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깃집. 아이가 갖고 놀던 공이 김영호(설경구 분)가 식사하던 자리 밑으로 들어간다. 공을 찾으러 온 아이에게 대뜸 개 흉내를 내는 김영호. 으르르릉. 다가와 사과하는 아이 아빠. 김영호와 눈이 마주친다. 서로 아는 사이. 하지만 아빠의 "안녕하세요"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다시 마주친 두 사람. 김영호 툭 한 마디 던진다. 삶은 아름답다, 그렇죠?

#2. 경찰서. 회식을 마치고 취조실, 아니 고문실로 들어온 김영호. "야, 임마, 진작에 그렇게 불었으면 고생 안 했잖아", 고문에 못 이겨 운동권 선배 위치를 털어놓은 대학생은 계속 흐느껴 운다. 선심 쓰듯 휴지를 갖다주며 옆에 앉은 김영호. 그의 말은 이랬다. "그런데, 내가 마지막으로 하나 묻고 싶은 게 있거든? 너 정말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니? 네가 일기에 그렇게 썼대. 삶은 아름다운 거라고."

노무현 전 대통령 등장시켰던 <바보 햄릿> 연출가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 배우 김경익은 영화에서 김영호(설경구 분)에게 고문을 당하는 대학생 박명식 역을 맡았었다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 배우 김경익은 영화에서 김영호(설경구 분)에게 고문을 당하는 대학생 박명식 역을 맡았었다 ⓒ 이스트 필름


영화 <박하사탕>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이다. 이 때 대학생으로 나왔던 배우 김경익, 이름은 낯설어도 그래서 그 얼굴이 잘 잊히지 않았다. 덕분에 영화 <타짜>에서 정 마담(김혜수 분)을 지키는 금이빨 보디가드로 다시 만났을 때 반가웠고, 작년 영화 <관계>에서 함께 출연한 일본 유명 AV 배우 토모다 아야카와 함께 이름이 오르내릴 때는 약간 당혹스럽기도 했다.

사실 김경익은 한국의 대표적인 햄릿 배우이자 그 실력을 인정받는 연극 연출가이기도 하다. 연극계 거목 이윤택의 연희단거리패에서 12년 동안 다양한 작품을 통해 내공을 쌓았고, 연극 <봄날은 간다>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등장시킨 <바보 햄릿>으로 호평을 받았다. 아리랑과 햄릿을 결합시킨 <아리랑 랩소디> 또한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현재 극단 '진일보'의 대표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6·29가 보낸 예고 부고장>을 통해 다시 배우로 돌아왔다. 1966년 창단한 극단 '광장'의 50주년 기념작으로 오는 29일까지 공연된다. 6월 항쟁으로 독재는 타도됐지만 오히려 자신의 삶은 무너져 버린 한 남자와 그 친구들을 통해 기성세대의 현주소를 되짚어보는 내용이라고 했다.

흥미로웠다. 1968년생, <박하사탕> 출연 당시 우리 나이로 서른 둘. 영화에서처럼 젊은 아빠일 수 있는 나이였고, 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고문을 받았던 대학생이 한참 후 <6·29가 보낸 예고 부고장>에 다시 자신의 나이, 마흔 여덟에 꼭 맞는 이야기로 돌아온 셈이다. <박하사탕>과 통하는 지점이 있을 듯 했다. 당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난 18일, 대학로 한 카페에서, 다시 자리를 옮겨 마로니에 공원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 <박하사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난 3월 '마침내' 결혼했다는 것. 그는 "그래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지 않았냐"며 웃었다. 삶은 아름답다, 그렇죠? <박하사탕>의 김영호와 같은 질문을 하려다 일단 꾹 참았다.

<박하사탕>의 그 대학생, 이번에는 '설경구'가 되다

 극단 진일보 대표 김경익 인터뷰

극단 진일보 대표 김경익 인터뷰 ⓒ 한승호


- 아무래도 요즘 공연 때문에 바쁠 것 같습니다.
"<6·29가 보낸 예고 부고장> 외에도 5월에 부산국제연극제에 <바보 햄릿>을 올리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아리랑 랩소디>는 가을에 다시 선보일 예정이고요. 영양가가 없어 그렇지, 바쁘긴 많이 바쁩니다(웃음)."

- <6·29가 보낸 예고 부고장> 어떤 작품인지 소개해주시죠.
"세 친구가 대학생 때 영웅이란 주인공을 경찰에 팔아먹습니다. 데모 안 했던 친구니까 별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그로 인해 영웅이와 그 집이 박살나요. 그리고 30년 후 친구들에게 영웅이가 부고장을 보냅니다. 그래서 늙수그레한 친구들이 모였는데, 과거의 비밀들이 다 까발려지죠. 젊은 시절의 순수함이 어떻게 오염되고 변형됐는지, 6월 항쟁 때 젊은 청년들이 기성 세대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면서 데모했는데, 과연 지금 그들은 사회적 책임을 다 하고 있는가, 그런 물음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 지금 왜 다시 6·29일까. 고루해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6·29가, 6월 항쟁이 시효가 지났을까요? 아닌 거 같거든요? 아직도 숨겨진, 숨겨놓은, 참 순수했던 열정들이 여전히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직 유효 상실은 아니라고 봅니다. 연극이 사람을 선도하거나 계몽할 수는 없지만,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는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젊은 친구들과 함께 연기하고 있는데, 그 때 왜 그랬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주면, 왜 분신까지 하면서 자신과 미래를 내던졌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연습을 하다보면, 이 친구들이 흥분해요. 진짜 흥분해요. 불의에 대한 저항, 그 DNA는 누구한테나 다 들어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들어요."

- 이번에 맡은 역할은?
"종기라는 역할인데요. 옛날 굉장히 열혈 운동권 학생이었는데, 지금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뒤로 돈 받아먹는 놈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철저히 자기 합리화를 하는 그런 놈, 끝까지 반성 안 하는 놈입니다. 나쁜 놈인데 돌이킬 수가 없는 거죠."

"한 발만 더 내딛자, 그래서 진일보"

 오는 29일까지 대학로 예술마당 1관에서 공연되는 연극 <6.29가 보낸 예고 부고장>. 6월 항쟁으로 독재는 타도됐지만 오히려 자신의 삶은 무너져 버린 한 남자와 그 친구들을 통해 기성세대의 현주소를 되짚어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는 29일까지 대학로 예술마당 1관에서 공연되는 연극 <6.29가 보낸 예고 부고장>. 6월 항쟁으로 독재는 타도됐지만 오히려 자신의 삶은 무너져 버린 한 남자와 그 친구들을 통해 기성세대의 현주소를 되짚어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 김경익 제공


- 자연스럽게 <박하사탕>이 떠오르네요. 김영호(설경구 분)와 비슷한 역할인 것 같습니다. 그 영화에 출연하셨는데?
"기억을 해주시는구나(웃음). 김영호는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정리했지만, 종기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끝까지 반성 안 하는 캐릭터죠. 반성하는 순간, 스스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니까."

- <박하사탕>과 함께 나이를 먹는 세대로서 그 후 어떻게 지내셨는지?
"<박하사탕>에 15분 출연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대종상 조연상 후보가 됐어요. <해피엔드>의 주진모와 함께(웃음). 그런데 전 그것도 모르고 밀양에서 츄리닝 바람으로 연극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만큼, 저한테 연극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이윤택 선생님과 연희단거리패에 뼈를 묻을 생각이었어요. 독일이나 폴란드 가서 연극 공부도 했어요. 그러다 선생님과 마지막 지점이 안 맞는다 싶어 '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하고 극단에서 나왔어요.

그 후 영화나 방송에 띄엄띄엄 출연하면서 지냈는데...어느 날이었어요. '누가 감히 안다 하느냐, 누가 감히 깨우쳤다 하느냐,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라'는 글귀를 일기장에서 봤어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극을 통해 연기를 배워먹고 살고 있는데, 연극을 위해서 난 뭐했나'. 누군가 날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거다. 내가 가진 걸로 한 발만 더 내딛자. 그래서 극단을 만들었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이윤택 선생님과는 그럼?
"선생님과 12년을 함께 했는데, 욕 한 번 들어본 적 없고, 저를 그렇게 존중해주셨어요. 저도 그래서 더욱, 정말, 제 젊음을 아낌없이 함께 했고요. '너랑 나랑 오랫동안 사선을 왔다갔다'했다, 선생님 말씀이었죠. 그런데도 제가 나간다고 하니까, 또 정말 '쿨하게' 보내주시더라고요. 가끔 인사드리고 하는데, '그만 말아먹고 들어와' 그러십니다(웃음)."

- 연극하기 전에 멀쩡한 직장에 다니셨다고 들었는데요.
"파크랜드 수출부에 있었어요. 스물 아홉 살까지 있었는데, 15층 건물이었거든요? 밑을 내려다볼 때마다 개미들이 왔다갔다하는 것 같았어요. 차는 꽉 막혀 있고. 물론 일상적인 삶이 잘못된 건 아니죠. 그래도 '야, 이거 한 번 사는 건데, 나는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사직서를 냈죠."

"통일이 대박이라고? 연극, 반드시 동시대에 응전해야"

 극단 진일보 대표 김경익 인터뷰

극단 진일보 대표 김경익 인터뷰 ⓒ 한승호


- 극단은 어떤 생각으로 만들게 됐는지?
"비틀즈, 파워 투 더 피플(Power to the People), 1960년대 중반 자본주의 핵심에서 '권력을 민중에게'라고 노래했잖아요. 이매진(Imagine)도 마찬가지죠. 소유가 없는 세상을 생각해보라고, 이거 공산주의거든요? 그런데 너무 아름답게 이야기하니까 사람들 머릿속에 남아있게 됩니다. 그게 예술이고, 예술의 순기능이라고 생각해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재창조해야 하는 거죠."

- 공감에 대한 이야기 아닌가 싶네요.
"그렇습니다. 연극은 굉장히 동시대적인 장르입니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로, 좋은 기계로 기록을 남겨도, 현장에서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면서 나눴던 교감은 기록될 수 없어요. 연극 3요소에 관객이 들어가는 것도 그래서죠. 관객이 필요로 하는 것, 또 반 발짝 앞에서 제시해야 하는 것들, 이런 걸 당연히 예술이 해야 합니다. 더구나 연극은 동시대에만 유효하죠. 반드시 동시대에 응전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 어려운 점이 있어요. 세상이 하도 빨리 바뀌잖아요. 현실을 이야기하려면 현실을 읽어야 하는데, 그래서 옛날에는 그 시대에 대해 경고할 수도 있고 또 뭔가 제시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연극이 그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워요. 어떻게 보면 뒷북만 치고 있는 셈이죠. 그래서 저는 상업극과 이른바 운동권 연극, 그 사이에 어떤 고급스러운 접점을 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극단 이름도 한 발 만 더 내밀자는 뜻으로 진일보라고 했습니다."

- <바보 햄릿> 관련 인터뷰에서 "이건 정치적인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고 하셨잖아요. 그 말이 떠오르네요.
"<바보 햄릿>은 노무현을 찬양하는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햄릿, 원래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복수를 하겠다는 이야기잖아요. 억울하게 죽은 왕, 노무현의 진짜 뜻을 헤아리자는 거였죠. '나를 버리셔야 합니다'는 그 말, 어떤 맹종이 아니라 깨어있는 시민으로 너의 길을 가라는 거잖아요. 복수를 위해 방방 뜨라는 게 아니잖아요. 깊지 않은 헤아림, 그에 대해 비판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이야기입니다."

- <아리랑 랩소디>에서는 햄릿과 아리랑을 결합했습니다.
"아리랑이 정말 무서운 노래거든요. 밥 먹다가 부르는 노래는 아니잖아요. 일상을 넘어서는 기쁨이나 슬픔이 있을 때 항상 이 노래가 나오잖아요. 옛 노래라고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리랑에 현대 음악 코드를 딱 접목시키니까 엄청나게 역동적인 에너지가 나와요. 한국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을 아우르는 울림이란 말이죠.

이게 바로 통일의 노래가 아닌가. 미래 한국의 애국가가 아닐까. 그래서 뮤지컬, 음악극 작업을 하고 있는데, 나중에는 유랑 극단 형태로 북한에 가서 공연하고 중국 등 대륙을 가로지르고 싶습니다. (지금 정권에서는 힘들겠다는 말에) 통일 대박이란 말 자체가 굉장히 어폐가 있죠. 별 노력하지 않고 잭팟처럼 갑자기 터지는 게 대박이잖아요. 공을 들이고 땀을 흘려야 얻는 결과지, 결실이죠, 통일은."

"이런 시대에 빛이 나는 게 정신이죠"

 김경익 배우 겸 연출가

김경익 배우 겸 연출가 ⓒ 한승호


- <박하사탕>, 그 때와 달리 억압의 주체가 잘 보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더욱 깨어있는 개별 인간들의 각성, 그 작은 실천들이 누적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좌우라든지 군부-민간 이런 개념이 아니잖아요. 현재 시스템을 쥐고 있는 상위 2%와 나머지 98%의 싸움인 것 같아요. 설국열차죠, 그러니까."

<박하사탕>에서 기차가 거꾸로 달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당초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6·29가 보낸 예고 부고장>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산하 한국공연예술센터가 운영하는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무대장치 긴급 보수를 이유로 갑자기 일시 폐쇄되면서 공연장이 대학로 예술마당 1관으로 바뀌었다.

김경익씨는 현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서울연극협회에 대한 교묘한 억압이라고 주장했다. 미운 털이 박힌 탓에 정치적 논리가 개입됐다는 것이었다. 마로니에 공원 쪽으로 걷다가 마주친 문화 게시판 옆면에 이런 글귀가 눈에 띄었다.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다.

- 시대가 정신적 희망을 갉아먹고 있네요.
"그때 빛이 나는 게 정신이죠."

○ 편집ㅣ이준호 기자


김경익 박하사탕 설경구 6.29가 보낸 예고 부고장 햄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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