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과 강정 해군기지 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비념> 포스터

제주 4.3 사건과 강정 해군기지 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비념> 포스터 ⓒ 인디스토리




"1948년 3월 제주도에는 전례 없이 많은 올챙이 때문에 소와 말들이 물을 먹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연못의 물은 길 위로 넘쳐나기 시작했고 길가에는 허옇게 올챙이들과 시체들이 널렸다."(영화 <비념> 오프닝 중에서)

지난 2013년 4월 3일 개봉한 임흥순 감독의 영화 <비념>은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4.3 사건 피해자 유족 중 한 명인 강상희 할머니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비념>은 강상희 할머니를 비롯한 여러 피해자와 유족, 4.3 사건을 피해 일본으로 피신한 재일교포 할머니들의 인터뷰를 거쳐 강정마을에 세워진 제주 해군기지 반대 투쟁 현장까지 이어진다.

<비념>의 프로듀서인 김민경씨의 외할머니인 강상희 할머니는 결혼한 지 몇 년만에 남편 고(故) 김봉수씨를 잃었다. 강상희 할머니뿐만 아니라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4.3 사건으로 가족과 친지를 잃거나 억울하게 희생당했다. 제주도민의 상당수가 4.3 사건의 피해자, 유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 할머니는 지금도 잠자리에 녹슨 톱을 두고 산다.

제주 4.3 사건 당시 끔찍한 상황들을 재연하는 대신 피해자와 유족들의 육성, 사건 당시 기록된 아카이브 영상을 토대로 지난날 제주도에서 일어난 학살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비념>은 이미지 중심의 미디어 아트 혹은 에세이 영화 작업 방식을 취하고 있다. 4.3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보다는 공간, 사물의 움직임, 바람 부는 풍경 등과 같은 은유와 상징을 통해 1948년부터 이어져 온 제주의 슬픔을 표현하고자 한다.

대중에겐 낯선 연출 방식을 두고, 좀 더 대중적인 방식으로 4.3 사건 이야기를 만들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임흥순 감독은 '어떤 이야기를 쉽게 말한다고 해서 듣는 이가 마음을 움직이는 건 아니다'라며 자신이 원하는 작업방식을 끝까지 밀어붙였다고 한다. 덕분에 <비념>은 4.3 사건의 아픔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을 동시에 다루면서도 미학적 성취까지 잊지 않는 기념비적인 영화로 남을 수 있었다.

4.3 사건과 강정 해군기지, 반복되는 역사의 아이러니

 영화 <비념>의 한 장면

영화 <비념>의 한 장면. 제주도민 상당수는 4.3 사건으로 인해 가족을 잃었다. ⓒ 인디스토리


<비념>을 지배하는 이미지, 풍경은 고요하면서도 평화로운 제주도의 현재 모습이다. 하지만 제주도는 4.3 사건 당시 억울하게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비명소리와 그들이 흘린 피가 배인 비극의 현장이다. 인터뷰에 참여한 피해자와 유족들의 모습을 정면으로 다루기보다 제주도의 풍경, 그들의 살고있는 공간을 대체하여 보여주는 <비념>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온해 보이는 섬, 제주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리고자 한다.

4.3 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의 증언으로 시작된 <비념>은 어느덧 촬영 당시 공사를 강행했던 강정 해군기지 건설 이야기로 이어진다. <비념>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제주 4.3사건은 국가적 폭력으로 자행된 역사상 가장 무자비한 학살이었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제주 해군기지 건설 또한, 4.3 사건과 마찬가지로 국가적 폭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설파한다. 강정 해군기지뿐만 아니라, 밀양 송전탑, 성주 사드 배치 또한 적지 않은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공사가 강행된 바 있다.

그럼에도 <비념>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에 대한 감독 스스로의 입장을 섣불리 표명하지 않는다. 4.3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 대신, 거리두기와 보여주기 방식을 선택했다. 이를 통해 공권력이 얼마나 많은 무고한 민초들을 짓밟았는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국가 폭력에 의해 주민들 사이에서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던 구럼비 바위가 파괴되고 무너졌는지를 보여준다.

"제주 4.3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제주도민의 영면을 기원하며, 고통의 세월을 살아오셨을 할머니 강상희와 제주의 모든 할머니들께 깊은 경의와 감사를 표합니다."(영화 <비념> 엔딩 중에서)

제주 4.3 사건이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한 국가 폭력의 상흔이라면, 강정 해군기지 사태는 현재진행형 폭력이다. 주민들이 찬반으로 나뉜 것은 차치하더라도 추진 과정에서부터 주민들의 의견은 무시했기 때문이다. <비념>은 아름다운 관광지 제주도의 낭만적인 풍경 속에 묻힌 시린 역사와 기억들과 나무, 돌, 바람, 숲의 실제 풍경을 통해 제주 섬과 제주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불러낸다. 그리고 오랜 풍파와 반복되는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의 흔적을 보여주며 제주의 아픔을 기억하고자 한다. 제주 4.3 사건 70주년을 맞은 지금, 국가 폭력에 의한 제주의 슬픔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비념 제주 4.3 사건 강정마을 제주도 영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