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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웃음기 많은 영화 <목포는 항구다>로 데뷔한 김지훈 감독의 신작영화 <화려한 휴가>가 요즘 장안의 화제다. <화려한 휴가>는 근자에 개봉된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와 함께 다소 침체되었던 한국영화의 부흥을 알리고 있다.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을지 예측하려는 문화부 기자들의 계산이 분주하다. 어디 숫자만 문제겠는가. 1980년 전두환, 노태우로 대표되는 신군부의 권력욕이 만들어낸 참혹한 학살 드라마이자 그것에 맞선 피맺힌 저항과 투쟁이 <화려한 휴가>의 근간이다. 영화로 만들기에는 참으로 무겁고 너무도 가까운 과거사 광주항쟁. 대구 출신에 나이 서른일곱인 영화감독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과연 그는 세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든 것일까. [신애의 고통] 살아남은 자의 슬픔 껑충한 키에 깡마른 신애의 가늘고 긴 손이 온통 피로 뒤범벅되어 있다. 하얀 간호사 복장 곳곳이 선혈로 낭자하다. 믿기지 않는 눈길로 떨리는 두 손을 들여다보는 신애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역력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신애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말한다.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간호사의 직분은 의사와 함께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극한상황에 처한다면 간호사나 의사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영화 <화려한 휴가>는 이런 질문에 아주 쉽게 대답한다.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묻는다. 그런 극한상황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고. 무엇 때문에 믿음이 강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신애가 살인을 저질러야 했는지 묻게 되는 것이다. 모두 환하게 웃는 결혼식 축하사진에 굳은 얼굴이 하나 있다. 신애다. 신부가 웃으면 딸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웃지 않는 것일까. 얼굴을 잘 들여다보면 그 때문은 아닌 듯하다. 하얗고 정갈한 이마에 시름이 가득하고, 눈가에는 깊은 슬픔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천연색 사진은 점차 흑백으로 변해가지만 신랑신부는 여전히 다른 표정으로 남는다. [가족들의 항쟁] 왜 그들은 총을 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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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에서 항쟁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족으로 얽혀 있다. 민우와 진우 형제, 흥수와 신애 부녀, 인봉과 그의 처자가 그렇다. 예외가 있다면 김 신부와 정 선생이다. 나주댁과 그녀의 아들 창수, 용대와 그의 어머니도 그렇다. 관객에게 보이지 않지만 창수와 용대 어머니는 실제 인물과 똑같은 비중으로 광주항쟁의 의미를 일깨운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주인공들을 평범한 소시민이나 정직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으로 설정한다. 택시운전사, 간호사, 백수건달, 고등학생 등과 같은 일반시민이 겪은 '그날의 광주'를 그려낸다는 말이다. 영화에서 우리는 시대의 어둠과 정치군인들의 광기 때문에 고통 받고 번민하는 지식인이나 활동가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실제 사건의 배후에 있다. 그들은 가족인 동시에 서로 가까운 인간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항쟁의 내용과 형식은 더욱 절실하다. 따라서 영화의 강점은 '왜 그들이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하는 문제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반면에 그와 같은 관계설정은 <화려한 휴가>의 아킬레스건이다. 조밀한 관계에 함몰되어 확장된 광주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예외가 있다. '별 다방' 미스 리를 사랑하는 '제비족' 용대다. 하는 일 없이 떠도는 용대는 인봉과 함께 영화 <화려한 휴가>의 우울한 중압감을 완화한다. 용대는 광주항쟁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났음을 알린다. "양아치가 인간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항쟁으로 확장된 사회관계 속에서 진정한 민주시민으로 다시 태어난 용대. [태극기의 물결] 차고 넘치는 태극기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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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옥상에 젊은 사내가 홀로 서 있다. 택시운전사 민우다. 소란스런 아우성 속에서 그는 국기게양대에 조기를 올린다. 태극기 위에 검은 천을 매단 조기가 바람에 나부낀다. 성당의 김 신부가 말한다. "조기를 올려야지. 광주 전체가 초상집인데, 조기가 있어야지." 도청 앞에 쭉 뻗은 길을 내려다보는 민우의 얼굴에 깊은 슬픔과 말 못할 상념이 서려 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는 나이 든 관객들에게 낯익은 장면이 여럿 등장한다. 무엇보다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태극기가 그것이다. 총탄에 맞아 거리 곳곳에 함부로 널브러진 시신들 주변에 피에 젖은 태극기가 있다. 수많은 주검을 안치한 강당의 관마다 태극기가 덮여 있다. 시위대가 들고 있는 수많은 태극기도 영화화면 가득 넘실댄다. 왜 그런가?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1970~80년대에는 매일 오후 여섯 시에 국기하기식을 거행했다. 무엇을 하고 있든지 사람들은 국기를 향해 걸음을 멈췄고,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국기하기식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전개되는 영화 속 사건을 보면서 관객은 끝없이 전율한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장면에 치를 떨다 못해 끝내 눈물과 한숨을 토해낸다. 가두방송을 하고 다니는 신애의 군용 지프에도 태극기는 어김없이 휘날린다.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절규하듯 흐느끼는 신애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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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죽어간 전사들을 기억해달라는 신애의 절규는 모든 이를 향한 것이다. 광주항쟁은 27년 전 사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고 신애는 목 놓아 외친다. 그날의 태극기가 우리 곁에 여전하듯, 광주항쟁의 기억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고! 항쟁이 불러온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하고 계승하자고! 그것이 광주항쟁 때 스러져간 영령을 위한 길이라고! [그들의 외침]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화려한 휴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어휘는 폭도다. 사전적으로 살핀다면 그것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가담한 자들의 무리를 뜻한다. 그러니까 영화의 주인공들이 폭도라면 우리는 광주항쟁 대신 광주폭동이라 불러야 한다. 몇몇 특정지역과 희한한 인간들을 제외하면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광주항쟁을 폭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끝까지 폭도에 초점을 맞춘다. 다시 말해 1980년 5월 광주를 위대한 민주 성지이자 해방구로 만든 항쟁은 결코 폭동이 아니었다는 점을 계속 말하고 있다. 왜 이런 당연한 명제를 감독은 영화의 중심에 놓고 있을까. 어째서 그는 27년 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아니라, 너무도 빤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일까. '지구는 둥글다'와 같은 공리처럼 자명하기 때문에 모든 이가 받아들이는 명제를 의심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의심함으로써 더욱 명확한 논리와 판단을 얻기 위해서다. 이때는 공리의 반대논리가 쓸모 있다. 민우가 소리 높여 외치는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를 다른 말로 바꿔보자. 그러면 "우리를 폭도로 몰아간 너희가 바로 폭도이자 반란군이다"가 된다. 이렇게 보면 영화 <화려한 휴가>는 1980년 5월에 그대로 정지해 있다. 27년 동안 진척된 시간과 역사의 흐름이 멈춰버렸다는 이야기다. 반대로 그것은 <화려한 휴가> 이전에 광주항쟁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드라마 <모래시계>도, 장선우의 황당한 영화 <꽃잎>도, 이창동의 <박하사탕>도 광주항쟁의 옆구리만 긁었을 뿐이다. 이제 광주항쟁에 대한 본격적인 영화가 나올 때가 아닌가 한다. <화려한 휴가>에서 밝히지 못한 발포 주역과 학살원흉,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는 피해자들의 수효, 진압군이 복용했다는 최음제와 같은 약물의 존재, 헬기를 동원한 가공할 민간인 학살. 이런 것들과 아울러 항쟁 당시 미국의 구실과 광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의 침묵까지 되짚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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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맺음말 영화관은 웃음과 눈물, 한숨과 절규의 도가니다. 10대부터 나이 든 세대까지 관객들은 정신없이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천만이 넘게 본 영화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관객들은 이렇게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먼 옛날의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강했다. 하지만 <화려한 휴가>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불과 한 세대 전에 대한민국 전체를 발칵 뒤집어버린 전대미문의 학살극이자 눈물겨운 항쟁의 기록이 이제야 대중의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영화의 몇 가지 결함, 이를테면 군데군데 어긋난 배우들의 분장이나 간호사 호칭, 5월에 너무 웃자라버린 벼나 초라한 규모의 엑스트라를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 고등학생 진우의 긴 머리를 탓하는 사람도 있다. 옥에도 티가 있다. 너그럽게 보아주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좋겠다.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처절하고 장렬했으며 구슬펐던 광주항쟁. 이제 <화려한 휴가>가 사건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초입을 안내하는 이정표 하나를 세웠다. 27년을 참았던 우리가 기다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더욱 성숙하고 전진하는 광주항쟁 영화가 속속 찾아오기를 기원한다.

광주항쟁 화려한 휴가 신군부 폭도 김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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