟아 인천 팀 사상 첫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역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 해,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의 신인트리오가 마운드에서 '무실점이면 승리고 두 점 주면 진다'는 외끌이 투혼으로 팀을 3위까지 끌어올렸지만, 김일권이라는 고참 이적생이 보일 듯 말 듯 앞서가며 승리에 꼭 필요한 한두 점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는 이듬해인 1990년에도 역시 48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다시 한 번 도루왕에 오른다. 그의 나이, 그 때만 해도 선수로 환갑 진갑을 다 넘겼다는 서른넷이었고, 그것은 동시대의 경쟁자들인 김재박, 이해창은 물론이고 그 뒤로 이순철, 전준호, 이종범, 정수근 같은 '난다 긴다' 하는 후배들도 결국 이르지 못한 개인통산 다섯 번째의 도루왕 등극이었다. 

야구, 도루, 그리고 김일권

어쩌면 그에게 야구란 일종의 개인경기와도 비슷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항상 주자로 나가서 내야진을 흔들며 타자들의 공간을 넓혔고, 또 그들에게 타점을 올릴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굳이 다른 동료 선수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더구나 감독의 작전과도 별 관계없이 오로지 자신의 두 발과 눈과 감각만을 의지해 내달렸던 그에게 팀워크란 별 필요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능력과 개성은 그가 살아갔던 7,80년대 우리 사회의 단단함과 종종 부딪혔고, 그래서 팬들이 좀 더 가까이에서 그를 보며 기억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것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기 팀 팬들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도 몇 배는 커다란 불쾌감을 상대팀 팬들에게 선물하는 선수. 그래서 결국 떠나보낸 뒤에야 그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선수. 그래서 이제 꽤나 흘러버린 시간 속에서나마 떠올려보면 그를 응원했었건 아니건, 참 대단했다는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선수.

어쩌면 우리는 도루라는 규칙이, 세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이어지면서도 정작 몇 십 분밖에 뛰지 않는 야구라는 정적인 운동을 얼마나 역동적이고 긴장감 넘치게 만드는 지를, 바로 김일권에게서 배웠는지도 모른다. 

김일권 김은식 야구의 추억 프로야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