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축구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덕분에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해 다각도의 분석이 가능해져 이전보다 다양한 '숫자'가 팬들에게 데이터로서 제공된다. 데이터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코어, 득점의 수 등 몇몇 숫자만이 사람들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보통 경기장 내에서 일어나는 플레이에 대한 숫자(득점, 슈팅 수 등)가 의미를 가지는 와중에 유독 플레이와 아무 연관이 없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숫자가 있다. 바로 선수들 등에 적힌 숫자. 즉 '등번호'다. 등번호는 그 선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동시에 많은 것을 말하기도 한다. 단순히 선수 구분의 편의성을 위해 탄생한 등번호는 세월이 흐르자 단순한 번호가 아닌 의미와 가치를 더해진 '특별한 숫자'로 변모했다. 물론 모든 등번호가 가치 있는 '위대한 등번호'가 될 수는 없다. 세계 축구사에서 소수만 인정받은 '위대한 등번호'의 계보를 살펴보자. - 기자 말

근대 축구의 발상지는 영국이다. 축구의 종주국 영국은 세계 축구의 뿌리와도 같은 존재다. 영국 축구는 오랜 역사에 걸맞게 수준 높은 경기력을 보여주지만 아쉽게도 세계 최고라고 평하기에는 2%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축구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땅에서 먼저 시작됐지만 축구의 아름다움이 꽃 핀 곳은 유럽이 아니였다. 본능적인 특유의 리듬으로 축구를 즐기는 국가. 월드컵의 영원한 우승후보이자 세계적인 축구 영웅들의 고향. 아마존이 '지구의 허파'인 것처럼 '축구의 허파' 역할을 맡고 있는 브라질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브라질 축구를 언급하면서 이 등번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축구=브라질'이라는 공식이 생겨난 데에는 '10번'들의 경이로운 활약상이 있었다. 브라질 축구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축구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브라질의 10번에 대해 알아보자.

축구 황제 - 펠레

   세 명의 수비수로도 펠레의 드리블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세 명의 수비수로도 펠레의 드리블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 위키미디어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등 수많은 축구 역사의 전설들이 이 남자의 아성을 넘기 위해 도전했지만 모두 역부족이었다. 100년이 넘는 축구 역사상 유일하게 '황제'라는 칭호를 받은 사내의 이름은 에드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트. 줄여서 우리 모두가 아는 '펠레'는 브라질 10번 계보의 시작이자 정점이었다.

축구계에서 10번이 지금과 같은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펠레의 힘이었다. 펠레가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등번호 10번을 달고 뛴 이후로 축구에서 등번호 10번은 곧 팀의 '에이스'가 되었다. 등번호 10번의 역사에서 펠레가 가지는 거대한 존재감에 비하면 펠레가 브라질의 10번이 되었던 계기는 다소 황당하다. 1958 스웨덴 월드컵에 참가하게 된 브라질은 대회의 주최인 FIFA측에 선수들의 등번호를 알리지 않았다. 브라질 축구협회로부터 선수들의 등번호를 전달받지 못한 FIFA는 임의로 선수들에게 등번호를 부여했다. 펠레에게 주어진 등번호 10번은 아무 의미도 없는 임시 번호에 불과했던 것이다.

타의로 등번호 10번을 달게 된 펠레는 오직 본인의 힘으로 10번 역사의 신화를 써 내려갔다. 당시 어린 나이에 월드컵 멤버로 참가할 정도로 재능을 출중했지만 펠레를 향한 의심의 목소리도 컸다. 대회에 같이 참여한 심리학자는 펠레를 "단체 경기에 필요한 책임감이 없다"며 그의 기용을 반대했다. 심리학자의 말처럼 펠레는 책임감이 부족한 선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실력은 그 모든 것은 메우는 것도 모자라 넘쳐났다.

펠레는 본인처럼 의심을 받던 가린샤와 함께 월드컵을 정복했다. 레프 야신이 골문을 지키는 소련과 경기부터 출장하기 시작한 펠레는 8강전 웨일스와 경기에서 '월드컵 최연소 득점'을 성공시키며 1대0  승리를 이끌었다. 준결승에서는 무려 세 골을 폭발시켰다. 준결승 상대인 프랑스에는 스웨덴 월드컵 한 대회에서만 무려 13골을 터뜨린 쥐스트 퐁텐이 있었지만 펠레의 경이로운 활약에 무너졌다. 결승전 상대인 개최국 스웨덴도 펠레가 주축으로 자리잡은 브라질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펠레는 스웨덴을 상대로도 가볍게 두 골을 집어넣으며 조국의 첫 번째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1950년 '마라카낭의 비극'을 라디오로 듣고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을 다짐했던 소년의 바람은 8년 만에 이뤄졌다.

그는 공격수로서 가져야 할 모든 덕목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가 보여준 모든 기술과 플레이가 공격수의 기본이 되었을 정도로 그는 공격수 그 자체였다. 득점력, 드리블, 스피드, 헤더 등 그가 가진 능력은 작은 체구의 펠레를 경기장에서 가장 거대한 인물로 만들었다. 스웨덴 월드컵 이후 펠레의 행보는 곧 브라질 축구의 역사였다. 그는 브라질 클럽 산투스FC 소속으로 브라질 리그를 정복했고 유럽 최강팀들도 박살냈다. 1962년 브라질 의회는 펠레를 국보(國寶)로 지정해 그의 해외 진출을 막기까지 했다.

축구 황제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월드컵 우승도 한 차례로는 부족했다. 1962 칠레 월드컵에서 많은 경기에는 뛰지 못했지만 또 한번 우승을 맛본 펠레는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우승을 하며 줄리메컵(과거 월드컵 트로피 이름)을 영원히 브라질 소유로 만들었다. 골만으로는 펠레를 설명할 수는 없다. 펠레는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플레이메이커 역할도 완벽히 소화하며 축구 그 자체로서 역사에 남게 됐다.

하얀 펠레 - 지쿠

   브라질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백인이라 불리는 지쿠

브라질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백인이라 불리는 지쿠 ⓒ Flickr


펠레라는 이름은 축구 역사에 있어서 영원불멸한 이름이 되었다. 펠레라는 이름의 크기가 너무 컸던 탓일까. 많은 브라질리언들이 제 2의 펠레 자리를 노렸지만 쉽지 않았다. 펠레의 퇴장 이후 한동안 힘을 내지 못하던 브라질 10번은 이 남자의 등장으로 다시 위상을 찾았다. 통칭 '하얀 펠레'라 불리며 브라질 내에서 펠레의 위치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선수. 우리에게는 일본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더 익숙한 지쿠가 그 주인공이다.

지쿠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10번 플레이 메이커'의 전형이었다.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지쿠는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패스에 능했고 브라질 선수답게 화려한 드리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동료를 파악하는 시야와 경기 조율 능력도 탁월했다. 프리킥 능력은 축구 역사상 항상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지쿠는 "프리킥과 패널티킥의 차이를 모르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웬만한 전설적인 공격수에 버금가는 득점력도 소유하고 있었다. 지쿠는 플라멩구와 이탈리아의 우디네세 칼초 등을 거치는 동안 무려 475골을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셀레상(브라질 대표팀 애칭)에서도 지쿠의 득점력은 뛰어났다. 지쿠는 총 71번의 A매치에 출장하여 48골을 성공시켰다. 이 기록은 브라질 최다 득점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미드필더 중에는 1위다. 

지쿠의 활약 덕에 플라멩구는 우승 트로피를 쓸어 담았다. 지쿠와 함께 하는 동안 플라멩구는 4번의 브라질 최상위 리그 우승 및 인터컨티넨탈컵 우승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남미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지쿠가 브라질에서만 선수 생활 대부분을 지냈다는 이유로 그의 기록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것은 부당한 일이다. 1970~80년대 유럽 축구의 최강자였던 리버풀이 지쿠의 플라멩구에게 3대0으로 참패를 당한 사실이 지쿠가 가진 능력의 크기를 보여준다. 후방에서의 빌드업을 시작으로 치명적인 패스와 드리블은 물론이고 득점까지 터뜨리는 지쿠의 플레이에 유럽 축구의 거인도 무너졌다.

지쿠는 완벽했던 클럽에서의 커리어에 비하면 국가대표팀에서는 다소 아쉬운 결과를 거뒀다. 물론 지쿠가 이끈 브라질 대표팀은 강했다.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등번호 8번을 달고 출장한 지쿠는 팀이 무패 행진을 달리는데 일조했다.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승부조작 스캔들로 꼽히는 아르헨티나와 페루의 경기만 아니였다면 브라질은 3위가 아닌 우승이란 성적표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지쿠는 소크라테스-호베르트 팔캉-토닝요 세레조와 황금의 4중주를 구축하며 우승을 예고했다. 어린 마라도나가 이끌던 아르헨티나를 격파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지쿠의 브라질은 2차 라운드에서 만난 이탈리아의 파울로 로시에게 해트트릭을 얻어 맞으며 아쉽게 무너졌다. 승리를 거둔 것은 이탈리아였지만 해당 대회에서 가장 뛰어났던 팀은 브라질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심지어 펠레가 이끌던 1970년 브라질 대표팀보다 지쿠의 1982년 대표팀이 더 뛰어났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을 정도다.

적지 않은 나이에 참가한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8강전 상대인 프랑스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면서 월드컵 도전기를 마감하게 된 지쿠였다. 이날 경기에서 후반 교체 투입된 지쿠는 후반 30분 패널티킥을 실축하는 실수를 범하면서 라이벌 플라티니의 준결승 진출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지쿠의 월드컵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월드컵 트로피가 없다고 해서 지쿠의 존재감이 작아지지는 않았다. "나에게 근접한 단 한 명의 선수가 있다면, 그건 지쿠다"라는 펠레의 말처럼 지쿠는 브라질 10번이 가장 잘 어울리는 선수 중 하나였다. 

악마의 왼발 - 히바우두

1970년 펠레가 조국에게 세 번째 우승을 안긴 이후 24년의 기다림 끝에 호마리우가 중심이 된 셀레상이 1994 미국 월드컵 우승에 성공했지만 브라질답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당시 10번이었던 라이는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브라질은 주장 둥가를 중심으로 한 수비력이 우승의 원동력이었다. 화려한 공격 축구를 원하는 브라질 국민들에게 미국 월드컵 우승은 다소 찝찝한 우승이었다.

성적을 위해 전통을 버렸다고 비난받던 브라질 대표팀은 8년 후 화려하게 복귀했다. 브라질은 미국 월드컵 우승 이후 두 번째 대회만에 완벽한 우승을 일궈내며 진정한 '삼바축구'의 부활을 알렸다. 2002년의 주인공은 득점왕 호나우두 혹은 신성이었던 호나우지뉴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 경기를 직접 봤던 이라면 이 사람의 이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쿠 이후 끊겼던 브라질의 10번 계보를 이으며 2002년 브라질 대표팀의 에이스 역할을 한 선수는 '왼발의 달인' 히바우두였다. 

어린 나이에 브라질 무대에서 데뷔한 히바우두는 1996년 스페인 클럽 데포르티보로 이적했다. 이적 첫 시즌부터 20골 이상을 성공시킨 히바우두의 능력은 곧장 FC 바르셀로나의 레이더망에 포착됐고, 이듬해 히바우두는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게 됐다. 루이스 피구와 공격의 선봉장에 섰던 히바우두는 피구의 이탈 이후에는 바르셀로나의 10번 자리를 이어받으며 바르셀로나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클럽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히바우두는 브라질 대표팀의 10번으로 1998 프랑스 월드컵에 참여했다. '신(新) 축구황제' 호나우두가 있었지만 히바우두의 존재감도 이에 못지 않았다. 축구팬 대부분이 호나우두만을 기억하지만, 당시 대회에서 호나우두가 잠잠한 경기에는 반드시 히바우두의 활약상이 있었다. 8강전 덴마크와 경기에서 히바우두가 영웅으로 떠올랐다. 히바우두는 1대1로 양 팀이 팽팽히 맞선 전반 25분 감각적인 로빙슛으로 역전골을 터뜨렸고, 후반 11분에는 날카로운 중거리 슛으로 골망을 갈라 브라질의 3대2 승리를 완성했다.

프랑스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히바우두는 다음해 열린 1999 코파 아메리카에서 완벽한 에이스로 거듭났다. 히바우두는 영원한 라이벌 아르헨티나와 8강전에서 상대 골키퍼를 얼어붙게 만드는 프리킥 동점골을 터뜨리며 팀을 구했다. 결승전에서는 재치있는 헤더와 로빙슛으로 두 골을 우루과이에게 선물하면서 3대0의 완벽한 승리를 호나우두와 합작했다. 히바우두는 이 대회에서만 5골을 터뜨리며 동료 호나우두와 공동 득점왕에 등극했고 대회 MVP도 수상했다. 1999년 클럽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친 히바우두는 그 해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수상했다.

   히바우두(빨간 원)의 재치가 빛났던 득점 상황

히바우두(빨간 원)의 재치가 빛났던 득점 상황 ⓒ SBS 중계화면 캡쳐


히바우두 플레이의 절정은 단연 2002 한·일 월드컵이었다. 호나우두가 득점을 책임졌고 호나우지뉴가 번뜩이는 드리블로 상대를 현혹했다면 히바우두는 브라질의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사실상 '3R(Ronaldo-Rivaldo-Ronaldinho)'의 중심은 히바우두였다.

당시 대회에서 히바우두는 과거보다 철저히 호나우두의 득점을 지원했고, 호나우두는 8골을 성공시키며 화답했다. 4도움을 기록하며 도우미 역할을 수행한 히바우두는 5골을 터뜨리며 득점원으로서 활약도 했다. 압권은 결승전이었다. 결승전에서 들어간 두 골은 호나우두가 모두 성공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히바우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두 번째 득점 상황에서 히바우두가 오른쪽에서 연결된 땅볼 크로스를 다리 사이로 흘리는 모습은 '삼바축구 부활'의 피날레로서 안성맞춤이었다.

히바우두 이후 브라질의 10번은 다소 침체기를 겪었다. 호나우지뉴와 카카라는 거물들이 계보를 이어나갔지만 그들은 대표팀에서 10번 유니폼을 입고는 다소 부진했다. 다행히도 다소 흔들렸던 10번 계보는 네이마르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네이마르는 현재 총 A매치 77경기에서 52골을 터뜨렸다. 펠레와 비슷한 페이스를 보이고 있는 네이마르는 펠레가 가진 브라질 국가대표 최다득점자(77골) 타이틀을 향해 순항 중이다. 네이마르를 중심으로 일찌감치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한 브라질의 목표는 역시 여섯 번째 월드컵 우승이다. 네이마르가 월드컵 우승으로 아르헨티나 10번(메시)에게 빼앗긴 10번의 패권을 브라질 10번으로 가져올 수 있을지 벌서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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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10번 펠레 지쿠 히바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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