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구의 기원

축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나무나 가죽, 파피루스로 만든 공을 찼었고, 그리스 시대의 ‘에프스키로스’나 로마 시대의 ‘하르파스툼’은 오늘날 축구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는 기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편 고대의 아즈테카나 마야 문명을 일군 사람들 역시 태양을 본뜬 고무로 만든 공(페로타)을 손을 사용하지 않고 다루는 게임을 했으며, 고대 중국에서는 병사를 훈련시키고 투지를 키우기 위해서 축국(蹴鞠)이라는 게임을 실시했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이렇듯 발을 사용하여 둥근 모양의 물체를 다루는 게임은 예로부터 세계 각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축구가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국에서는 축구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 앵글로 색슨족의 영국 주민들이 침략자였던 덴마크 사람(데인족)을 몰아낸 후에, 죽은 데인족 병사들의 두개골을 파내서 차고 놀았다.

이것이 축구 경기의 기원과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까닭은 축구라는 스포츠가 우아한 귀족의 스포츠가 아니라 투쟁과 싸움의 역사 속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천년 전, 앵글로 색슨족과 데인족의 악연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 영국 땅에 정착한 앵글로 색슨족은 여러 나라로 분리되어 서로 대립 항쟁하다가 기원 8세기경 일곱 개의 나라로 정리되었다. 8세기 후반 무렵 아직 강력한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앵글로 색슨족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그 외부의 강력한 적은 바이킹의 한 부류인 데인족(Dane)으로 오늘날의 덴마크인의 조상이었다.

8세기 말부터 잉글랜드를 공격하기 시작한 데인족의 존재는 당시 앵글로 색슨족에게는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9세기에 접어들면서 데인족의 침략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전개되고 있었지만, 앵글로 색슨은 내부적으로 분열된 상태로 데인족의 약탈과 살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데인족의 침략에 대해서 더 이상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앵글로 색슨족의 자존심은 웨섹스의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 849-899)의 등장으로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알프레드 대왕은 바이킹(데인족)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방어체계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주요 전략지에 요새를 세우고 부대를 재편하였다. 878년 굿트룸(Guthrum)이 이끄는 데인족을 윌트셔(Wiltshire)의 에탄던(Ethandun) 전투에서 이들을 궤멸시킨 알프레드 대왕은 886년 런던과 그 인근 지역을 탈환하였다.

 에섹스의 알프레드 대왕, 데인족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앵글로 색슨족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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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영국 영토의 남서쪽은 알프레드가 북동쪽은 데인족이 차지하는 협약을 맺었고, 알프레드 대왕의 존재는 데인족으로 하여금 더 이상의 침략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비록 데인족을 막는데 성공했다고 하지만 이후 앵글로 색슨족으로서는 데인족이 차지한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숙원 사업 중의 하나였다.

1002년 에섹스의 에설레드 2세(Ethelred II, 979-1016)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무모하게 데인족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였다. 이 싸움에서 당시에 덴마크-노르웨이 왕으로 북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던 스웨인(Sweyn Forkbeard)의 여동생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에설레드 2세, 영국 역사상 무능한 왕 중 하나로 데인족의 침략의 빌미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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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마크의 Sweyn Forkbeard왕, 갈퀴 턱수염이란 별명을 갖고 있으며 영국 점령을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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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인은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의 전사들을 소집해서 대대적으로 영국을 침공하였고, 이 침공 때 캔터베리 대주교를 학살하기도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확대되자 겁을 먹은 에설레드 2세는 이들에게 맞서는 대신 금을 주어 달래기로 하고,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걷었는데, 이것이 '데인겔트'(Danegeld)이다.

쉽게 돈을 버는 데 맛을 들인 데인족들은 이후에도 수시로 영국으로 건너왔다. 1014년, 스웨인이 두 번째로 대대적인 영국 원정을 감행하였는데 이 원정에서 스웨인이 전사하고 그 뒤를 카누트 대왕(Canute the Great)이 이어받아 영국 정복 전쟁을 계속 수행하게 된다.

 스웨인의 아들로 영국을 점령한 카누트 대왕(Canute the G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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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누트 대왕은 1014년 잉글랜드 정복 때에 전사한 덴마크 왕 스웨인 1세의 둘째 아들로 부친의 뜻을 이어 데인족을 이끌고 1016년 잉글랜드를 침입하였다. 이로써 데인족과 앵글로 색슨족이 영국의 지배권을 놓고 한바탕 운명의 결전을 치르게 되었다.

당시 앵글로 색슨의 왕은 에셀레드 2세의 아들로 1016년 4월에 즉위한 스물두살의 젊고 패기가 있는 에드먼드 2세였다. 에드먼드가 이끄는 군대는 카누트의 군대를 몇 번 패배시키며 사기가 올라 있었다.

1016년 10월, 에드먼드 2세는 에섹스(Essex)에서 적을 곤경에 빠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 당시 데인족의 함대는 크라우츠(Crouch) 강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에드먼드에게 길이 막힌 카누트는 함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금의 Canewdon 마을이 있는 언덕에 진지를 세웠다. 서쪽으로 3km 떨어진 Ashingdon 언덕에는 데인군보다 많은 에드먼드의 군대가 사기가 충천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18일 아침 두 군대는 서로가 주둔하고 있는 언덕을 내려가 전투를 위해 행군하기 시작했다. 먼저 공격을 가한 것은 앵글로 색슨이었다. 곧 전투가 시작되었고 한창 전투에 바쁘던 에드먼드 2세는 곧 에드릭(Edric)의 군대가 전투에 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드릭은 1년 전 데인족에게 붙었던 변절자로 전투 직전 에드먼드에게 돌아왔는데 그가 다시금 에드먼드 2세를 배신한 것이다.

 에드먼드 2세, 카누트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패하고 부상당하여 죽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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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릭의 배신으로 병력에서 우세를 차지한 데인군은 앵글로 색슨군을 포위했고 에드먼드 2세는 간신히 포위망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지만 큰 부상을 입은 에드먼드는 11월 마지막 날에 죽고 그의 왕국은 카누트의 것이 되었다. 에드릭은 카누트로부터 잉글랜드의 사분의 일을 통치할 수 있게 허락받았지만 그는 다음해 런던에서 살해되어 시체는 성벽 밖으로 버려졌다.

에드먼드를 제압한 카누트 대왕은 1016년 영국의 전토를 점령하고 잉글랜드의 왕에 즉위하였다. 1018년 형 해럴드(Harald II, 1014-1016)의 사망으로 덴마크 왕위도 상속하였다. 1028년에는 노르웨이 및 스웨덴의 일부를 정복하여 영국으로부터 스칸디나비아에 이르는 일대 해상제국을 건설하였다.

카누트 대왕이 사망한 뒤(1035년) 아들들의 왕권 쟁탈에 의하여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급격하게 와해되었고, 제국은 분열되었다. 이러한 틈을 타서 앵글로 색슨 족은 노르망디 지역에서 자란 에드워드 3세를 본국으로 불러들여 1042년 데인 족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에드워드 3세, 앵글로 색슨족은 데인족이 영국땅에서 철수한 뒤에 노르망디에 피신해 있던 그를 불러들여 왕에 오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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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 후, 영국과 덴마크의 악연

서두에 말한 바와 같이, 데인족을 몰아낸 앵글로 색슨족은 죽은 데인족의 두개골을 파내서 발로 차면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원시 축구의 모습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오랫동안 데인족의 침략과 지배를 받으며 민족적 자존심을 구긴 앵글로 색슨족으로서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서는 성이 차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비록 영국 땅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한때 영국을 점령했던 데인족으로서는 그러한 앵글로 색슨족의 행동이 좋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축구가 영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영국은 축구의 종주국으로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근대 올림픽이 시작되고 축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을 때, 축구로 영국에 대항할 수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에 감히 도전장을 던질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덴마크였다.

덴마크는 축구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본다면 영국과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나라다. 축구가 세계적인 스포츠로 발돋움하던 초기 축구의 역사 속에는 영국과 덴마크 사이의 역사적인 긴장관계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침략과 지배를 받았던 영국의 역사적 경험과 강력한 해상제국을 건설했던 데인족의 후예인 덴마크는 초기 축구 역사 속에서 묘한 라이벌을 형성할 수 있는 좋은 이유를 서로가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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