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워>의 한 장면.

영화 <우뢰매>는 거칠고 허접한 면이 있어도 재미있다. <우뢰매>에 예술적 관점, 혹은 고품격의 영화론을 들이대는 것이 예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욕을 먹는다. 아니 거꾸로 영화 좀 공부했다는 사람이 우뢰매를 극찬하는 것은 자기 할 일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린이 신문에서도 극찬하지는 않는다.

<디워>는 <우뢰매> 수준에서 약간 업그레이드 되었다. 거대 자본에 바탕을 둔 컴퓨터 특수효과와 스토리라인의 보완이 강화되었다고 보면 될까. 사람들이 <우뢰매>에서 기대하는 것은 상상력과 재미 그 자체일 뿐이다. 칸영화제의 수상작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대고 그 영화는 훌륭한 것이 아니라고 훈계하면 짜증이 날 법하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니며 우린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이라고 답글을 달 것이다.

<우뢰매>와 <디워>의 차이

<우뢰매>를 미국에 수출한다고 치자. 그러면 사람들은 '봐줘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하고 주머니를 턴다. 마치 성금을 내듯이 말이다. 이것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주의 문화와는 달리 집합주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또한 사람들은 미국에 수출된 <우뢰매>가 완성품이 아니라 '더 잘하기 위한 수순'으로 생각한다. 영화 소비는 응원과 성원을 상징한다. 여기에 대해 '애국 선동'이나 '바보놀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바보가 될지 모른다.

▲ <우뢰매> 신문 광고.
그런데 단지 <우뢰매> 업그레이드판이 수백만명을 모을 수 있을까? 당연히 영화의 흥행 돌풍에는 영화 외에 다른 심리들이 작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를 의도적으로 마케팅 차원에서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순수한 행동 이면에는 그것을 자기의 목적에 맞게 쓰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어느 공중파 방송사 기자가 인터뷰 요청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어떻게 다루어도 <디워>의 흥행의 수단이 될까 봐 두렵다." 영화와는 상관없는 그 무엇인가가 영화의 흥행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황희 정승이 <디워> 논쟁을 보면 다 맞다고 할 것이다. 찬반 논쟁은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있다.

부정적인 차원에서 배우들의 연기와 장면 설정·플롯이 거친 점은 영화의 초벌구이 느낌을 강하게 한다. 여기에 이무기 설화의 독특성과 한국적 용의 실현, 괴수 영화에 멜로적 요소를 가미하고 아리랑을 변주한 것은 가능성의 확인이었다.

이러한 지적조차 부족하다. 많은 분석거리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는 반드시 긍정적인 측면만은 아니다. 그런데 자신이 보고자 하지도 않는데 보게 만드는 그 무엇에 대해 주목하고 싶다.

즉 의무감을 통한 영화의 소비가 과연 의무감이 목표로 하는 것을 이루어낼 수 있을지 의문인 점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이미 판을 읽고 있던 사람들의 예측 안에서 이용되었다.

<괴물>과 <디워>의 공통점

영화 <괴물>과 영화 <디워>는 매우 닮았다. 모두 괴수 영화라는 점이 닮기도 했다. 그러나 '쳐부수어야 할 괴물'과 '승천하는 용'을 같은 괴수라는 범주로 같이 묶기에는 무리가 있다. 개봉 4일 만에 200만을 돌파했다는 점에서만 닮은 것은 아니다.

두 영화는 모두 쏠림 현상의 징후였다. <괴물>은 문화적 쏠림과 편식을 의미했다면, <디워>는 의무감적 쏠림 현상의 징후였다.

두 영화는 모두 한국인의 문화적 심리가 마케팅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 작품이었다.

<괴물>은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해외 평가 선망 심리와 전문가의 심리를 활용해서 초반 흥행의 기선을 잡았다. 한국의 상징 한강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한 해외의 높은 평가는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물론 이것은 철저한 계산된 마케팅 덕분이다.

여기에 <괴물> 자체는 전문가들-전문 기자와 평론가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아주 골고루 심었다. 좋은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해외 평가와 전문가, 그리고 '봉준호식 괴수 오락 영화'라는 대중적 코드를 통해 초반에 승기를 잡아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쉽게 인지할 수 있는 오락 영화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한 기획과 마케팅의 승리였다. 쉽게 이해된다고 모두 좋은 작품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물론 본 사람들은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하며 우쭐했고, 이후에는 다른 이들은 재미없는데도 보아야 한다는 강박 심리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 <디워(왼쪽)>과 <괴물>의 포스터.
<디워> 흥행의 세가지 열쇠

이러한 '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적 심리는 <디워>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디워>는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문화 심리를 잘 활용했다.

하나는 미국 즉, 해외에서 인정받으려는 심리다. 이는 <디워>가 미국의 1500개 극장에서 개봉한다는 사실에 흥분했던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한 주에 30여개가 대단한 것인지는 다시금 물어야 한다. 이는 처음부터 적극적인 홍보의 대상이었다.

다른 하나는 약자에 약한 심리다. 한국인들은 강대국 사이에서 어렵게 살아와서 그런지 약자에 약하다. 고생한 사람의 눈물에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그에 따라 도와주어야 한다는 심리가 형성된다. 갖은 고생과 핍박을 받으며 하나의 올곧은 일을 이루려는 사람에게 지지를 보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적 심리가 생겨난다.

따라서 <디워>는 '보아주어야 하는 영화'가 된다. 이 과정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판단이 나온다. 강자와 약자다. 주류 영화계와 전문가는 강자, 그것에 당한 심형래 감독은 약자가 된다. 따라서 '약자는 선, 강자는 악' '<디워> 옹호는 선, 반대는 악'이 된다. 심형래 감독의 인생역정에 감정이입이 되는 순간 이른바 '심빠'가 된다면 더욱 이러한 강도는 커진다.

여기에 바로 세 번째 심리가 가세한다. 전문가 집단에 대한 대중적 불신을 상징한다. 흥행에 항상 대중을 가르치려드는 전문가 집단에 대한 알 수 없는 증오심은 적절하게 활용되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증오심'의 대상인 전문가 집단의 실체가 없다. <디워>에 대해서 극단적인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작심하고 비판한 글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많은 것 같지만 막상 찾아보면 없다.

거의 유일한 이송희일 감독의 견해도 어느 매체에 공식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블로그에 올린 글이 포털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확대 재생산했던 것이다. 논쟁을 붙일수록 포털이나 영화제작사·배급사는 손해볼 일이 없다.

네티즌이 미워하는 '전문가 집단'... 어디 있지?

왜 거의 없는 것일까? 영화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디워>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었다. <디워>를 다루는 것 자체에 대해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자신의 이미지가 손상된다고 여겼다. <우뢰매>에 평론을 쓰는 전문가는 없었다. 그것이 심형래 감독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실체가 없을 때 논의는 가상의 적을 설정하고 이루어진다. <디워>를 둘러싼 이분법적인 접근에서 실체 없는 '허수아비 전략' 이 다시금 먹혀들어가고 있다고 보게 된다. 이송희일 감독은 이무기(<디워>)의 승천을 위한 희생양이었다. 의도와는 관계없이 여의주인지 모른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잘못되었다고 여긴 점을 표현한 것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물론 전문가 집단이 잘못한 점도 있다. 알 수 없는 영화 계보와 용어들을 통해 자신들의 영화 제국이 전부인 것처럼 사람들의 기를 죽이면서 행세하는 것으로 보였다. 오락 영화는 저급한 것으로 여기는 심리가 그러하다.

더구나 영화를 포함한 작품은 자신이 어떻게 보았는지가 중요하다. 만약 자신이 재미있고 의미있게 보았는데, 그것을 가치 없는 쓰레기라고 한다면 좋아할 사람은 하나 없다. 이것이 <디워> 혹평에 대한 집단적 반발의 한 요인이다.

▲ <디워> 할리우드 촬영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심형래 감독.
ⓒ 영구아트
그러나 이러한 것들조차 영화 자체에 대한 논의들은 아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다시금 강조할 것은 마케팅 전략의 철저한 승리였다는 사실이다. 한국 영화를 위해, 일관되게 '의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위해 보아주어야 한다'는 심리가 의무감으로 작용하면서 <디워>의 흥행 승기를 잡아주었다.

이는 '의무감적 쏠림' 현상이다. 의무감적 쏠림 현상은 사실을 보지 않게 하고 당위만을 보게 만들며, 그것을 선으로 만들어 절대화하게 만든다. 더구나 한국에서 대성공을 한 작품들이 자신의 필요와 요구가 아니라 의무감의 산물이라면 장기적으로 문제가 크다. 그러한 한국내 흥행 작품들이 해외에서 성공을 못하면 한국 흥행작들에 대한 불신감이 커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곰'은 되지 말자

누구나 영화에 대해서 다양한 논의를 할 권리는 있다. <디워>에 대해서 사람들이 옹호하고자 했던 것은 한국만의 상업 오락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 지독하게 작용하는 편견에 저항하고자 했던 점이다. 문화 나아가 영화의 다양성과 장르적 특성을 인정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는 심리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디워>에 반대하면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도리어 영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가로막는다.

어설픈 영화는 어설픈 영화다.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만을 극대화하는 것은 부정적인 점만 극대화 하는 평론이나 다를 바가 없다. 쓴 소리는 진보를 위한 것이지, 아예 죽여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지 않나.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이 마케팅 전략이 아닐까 생각하면, 극단적 이분법이나 괴수 영화보다 더 살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게임 안의 인형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지금의 논쟁이 좋은 영화가 탄생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터이다. 그렇지 않고 마케팅 전략에 소모품이 된다면 그야말로 곰은 재주가 넘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꼴이다. 우리는 모두 곰이 되지는 말았으면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데일리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08-07 12:57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데일리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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