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담(23. 丁夏潭). 여름 연못. 이름의 의미답게 정하담은 여름을 가장 좋아했다. "1년 중 여름에 가장 밝은 기운이 올라온다, 겨울엔 너무 추워 방에서 귤 까먹는 거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웃어보인다. 봄기운이 완연한 지난 11일, 서울 통인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원피스 차림이었다. 마치 세상의 따뜻한 기운을 머금고 막 피려는 꽃처럼 눈빛을 밝힌다.

 배우 정하담.

데뷔작인 <들꽃>과 최근 개봉한 <스틸라이프> 속 이름이 그의 이름과 똑같은 하담이다. 처절하게 외로워 보였지만 삶을 견뎌낸 소녀 역할을 분명 그는 훌륭하게 해냈다. ⓒ 인디스토리

그런 그가 영화 속에서 유독 추운 겨울을 났다. 그것도 두 번. 전작 <들꽃>(2014)과 현재 상영 중인 <스틸플라워>(2015) 속에서 하담은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고, 세상의 무관심을 견뎌내야 했다. 견딘다? 오히려 차가운 아스팔트 속에 얕은 뿌리를 내리고 운명처럼 피어났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한다. 이곳저곳으로 뿌리를 움직이며 정하담은 세상 구석구석을 걸어다녔다. 영화는 그렇게 완성될 수 있었다.

확신이 없던 시작

<스틸플라워>를 말하기 위해서는 <들꽃>을 짚어야 한다. 세 명의 가출 소녀를 따라간 <들꽃>과 일자리를 구하려 해매는 한 소녀를 따라간 <스틸플라워> 모두 박석영 감독의 작품이다. 올 여름에 찍을 <재꽃>까지 '꽃3부작'으로 묶어 칭하기도 하는데, 세 작품(<재꽃>까지 출연이 유력하다)에서 정하담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특히 <스틸플라워>를 두고 박 감독은 "이 아이(영화 속 하담)가 뭘 하는지 이해 못하는 카메라라고 생각했고, 나중에서야 그의 얼굴을 찍을 자격을 얻었다는 마음으로 촬영했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스틸플라워>는 두 명의 촬영감독이 교차해가며 작업했다. 어떤 유대감을 쌓지 않고, 철저하게 따라가기를 원했던 감독의 의도였다.

데뷔작인 <들꽃> 전까지 정하담은 영화계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원석이었다. 그저 연기가 하고 싶어 전공을 바꿔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심지어 <들꽃> 오디션 당시 "너무 얼어서 제대로 대사를 못 뱉었"다. 그 모습에 박 감독은 상대의 뺨을 때리며 분노를 내뱉는 즉흥연기를 제안했고, "미워서 어떤 사람을 때려본 적이 없었"던 정하담은 그 연기 중에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때리지 못하고 상대의 어깨를 만지듯 치면서 울었어요. 감독님이 '왜 울었어요?'라고 물으셨고, 나중에 들었지만 그 이후 오디션에 절 다시 부를 생각은 없었다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분이 오디션 때 못 오겠다고 하셔서 한 시간이 비었는데 그때 절 다시 부르셨어요. 안에서 보는 전형적인 오디션 말고 들판 같은 곳에 나가서 해보자고 제안하셨어요. 그 이후로 오디션을 다섯 번 정도 더 봤을 거예요. 저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까요."

반대로 뭔가 있을 거 같기에 감독은 수차례 더 확인한 게 아니었을까. 오히려 확신하지 못했던 건 배우 자신 아니었을까. 진가는 막상 <들꽃>에 합류한 이후 나왔다. "다른 분들의 연기를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감독에게 많은 걸 묻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영화 자체가 풍성해졌다. 정하담의 여러 경험담과 세상을 보는 관점 일부가 담긴 것. 그래서 <들꽃> 각색 부문에 정하담의 이름이 올라 있기도 하다.

"앞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함께 준비해보자는 감독님 말씀에 저도 나름 준비해갔어요. 제가 뭘 쓰거나 한 건 아니지만 감사하게도 이름을 올려주신 거죠. 예를 들어 소녀가 돈을 어떻게 가지고 다닐까라는 물음에 전 왠지 테니스공에 구멍을 내서 그 안에 가지고 다닐 거 같다고 했고요. 강아지풀 장면도 그래요. 감독님은 강아지풀이 왜 강아지풀인지 모르셨는데 (손바닥에 풀 올리는 시늉을 하며) '쭈쭈쭈!' 이렇게 하면 내 쪽으로 오니까 강아지풀이거든요(웃음). 그런 걸 편하게 말씀드린 거에요."

소녀, 어른이 되다

 배우 정하담.

<들꽃> 속 하담은 나이를 묻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열여섯이요"라고 수줍게 말한다. 아직 세상에 속하지 않은 아이다. 반면 <스틸플라워> 속 하담은 전혀 자신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이미 어른이 된 거죠" 정하담이 담담하게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설명했다. ⓒ 인디스토리 제공


<스틸플라워>의 하담은 <들꽃> 속 하담의 5년 후 모습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들꽃>으로 2014년 부산영화제에 갔을 당시, 폐막식 때 박석영 감독은 정하담에게 다음 영화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받게 된 시나리오. "너무 아름다웠고, 그 (영화속) 하담의 감정이 너무 아팠다"고 정하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화 <스틸플라워>의 한 장면

영화 <스틸플라워>의 한 장면. 술을 머금고 우연히 엿본 탭댄스에 매료된 하담은 자신이 일해서 번 돈의 일부를 내놓고 몰래 탭댄스 구두를 가져온다.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한 그만의 구매방법이다. ⓒ 인디스토리

"시나리오 형태였지만 산문시처럼 아름다웠어요. 영화에 대사가 거의 없잖아요. 지문도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그 장면의 정서가 느껴질 수 있게 돼 있었죠. 이런 식이에요. '하담, 거리를 걷는다', 선술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장면에선 '이랏샤이 마세! 이랏샤이 마세! 하고 소리가 울린다'라고 적혀있어요. 전체가 20페이지 정도였는데 여백도 굉장히 많았고, 정서로 가득 차 있었죠.

살갗이 다 드러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아이가 모래 털듯 눈물을 털고 일어나 탭댄스를 추는 이야기라고 감독님께서 말했는데, 너무 멋졌어요. 근데 장면은 모두 이해가 갔는데 이 캐릭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죠. <들꽃>의 하담과 이름은 같지만 아주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감독님 역시 5년 후라지만 가출했을 때 일주일은 지금의 하담에겐 기억도 안 날 거다 말씀하셨죠. 근데 막상 해보려 하니 매이는 거예요. 과거에."

정하담이 이해한 <스틸플라워>의 하담은 원하는 게 명확하고 욕망도 뚜렷한 아이였다. <들꽃>과 달리 어떤 누구와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고, 살기위해 스스로 결정하고 노력하는 인물이었다. 하담은 돈을 떼먹으려는 이들에게 다가가 괴성을 지르며 정당한 대가를 요구한다. 하지만 절대로 몸 파는 일은 하지 않는다. "자기 원칙을 지키는 어른이 된 거죠"라고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홀로 거리를 오래 해맸음을 표현하기 위해 상당 기간 정하담은 굽이 다른 신발을 신고 다니며 몸으로 하담을 익히려 했다.

<스틸플라워>를 준비하던 시기에 오디션을 보게 된 영화 <검은 사제들> 이야기가 재밌다. 영주무당으로 매우 짧게 등장했던 영화를 위해 정하담은 감독 앞에서 탭댄스를 췄다. "무당 역할인지 모르고 몸을 움직이는 걸 보고 싶다"는 말에 즉석에서 택한 방법이었다. 여러 모로 탭댄스가 정하담의 '상징'이 된 셈이다.

예민한 감수성

 배우 정하담.

영화 속 하담은 치열하게 살아간 소녀였지만 실제 정하담은 한 없이 평화로운 성격이다. "누군가와 싸운 일도 없었고, 내 주변 사람들이 다 착해보였다"며 "학급회의 시간에 안건마다 만장일치가 돼야 통과가 될만큼 친구들이 착했다"고 일화 하나를 그가 공개했다. ⓒ 인디스토리

이 정도면 정하담은 박석영 감독의 페르소나(감독의 작품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배우)라고 표현할 만하다. 하지만 "그 말 자체를 감독님이 싫어하신다"며 그가 말했다. 상호 존중과 신뢰 속에서 서로 동등한 예술가로 생각하고 작업하는 게 바로 박석영 감독의 평소 작업 방식이다. 그렇지만 감독과 두 작품 이상을 경험한 배우로서 그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정신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이 질문에 정하담이 눈빛을 반짝였다.

"저도 왜 감독님이 그런 영화에 집중하시는지 생각 많이 해봤어요. 사람과 대화하다보면 특별하게 뭔가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 때가 있잖아요. 감독님은 삶을 견디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거 같아요. 그렇다고 곧 죽을 건 아니고... 제가 감히 정의하자면, 감독님 스스로의 삶도 그런 거 같고, 같이 견디는 사람이 되시려는 게 아닐까 해요. 노동하면서 삶을 견디는 사람에 꽂히시곤 해요. 식당에 가도 저는 잘 안 보이는 노동자들에게 집중하곤 하셨어요. <들꽃> 땐 정말 많이 우셨어요. 보통 사람보다 깊은 지점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분 같아요."

그런 감독과 만난 정하담 본인 역시 세상에 대해 명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다 문득 연기를 하게 됐지만, 그의 오랜 꿈 중 하난 소설가였다.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그렇게 좋아했다"며 정하담은 자신의 습작 몇 가지를 소개했다. 모두 그 나이 대에서 정직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내용이었다. 특별한 게 있다면 폭력과 불합리함에 더욱 예민한 감수성이 있다는 점.

"어찌어찌해서 완성은 했는데, 소설은 진짜 50매를 넘기기 어렵더라고요! 학기 초에 선생님이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준비물을 안 가져온 여자애 손바닥을 대뿌리로 때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있어요. 여자아이 잘못도 있지만 일종의 본보기잖아요. 또 담배 먹은 남자 아이의 이야기도 있어요. 어른들이 함부로 버린 꽁초를 아기가 주워 먹다 죽을 상황이 된 이야기죠. 뭔가 불합리하잖아요.

세상은 그런 거 같아요. <스틸플라워> 속 하담이가 어디엔가 실제로 있을 거 같아요. 모든 게 갑작스럽게 말린다고 해야 하나? 폭력을 당하다 보면 이게 억울한지 뭔지도 모르는 상태가 있어요. 하담은 그런 세상이 자신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는 나빠지지 않는 캐릭터였죠. 나쁜 마음이 순간순간 들지만요. 저에게도 해당하는 얘기에요."

몸으로 표현하는 이야기꾼

미국 소설가 헨리 제임스는 "소설가란 그에게 쓸모없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을 말한다"고 했다. "한글을 깨친 게 너무 늦어 초1 때에야 겨우 읽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 정하담은 분명 이야기꾼 기질이 있었다. 전북 무주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시나리오를 읽고 연극반 공연을 올리던 소녀가 세상의 폭력을 몸으로 이겨내는 배우가 됐다.

입으로 쉽게 글을 내뱉지 못하던 답답증을 어릴 때 본능적으로 느꼈던 걸까. 몸으로, 눈빛으로, 그리고 표정으로, 정하담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당장은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와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서의 단역이다. 하지만 적어도 정하담이 표현할 이야기가 그보다는 훨씬 풍부해 보인다. 일단 <스틸플라워>를 보자. 꼭.

 배우 정하담.

떠오르는 신예, 예비 스타 등 언론에서 정하담을 부르는 수식어가 늘고 있다. "지금 아니면 듣기 힘든 말이기에 감사하다"고 그가 말했다. 거기에 갇히지 않고 더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덧붙여 본다. ⓒ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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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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