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다룬 영화 <귀향>의 조정래 감독과 영희 역을 맡은 배우 서미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다룬 영화 <귀향>은 14년의 기다림을 견딘 작품이다. 영화의 조정래 감독과 영희 역을 맡은 배우 서미지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두 사람의 눈시울은 붉게 젖어 있었다. ⓒ 이희훈


오랜 기다림이 빛을 발하는 것일까. 일제강점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연을 극화한 영화 <귀향>이 24일 개봉했고, 개봉일 하루 동안 15만 4728명의 관객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지난 2002년 피해자 후원 시설인 나눔의 집에서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을 보고 영화화를 결심했다"는 조정래(43) 감독의 다짐 이후 14년이 흐른 뒤였다.

적록 색약인 조정래 감독은 이 그림이 총천연색으로 다가오는 묘한 경험을 한다. 동아리 동료들과 봉사활동을 하러 왔다가 그는 그림에 충격을 받았다. 마음을 먹은 감독은 결심을 지켰고, 영화에 참여한 소녀 배우들은 온 몸으로 할머니들의 넋을 안았다. 그들은 함께 울었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삶이 너무 아파 울었고, <귀향>을 위해 십시일반 힘을 보탠 7만 5000여명의 시민 후원자들의 마음에 감동해 울었다.

이제 그 눈물을 조금 거둬도 될텐데, 22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정래 감독과 배우 서미지(22)의 눈시울은 여전히 붉게 젖어 있었다.

꼭 해야만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다룬 영화 <귀향> 조정래 감독. 조 감독은 인터뷰를 하는 순간에도 "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상중이라 웃을 수 없다"며 덤덤한 표정으로 촬영과 인터뷰에 응했다.

"벌 받는 느낌". 조정래 감독은 <귀향>을 찍으면서 태생적으로 남자기에 소녀 배우들과 소통의 한계가 있었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끝까지 해내야 했다"며 조정래 감독이 애써 말을 이었다. 뚝심이 승리하는 순간이다. ⓒ 이희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강일출 할머니가 그린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 영화 <귀향>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강일출 할머니가 그린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 영화 <귀향>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다. ⓒ 나눔의 집

"수많은 소녀들이 하늘을 날아올라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강 할머니의 그림을 본 후 조정래 감독이 꾼 꿈이다. "정말 그 영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시는" 걸 느꼈고, 영화는 사명감으로 다가왔다. 애초부터 제목은 <귀향>이었다. "다만 아픈 과거에만 집중해 할머니들과 관객들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영화에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소녀(강하나, 서미지 등)들과 그들의 혼을 위로하는 무녀 은경(최리 분)이 함께 등장하는 이유다.

"가장 먼저 떠올린 게 무녀였지만 대본에 무녀라고 적질 못했습니다. 분명 진주씻김굿 같은 건 우리의 무형문화재인데, 무속에 대한 일부 부정적 인식 때문에 스스로 자기검열을 한 셈이죠. 그 꿈을 꾸고 나서 일종의 사명감을 갖게 됐어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아픈 과거 얘기만 하면 힘들어서 못 보실 거 같았어요.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은경 캐릭터가 그래서 중요했죠. 은경의 직업을 의사나 간호사로 바꿔보기도 했는데 너무 작위적이라는 의견이 있었고, 결국 지금의 틀을 유지했습니다."  (조정래 감독)

꼭 해야만 한다는 의지는 배우 서미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2014년 5월 당시 소녀 영희 역으로 오디션을 본 서미지는 "마지막으로 할 말이 혹시 있는지"라는 감독의 말에 일장 연설을 했다. "국사 교과서 문제를 비롯해 지금 왜 <귀향>을 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래도 기성 배우인데 공식적으로 참여한 첫 작품이 아픈 소재라 부담이진 않았는지 물었다. "전혀요"라고 말하는 서미지의 눈빛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첫 작품이 돼서 더 좋았어요. <귀향>은 이제 제겐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 같은 작품이에요. 너무 영광스러워요. 어쩌다 이렇게 좋은 영화에 출연하게 됐을까 감사한 생각뿐이에요. 오디션 공고 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보고 지원했고, 시나리오를 본 뒤 꼭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사실 이 한국에서도 많은 분들이 꺼려할 내용일 수도 있는데, 제가 능력도 많이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돕고 싶었어요. 오디션에서 떨어졌으면 스태프라도 했을 거예요(웃음).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기도 했어요. 특히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역사에 생각이 많았죠. 영화를 통해 이 역사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어요. 이렇게 아픈 일을 제대로 모르는 분들이 많잖아요. 정말 주변만 둘러봐도 점점 할머니들이 잊히는 게 눈으로 보여요. 너무 안타까웠어요." (서미지)

소녀 배우, 신이 되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다룬 영화 <귀향>의 영희 역을 맡은 배우 서미지.

서미지가 맡은 영희 역은 위안부 피해자인 강일출 할머니가 모티브인 캐릭터다. 인터뷰 내내 서미지는 "이 영화로 할머니의 아픈 기억이 또 생각나셨을까봐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고 말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진심을 담아 최선을 다해 인물을 표현하는 것 뿐이었다. ⓒ 이희훈


수많은 사람들의 진심이 모인 만큼 <귀향>이 완성되기까지 그 사연 또한 수 만 가지일 터. "하나하나 열거하다가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날 발견하곤 했다"며 조정래 감독이 일부 이야기를 전했다. <귀향>의 임성철 PD(백범 김구 선생의 외증손이기도 하다)는 집을 내놓고 월세로 이사했다. 일본군인 역을 맡은 재일 교포 배우들은 자비로 한국와 일본을 오갔고, 현장 물품 정리 등 스태프 일을 자처했다. 또 누군가는 차를 판 돈을 제작비에 보태라 쾌척하기도 했다. 손숙, 오지혜, 정인기 등 기성 배우들은 출연료를 받지 않고 참여했다.

그리고 소녀 배우들. 조정래 감독은 이들을 "내가 모시는 신"이라고 표현했다. 은경 역의 최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감독에게 캐스팅 된 후 4년을 기다렸다. 서미지 역시 대학교를 휴학하고 1년 여간 촬영을 기다렸다. 긴 기다림의 시간 동안 이들은 서울 혜화동 근처 지하 셋방을 얻어 대본 리딩을 하고, 할머니들의 증언집을 읽었다.

"휴학을 했지만 이후에도 촬영이 미뤄지는 일이 몇 번 있었어요. 그래도 <귀향>이 꼭 영화화 된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진짜 다들 어느 누구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촬영하는 동안에도 안된다는 말을 아무도 안했죠. 우리끼리 감독님이 정말 대단하다고 말하곤 했어요. 도중에 그만 두는 친구들이 한 명도 없었는데, 어떻게 우리 의지를 다 알아보셨을까. 매의 눈이시구나! 느꼈죠." (서미지)

"일부 스태프 중에선 도중에 나간 분들이 좀 있지만 배우들은 다 기다려줬어요. 배우들이 진짜 현장에서 대사를 하나도 안 틀렸습니다. 큰 상업영화에서 작업한 내로라하는 스태프 분들이 처음엔 그냥 돕겠다는 마음으로 왔다가 배우들 연기를 보고 감동해서 이것저것 장비도 빌려주시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도 했어요. 배우 덕에 하루에 2회 차씩 찍을 수 있었죠." (조정래 감독)

위기의 순간

 영화 <귀향>의 한 장면

영화 <귀향>에 참여한 배우들은 저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일본군이 총을 겨누고 있는 꿈, 맞는 꿈, 차마 입에 꺼내기 치욕스러운 꿈들을 꾸며 영화를 찍었다. ⓒ 제이오엔터테인먼트

물론 모든 과정이 순탄했던 건 아니다. 열악했던 촬영 여건은 차지하고 일단 참여하는 배우들의 심리상태가 눈에 띄게 불안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피해자 역을 맡은 일부 배우들은 악몽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서미지 역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꿈을 꿨다"며 "배우들끼리 서로 그 꿈을 얘기하기도 했고, 전문가의 상담을 받기도 했다"고 전했다.

"최대한 할머니의 과거를 입히고 싶었어요. 제가 맡은 영희 역이 강일출 할머니가 모티브였거든요. 인터뷰와 여러 다큐멘터리를 봤고 전쟁의 참상을 다룬 영화들을 많이 접했는데, 잠을 잘 때마다 끔찍한 일들이 꿈에서 벌어지는 거예요. 너무 수치스러운 꿈을 꾼 후엔 감독님에게만 말씀드렸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어요. 총 들고 있는 군인과 꿈에서 늘 마주쳤고, 피가 튀는 꿈도 많이 꿨죠. 어느 순간 아 오늘은 이런 꿈을 꿨구나 하며, 그 악몽에 적응했을 정도예요. 근데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게... 전 이렇게 꿈으로 느끼는데도 아무에게도 얘기하기 싫은데 피해자 할머님들은 어떠셨을까 생각이 들어서..." (서미지)

인터뷰 중 서미지는 몇 차례나 울먹였다. 그때마다 조정래 감독이 말을 받아 이었다. "수사 그대로 굉장히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는 조 감독은 "<귀향>을 가장 찍고 싶었던 사람이 나였지만, 동시가 가장 <귀향>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사람도 나였다"고 고백했다.

"나눔의 집을 방문하면서도 고통스러웠죠. 게다가 전 남자잖아요. 근본적으로 소통의 한계가 있는 거고, 영화를 찍으면서도 벌 받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해내야 하니까... 정말 위기였던 건 재일 교포 배우 분이 더 이상 못하겠다고 했을 때였어요. 일본군 악역이었거든요. 나눔의 집을 함께 갔는데, 박옥순 할머니께서 그 분에게 일본말로 '전쟁이 이렇게 힘들었다, 엄마도 아빠도 못보고 끌려갔었다'며 조용히 말씀 하시는데 그 배우가 펑펑 우는 거예요.

박옥순 할머니는 빨래하다가 일본군에게 끌려가셨을 거예요. 안 그래도 그 배우는 촬영 현장에서 소녀들을 미워해야 한다면서 계속 자기 암시를 걸고 눈도 안 마주치며 지냈는데, 그 말에 무너진 거죠. 너무 가슴이 아프다면서 그만 해야 할 거 같다고 제게 말했었요. 촬영을 위해 3년이나 기다린 친군데... 다행히 이후에 다시 결심해서 합류했어요." (조정래 감독)

진심

<귀향>의 시사회에선 감독 및 출연배우들과 후원자들이 서로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이 영화를 있게 해준 사람들에게 대한 감사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후원자들은 이 어려운 영화에 참여해준 배우들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인터뷰 말미 조정래 감독은 그 마음을 전하며 "위안부 문제를 정치 문제로 국한시키지 말아달라" 당부했다.

"좌초된 영화를 시민들이 살려준 겁니다. 기적이죠. 그래서 정치성을 뛰어넘었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위안부 문제 해결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인데 여기에 보수와 진보가 있을 리 없잖아요. 14년 째 <귀향> 이야기를 하고 다녔는데 정치적 시각으로 보면 끝도 없지요. 일부에선 왜 하필 이 시기에 개봉하냐는 말도 해요. 이미 작년 말에 부산에서 후원 시사회를 하고 있던 터였는데, 그러다 갑자기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안이 나와서 좀... 그랬죠." (조정래 감독)

서미지는 줄곧 할머니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며 시민들 도움에 감사해했지만 동시에 그는 "영화를 보신 할머니들께서 많이 우실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이젠 부디 잊게 해드리고 싶은데 또 생각나셨을까봐..."라고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픈 역사일수록 정면으로 바라봐야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귀향>은 용기와 진심을 담아 그 역사에 다가간 작품이다. 영화가 나온 이후 서미지는 "친구들에게 배지를 나눠주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자고 권하며" 지낸다. 조정래 감독 역시 전국을 돌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진심이 이 영화에 오롯이 모였다. 분명 <귀향>은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논하고 행동해야 할지 화두를 던질 작품이다.


귀향 위안부 조정래 서미지 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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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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