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방송된 MBC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아래 <우결>)에서 이국주는 가상 남편으로 출연 중인 슬리피의 서른네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이벤트를 준비했다.

돌잔치를 콘셉트로 한 이벤트에서 슬리피가 돌잡이로 뽑은 것은 자유의 여신상.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슬리피는 아내 때문에 자유롭게 클럽에 갈 수 없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아내 때문에 클럽에 갈 수 없다?

 MBC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의 한 장면.

MBC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의 한 장면. 남편에게 신용카드를 주고 클럽을 쏘는 아내. 그리고 이를 '쿨하다'고 평하는 출연진들. 그 반대의 장면이 방송에 나왔던 적이 있을까. ⓒ MBC


생일 축하를 위해 모인 지인들과 식사를 끝내고 이국주가 슬리피와 그의 친구들을 데리고 간 곳은 홍대 앞 클럽. 생일선물로 남편이 좋아하는 클럽에 데려다주고 자신의 신용카드까지 내준 아내에 대해 슬리피는 "(친구들 앞에서)기가 살았다"고 말했다. 지인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멋지다"는 반응을 보였고 영상을 지켜보던 스튜디오의 출연자들 반응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국주는 남편 슬리피와 친구들을 클럽에 들여보내고 혼자서 자리를 떴다. 자신의 신용카드까지 쥐여주며 남편이 좋아하는 클럽에 보내주는 '통 큰 아내', '쿨한 아내'의 이미지를 얻었다.

남편의 생일선물로 좋아하는 걸 사주거나 할 기회를 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편의 가벼운 일탈쯤은 허용할 수 있는 아내가 '이상적'이라는 내용은 어떤가. 한국의 방송에서 이 반대의 경우가 전파를 탄 적이 있었는지 반문해보면 '꺼림칙'하다.

10년 가까이 가상 결혼을 콘셉트로 잡고, 남녀 연예인을 출연시켜 보여준 <우결>. 정작 이 프로그램 속 성 역할은 고루하다. 남녀가 동일 성비로 출연하는 유일한 예능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방송이 담고 있는 결혼이라는 세계관은 현재와 한참 동떨어져 있다.

상차림은 아내가, 생색은 남편이

 MBC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의 한 장면.

MBC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의 한 장면. 상 차리는 사람 따로, 생색 내는 사람 따로 있는 이 모습이 2017년 예능의 현주소일까. ⓒ MBC


이는 지난 4일 방송된 내용에서도 현격히 드러난다. 정혜성, 공명 커플이 공명의 동생인 아이돌 그룹 엔시티(NCT)의 도영을 신혼집으로 초대했다. 가상 부부이기는 하나 정혜성은 남편의 동생인 도영에게 '도련님'이라 부르며 그를 환영하기 위해 21첩 반상을 준비했다. 아내 정혜성이 스무 개 이상의 반찬을 만드는 동안 남편 공명이 한 일이라곤 나무젓가락에 낙지를 끼워 오븐에 넣는 것과 남은 재료를 정리하는 것뿐이었다.

더 큰 문제는 식사하기 위해 밥상 앞에 앉았을 때 일어났다. 수 시간에 걸쳐 수십 가지 반찬을 만든 정혜성에 대한 별다른 답례 없이, 21첩 반상을 차린 생색은 남편 공명의 몫이었다. 동생 도영은 "가장이 먼저 숟가락을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을 살아가는 이십 대 초반의 남성이 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풋풋한 청춘이 결혼이라는 시스템을 경험해 보는 프로그램에서 1970년대 연속극에서나 볼 법한 대사가 나왔다.

물론 실제 촬영 중에는 아내의 노고에 대한 감사를 표했을 것이다. 남편 공명은 부엌일을 더 했을지도 모른다. '예능' 프로그램의 특성상, 다소 과장된 상황 설정과 웃음 포인트 유발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아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방향으로 내용을 편집해 내보내는 제작진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남편을 위해 통 크게 클럽을 쏘고 남편의 가족을 위해 수십 가지의 반찬을 만들 줄 아는 아내. <우결>을 만들고 있는 피디와 작가는 정녕 이것이 지금의 이상적인 아내상이라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가상이기는 하나 일정 부분 리얼리티가 섞인다는 것이 <우결>이 내세우는 장점이다. 그런 점에서 가상 부부로 출연 중인 모든 커플은 맞벌이 부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아내의 역할은 과거 가부장제가 공고하던 시절에 머물러 있다. 자기 일이나 전문성은 배제된 채 남편을 내조하고 집안일에 능숙하며 시댁 식구에게 잘하는 아내가 '이상적'이라고 은연중에 끊임없이 보여준다.

이 프로그램은 두 명의 피디와 네 명의 작가가 주축이 돼 만든다.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 여성이다. 누군가의 아내이거나 아내가 될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은 이국주나 정혜성처럼 할 수 있습니까, 아니 하고 싶습니까?"

우리결혼했어요 성인지 성역할 양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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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차 영상번역작가. 인터뷰를 번역하는 것도 쓰는 것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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