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로 줄임)가 왔다. 그리고 갔다.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남겼다. 큰 바람이 불었고 여전히 나뭇잎은 흔들린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유일 텐데, 아무튼 그들이 떠나간 뒤의 풍경이 한가롭지는 않다.

천문학적인 수치는 말할 것도 없다. 지난 해 4월 맨유와 향후 4년 동안 1천 억 원이 넘는 스폰서 계약을 한 미국 금융기업 AIG의 마틴 설리번 회장은 "잉글랜드 팬이 아니라 아시아 시장에 대한 투자"라고 했는데, 아무튼 그런 맥락에서 이번 투어가 진행되었다.

워낙 천문학적인 흥행 수치라서 조금은 '현실적인' 수치도 필요한데, 이를테면 지난 20일 맨유와 FC서울의 경기 때 서울월드컵경기장 내의 편의점 'GS 25'는 2억 5천만 원이라는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대형 할인점의 하루 매출과 맞먹는 액수. 그것도 경기 전후 약 다섯 시간만의 결과. 당분간 유럽 빅 클럽의 아시아투어는 계속될 것이다.

▲ 맨유의 공격수 루니가 fc 서울의 최원권 선수를 제치고 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 정윤수
그런데 우리 모두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은 맨유의 방한 시기에 '2007 피스컵'이 열려 볼튼 원더러스(잉글랜드)도 왔고 올림피코 리옹(프랑스)도 왔으며 브라질의 명문 클럽 SC 인터나시오날도 방한하여 대전과 창원에서 평가전을 치렀다는 점이다. 저마다 계기는 다르지만 어쨌거나 유럽과 남미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클럽이 방한하여 K-리그의 여러 구단과 경기를 치렀으므로 잠시 복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

우선 중요한 것은 맨유를 비롯한 여러 팀들이 저마다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갖고 방한하였고 그에 걸맞은 경기를 제대로 펼쳤다는 점이다. 이를 상대한 K-리그 팀들이 목적 없이 그저 90분을 소화했다는 말이 아니라, 과거와 달리 해외 클럽들이 '친선'보다는 내실 있는 경기를 펼쳤다는 얘기다.

▲ 볼튼 원더러스의 공격수 아넬카 선수가 라싱 상탄데르 수비수를 뚫고 슛을 차고 있다.
ⓒ 정윤수
볼튼 원더러스의 특급 공격수 아넬카. 그는 지난 17일 고양종합운동장에서 벌어진 라싱 산탄데르와의 경기에서 두 골을 넣어 팀을 결승전으로 이끌었다. 원래 전반만 뛰고 교체될 예정이었지만 0-1로 뒤지자 후반전을 자청하여 분전한 끝에 두 골을 넣었다. 축구화 크기가 맞지 않아 관계자들이 압구정동과 동대문을 샅샅이 뒤져 제공한 노고에 큰 보답을 했다.

두 차례에 걸쳐 대전 시티즌과 경남 FC를 상대로 경기를 한 브라질 클럽 SC 인터나시오날의 젊은 선수들도 빗속을 질주하였다. 현지 리그 일정과 세계청소년대회 등으로 1진이 빠졌지만 그들은 두 팀을 상대로 네 골을 가볍게 터트렸다. 걸음마를 떼고 나면 곧바로 공부터 찬다는 브라질의 유전자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 fc 서울의 곽태휘 선수가 루니 선수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 정윤수
그리고 맨유 선수들이 질주하였다. 우리 모두가 목격하였다시피 그들의 리그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투어'에 가까운 움직임이었지만 그럼에도 루니와 긱스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 만약 FC 서울의 젊은 선수들이 좀 더 열심히 뛰었다면 그들은 한걸음 더 뛰었을 것이다. 너무 일찍 골을 먹지 않고 완강하게 버텼다면 그들은 '또 한 판의 바둑'을 향해 집중하였을 것이다.

전반전의 공 다툼 끝에 FC 서울의 곽태휘와 루니는 '친선' 경기치고는 조금 심한 신경전을 벌였는데, 물론 권장할 만한 일은 결코 아니지만, 어떤 점에서 그 장면은 루니의 공격 본능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나는 곽태휘 선수가 후반 3분에 공격에 가담하여 헤딩 슛을 시도한 장면과 더불어 바로 이 장면에서 성질내고 돌아서는 루니를 돌려 세워 거칠게 항의한 곽태휘 선수를 격려하고 싶다. 패해도 상관없는 경기에서 FC 서울의 젊은 선수들이 너무 주눅 들었던 것이다. 일주일에 2억원 가량을 버는 선수도 '한번쯤 거칠게 다뤄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체력 담당 트레이너가 지켜보는 가운데 맨유 선수들이 경기 종료 직후 몸을 풀고 있다.
ⓒ 정윤수
아무튼, 경기 외적으로 아주 인상 깊었던 것은 하프 타임과 경기 종료 직후의 장면이다. 하프 타임 때 호날두는 소매 없는 붉은 셔츠 차림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흰색 경기복이 아니라 소매 없는 셔츠를 입었다는 것은 후반전에는 뛰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락커룸에 들어가 쉬지 않고 하프 타임 내내 몸을 풀었다. 반 데 샤르 골키퍼도 몸을 다 푼 다음에야 사라졌다.

경기 종료 후에도 비슷한 모습이 보였다. 후반전만 뛴 스콜스나 긱스도 소매없는 빨간 셔츠로 갈아입고 몸을 풀었다. 그것도 내키는 대로 대강 팔다리를 흔들고 마는 게 아니라 체력 담당 트레이너의 주문에 따라 시간을 재가면서 몸을 풀었다. 순간적인 전력 질주와 가벼운 뛰기, 그리고 잔디에 앉아 다리 근육을 풀어주는 행동을 반복했다. 전후반을 모두 소화한 실베스트르는 아예 축구화를 벗고 맨발로 그라운드를 두 세 바퀴 쯤 돌았다.

▲ 경기 종료 직후 맨유의 실베스트르 선수가 맨 발로 가볍게 달리기를 하고 있다.
ⓒ 정윤수
이 광경은 그야말로 '작은'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90분을 뛰었으니 어떤 선수든지 몸을 풀 것이다. 굳이 그라운드가 아니라 락커룸에 가서도 긴장된 근육을 어루만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06년 6월, 터키 선수들도 경기를 마친 뒤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는 중에도 모두가 둘러앉아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을 본 적 있다. 부산 아이파크의 앤디 애글리 전 감독과 경남 FC의 박항서 감독도 가급적 경기 직후에 가벼운 몸풀기를 지시한다.

맨유만의 전매특허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작은' 차이가 큰 결과의 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작은 차이가 합쳐지면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벽이 되는 것이다.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쪽보다는 경기 직후에 반드시 몸을 푸는 팀이 경기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있어 보다 치밀할 수 있는 것이다.

▲ 2004년 6월 한국 대표팀과 경기를 마친 터키 대표팀 선수들이 경기 직후 그라운드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 정윤수
맨유는 지난 4월 말에 데이비드 길 사장을 중심으로 한 사전답사 팀이 내한하여 경기 스폰서십, 의전, 이벤트, 숙소, 경기장 등을 확인한 바 있고 그러한 준비에 따라 이번 3박 4일 일정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경기 종료 직후의 몸 풀기도 그 계획의 일환이라고 하면 과장이지만, 어쨌든 그런 작은 차이들을 줄이거나 K-리그 나름의 환경과 정서에 맞게 생산해 나가는 것이 소중한 과제다.

이와 관련하여 축구 전문기자 조건호 씨가 볼턴 원더러스의 게리 스피드와 가진 인터뷰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지난 12일 성남 일화와 볼턴 원더러스의 피스컵 개막전이 끝난 후 게리 스피드는 ""이곳에서는 그라운드 밖에서의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프리미어리그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축구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축구 이외의 일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때도 있는 듯하다. 오늘밤도 축구는 두 번째 순위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축구장을 처음 방문한 게리 스피드의 발언은 개막전 당일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대한 단편적인 인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가장 격렬한 경기장인 프리미어리그에서 521 경기 출장 대기록을 갖고 있는 백전노장의 직관을 외면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의 직관을 빌리자면, 여전히 K-리그는 기업의 홍보용이거나 팬은 두 번째 요소이거나 지역성 강화는 먼 훗날의 일일 뿐이다.

▲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호날두 선수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정윤수
맨유는 중국을 거쳐 그들의 경기장으로 돌아갔다. 올림피코 리옹도 우승컵을 안고 귀국하였고 SC 인터나시오날의 젊은 선수들도 아시아 클럽의 이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브라질로 돌아갔다. 그들은 그들의 단기적인 목표를 이루고 돌아갔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들과 겨룬 FC 서울, 성남 일화, 대전 시티즌, 경남 FC 등도 큰 소득을 거뒀다. 빅 클럽과의 경기는 잊을 수 없는 연애의 첫 경험처럼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SC 인터나시오날을 상대한 경남 FC의 박항서 감독은 팀 전력의 절반인 까보레와 뽀뽀를 동시에 기용하지 않을 때를 실험해 봤고 수비의 핵심인 산토스가 결장했을 때를 대비한 연습도 해봤다.

그러나 맨유를 비롯한 여러 팀들이 남긴 흔적은 그 이상이다. 그저 빗자루로 쓸어야 할 부스러기들이 아니다. 정확한 매치 포인트 설정과 그에 따른 합리적인 운영, 팬을 중심으로 한 이벤트 그리고 무엇보다 심판의 휘슬이 울리면 그 어떤 경기외적 요소도 모조리 잊고 90분 동안 경기에 몰입하는 열정은 소중한 경험이다. 그야말로 축구장은 넓고 할 일은 많다.
2007-07-25 08:56 ⓒ 2007 OhmyNews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K리그 축구 프로 스포츠 볼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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