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봇, 소리>에서 아빠 김해관 역의 배우 이성민이 20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성민은 영화 <로봇, 소리>에서 잃어버린 딸을 찾아 나서는 아빠 김해관 역을 맡았다. 딸을 사랑하지만 그의 꿈은 이해하진 못하는 가부장적인 인물. "이게 사실 대한민국 대부분의 아빠일 모습일 것"이라고 그가 설명했다. ⓒ 이정민


영화 <로봇, 소리>의 주연 제안을 받고 이성민은 당황했다. '내가 전면에 나서면 다른 배우들이 한다고 할까', '투자는 제대로 될까' 이런 생각을 하다 실제로 제작 일정이 조금이라도 지연되면 혹시나 자신 때문인가 자책하곤 했다. 60여 편의 작품에서 크고 작은 역을 소화한 베테랑의 속마음이었다. 그래서일까. 매 인터뷰 때마다 그는 "이번 작품에 함께 해준 이희준과 이하늬 등에게 고맙다"는 반복한다.

다만 출연한 작품 자체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인공지능 위성 로봇이 한국에 불시착해 한 가장을 만나 잃어버린 딸을 찾아다닌다는 SF 장르 설정임에도 그는 "서정적이고 따뜻한 감동이 분명한 작품"이라는 신뢰를 품고 있었다.

지난 19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로봇과 인간의 호흡

 영화 <로봇, 소리>의 한 장면.

영화 <로봇, 소리>의 한 장면. 배우 심은경이 로봇 목소리를 연기했다. 호흡을 위해 이성민은 현장에 음성 연기자들 요청하는 등 세심하게 준비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로봇, 소리>는 가족 영화의 탈을 썼다. 10년 전 딸을 잃어버린 해관(이성민 분)이 로봇의 능력에 기대어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겪는 사건은 자신을 무능하고 나쁜 가장이라 여기는 아버지의 심정과 뒤섞이며 애잔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관건은 로봇과 이성민의 호흡이었다. 상대 배우의 리액션 없이 홀로 로봇과 감정을 주고받아야 했던 그는 제작진에게 목소리 연기자를 요청했다. 실제 영화엔 심은경이 목소리 출연을 했지만, 현장에선 여건 상 대역이 로봇의 말을 대신 했다.

"로봇 전담 배우가 있다면 뭐라도 하나를 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요청했습니다. 목소리 배우에게 '만약 자네가 이런 상황이었으면 어떻게 말을 했을까' 등을 물어보면서 했어요. 내 연기도 그에 맞춰 상대할 수 있으니 좋지요. 로봇과 소통하는 과정은 무리 없었어요. 낯선 상태에서 만나 서서히 친밀감을 쌓아가는 설정이잖아요. 물론 살아있는 상대 배우의 리액션이 있었으면 더 좋겠지요. 분명 일반적인 연기 과정은 아니었습니다."

로봇과의 연기와 동시에 이성민은 이 영화 전반에 흐르고 있는 정서의 힘을 강조했다. 공간적 배경인 대구광역시는 이성민의 고향이기도 하다. 실제로 중학교 3학년의 딸이 있지만, 딸을 고려해서 출연을 결정한 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공간이 영화에 담긴다는 것, 미숙한 한 남자가 부모가 된 이후 품는 마음의 세밀한 결이 이유였다.

"아이 때문에 작품을 결정하진 않아요. 애 때문에 어떤 작품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요. 연기할 때도 가족을 특별히 상상하진 않습니다. 근데 이번엔 잠시 우리 애 생각을 한 적은 있어요. 감정 표현이 잘 안 돼서 그랬는데 바로 감정이 만들어지진 않더라고(웃음). 딸과 싸우는 장면은 내 경험이 녹아 있긴 합니다. 희한하게 딸에게는 야단을 치다가도 싸우게 돼요. 아들은 안 그런데. 참 묘해.

제 딸도 배우 시킬 거냐고요? 음악, 연기, 그림에 소질 없습니다!(웃음) 지금에선 정직하게 땀 흘리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해관 같다고요? 분명 대한민국 아빠들의 일반적 모습이죠. 가부장적인 그런 사람이 엉뚱한 기계를 만나 어떤 교감을 이뤄나가나. 이게 영화의 핵심입니다."

"내가 살다보니 그 사고를 잊고 있었구나!"

영화에서 이성민이 조심스러워 하는 부분도 있었다. 딸의 실종을 묘사한 장면이었다. 2003년 대구지하철참사를 연상케 하는 내용이 일부 담겼고, 이성민은 "제작진 이하 배우들이 혹시나 실수할까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는 사연을 덧붙였다. 촬영 전 이성민을 비롯한 스태프들은 대구에 내려가 희생자 추모비에 헌화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었고, 그만큼 영화를 진정성 있게 만들어야 했다"고 그가 덧붙였다.

"어떤 펭귄 다큐를 봤는데 알을 발 위에 올려놓고 지내요. 암컷이 수컷 발 위에 알을 낳으면 수컷은 온종일 알이 얼지 않게 돌보는 겁니다. 바닥에 닿으면 얼어버리니까요. 부모의 마음은 동물이든 사람이든 같아요. 아이가 제대로 서서 세상 밖으로 나갈 때까지 부모는 보호해주고 싶음 마음이 있는 거죠.

우리 아이도 아직 남자친구는 없지만 요즘 가끔 친구 집에서 자고 오곤 해요. 어느 날 대학에 간다면 혼자 여행 간다고도 하겠죠. 아이를 첫 심부름 보냈을 때가 생각납니다. 부모는 결국 아이가 세상에 홀로 잘 설 수 있게 가르치는 역할일 거예요. 태어난 순간 아이와 내가 점점 떨어져가는 걸 연습하는 거죠."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존재가 로봇이다. 소리라는 이름의 이 인공지능 위성 로봇은 자신 때문에 중동 지방의 한 소녀가 폭격을 당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대한민국에 불시착했지만, 꼭 그 소녀를 찾아간다는 일념을 갖고 있다. 가족 코드보다 이성민이 울컥했던 건 오히려 이 지점이었다.

"소리가 소녀에 대해 말하는데 훅 올라오더라고요. 자기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쭉 가는 모습을 보며 기계인 얘도 끝까지 자신과 그 소녀를 잊지 않는구나 생각했어요. 이 영화에서 그 지점이 잘 보였으면 합니다. 대구지하철참사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어!' 하는 감정을 전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살다보니 그때 그 사고를 잊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이요. 기계를 통해 인간을 돌아보는 겁니다."

송강호라는 산을 비껴

 영화 <로봇, 소리>에서 아빠 김해관 역의 배우 이성민이 20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과거 이성민은 영화를 좋아하는 부친의 영향을 받았다. "일상 중 하나가 극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영화보기였다"던 그는 "막상 배우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강하게 반대하셨다"며 당시 일화를 언급했다. ⓒ 이정민


잊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앞을 보며 달려가다 보면 인간은 어느새 자신이 무엇을 꿈꿨는지, 처음이 어땠는지 잊기 쉽다. 30년이 넘는 연기 경력을 그에게 상기시켰다. 연기 재수생으로 뒤늦게 극단 생활을 시작한 그는 자신이 몸담은 작품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그를 스타덤에 올린 드라마 <골든타임> 혹은 <미생>일 거 같다고?

"<골든타임>과 <미생>은 책임과 부담감을 느끼게 한 작품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제가 갑자기 관심을 받아서죠. 유명해져서 카메라 플래시가 제게 터지고 길에서도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는데, 이게 막연하게 제가 연기하면서 꿈꿨던 게 현실화 되는 순간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땐 그게 불편했어요. 환경이 달라지고 위치가 달라지니 부담이 엄청 커지더라고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이런 것도 겪어야 할 상황인 거죠. 후배들에게 종종 얘기해요. 네 인생의 역변이 올 때가 있을 거다. 그런데 그게 너의 힘으로 된 것일까? 전 아니라고 해요. 우리 모두의 힘이다. 그만큼 그 사랑에 대한 인사는 분명히 해야 한다고요."

그리고 그는 영화 <하울링>을 언급했다. 의외의 답이었다. 송강호, 이나영 주연의 해당 작품은 흥행에 실패했다. 그런데 이성민은 "인생의 화두를 던지게 한 작품"으로 주저 없이 꼽았다.

"제게 연기를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한 작품입니다. 송강호 형과 본격적으로 마주쳐서 달리는데 엄청 후달렸어요. 매일 밤 옥상에 올라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내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진단하게 됐어요. 그 시련이 엄청 힘들었는데, 한편으로 정말 반갑더라고요. 시련을 통해 나만이 아는 시련의 우울함이 있거든요. 메모장에 적어놨어요. '시련아 반갑다'고."

진단의 결과를 물었지만 끝내 그는 "영업 비밀"이라며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는 "강호 형(송강호와 이성민은 같은 극단 차이무 출신 - 기자 주)의 영향을 받았고 늘 그걸 목표로 했다"며 "형의 평범함 속 비범함, 그 강렬함을 따라가고 싶었는데, 다행이 이제 내 방식이 조금씩은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성민, 그는 대부분 보통 사람보다 약간 아래에 있을 법한 캐릭터를 품어왔다. 오상식 과장(<미생>), 최인혁 교수(<골든타임>)의 열등감 내지는 빈틈이 이성민을 만나 인간미로 승화됐다. <로봇, 소리>의 가부장적 아빠 이해관도 마찬가지다. 완벽하지 않은 평균 이하의 사람. "그런 캐릭터에 대한 측은지심 때문에 내가 사랑받는 거 같다"고 쑥스러워하며 그가 말했다.

"멋있는 것보단 평범함이 편한" 배우. 그리고 "늘 부족함을 느끼고 그걸 만회하고픈 마음이 있"는 배우다. 이 부족함에 대한 인식과 넘으려는 의지가 이성민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 아닐까. 이미 그는 송강호라는 산을 비껴, 자신만의 봉우리 하나를 세웠다.

 영화 <로봇, 소리>에서 아빠 김해관 역의 배우 이성민이 20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풍부한 경력을 자랑하는 그지만 "매번 연기할 때 부족함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미흡함에 대한 인식이 그가 연기하는 중요한 동력 중 하나였다. ⓒ 이정민



이성민 로봇, 소리 심은경 미생 이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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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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