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슬>의 한 장면. 동굴 속으로 피난한 마을 주민들

영화 <지슬>의 한 장면. 동굴 속으로 피난한 마을 주민들 ⓒ 부산국제영화제


제주 4.3사건을 다룬 극영화 한 편이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섹션에 소개된 <지슬>은 제주 4.3사건을 다룬 극영화다.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 동굴로 피신했던 마을 주민의 실화를 근거로 만들어졌다. 영화 변방 제주에서 특별한 지역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지슬'은 감자의 제주 방언이다.

이 영화는 한국현대사의 아픔인 제주 4.3사건을 다뤘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영화의 변방 제주에서 만들어진 '제주영화'란 부분도 특별하게 보인다. 특히 한국 영화로는 드물게 한글 자막이 등장한다. 날 것 그대로의 제주 사투리가 대사로 이어지기에 자막이 없으면 주민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슬>은 4.3사건 당시 제주의 현실을, 마을 주민 개개인의 소소한 일상을 통해 담담하게 그려냈다. 투박해 보이는 흑백 화면은 어두웠던 당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전하며, 4.3사건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4.3사건 비극에 대한 부채 의식이 깔려 있는 듯 애달픈 감정이 전달된다. 영화 자체가 4.3사건 희생자들을 위한 진혼곡이자 씻김굿이다.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제사

마을 사람들이 군인들을 피해 산속의 좁은 참호에 하나 둘 모여드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해안선 5km 밖에 있는 주민들은 모두 폭도로 간주한다"는 군의 소개령에, 갑자기 폭도가 된 이들은 일시적으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다. 마을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좁은 공간에서 내내 있을 수는 없는 일. 주민들은 가족을 데리고 조금 더 안전한 장소를 찾아 근처의 동굴로 피신한다. 잠시만 몸을 피하면 난리가 수습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순진한 판단이었다. 소개령을 거부하는 순간, 군인들에게 그들은 평범한 주민이 아닌 폭도 무리일 뿐이다.

 영화 <지슬>을 연출한 오멸 감독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가 상영된 직후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영화 <지슬>을 연출한 오멸 감독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가 상영된 직후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부산국제영화제

임산부에 어린아이, 나이든 동네 삼촌 등등 삼삼오오 좁다란 동굴 안에 모인 이들은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며 하루빨리 난리가 진정되길 기다린다. 하지만 동굴 속 분위기 만큼이나 희망은 어둡기만 하다.

그 사이 폭도로 규정된 마을 주민들을 찾아 나선 군인들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잔인한 살상을 끝없이 자행한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빨갱이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한 하사관의 시선은 섬뜩한 느낌으로 전달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지슬(감자)은 삶을 지탱하는 수단이자, 죽음의 원인이기도 하다. 동굴 속 피난 생활의 주민들에게 요긴한 식량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과정에 이르게 하는 회한의 대상이다.

군인들이 불태운 집에서 가족을 잃은 채 감자만 챙겨 동굴로 돌아오는 무동이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으나, 양식이 부족해 배고파하던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지슬>은 4.3사건 당시의 주민과 군인들에게만 오롯이 초점을 맞춘다. 폭도들을 찾아나선 군인들의 심적 갈등도 드러난다. 좁은 동굴 속에 모여 있는 주민들의 대화를 통해서는 그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젊은 청년은 마을 처녀 누군가를 좋아하고, 동네 삼촌은 굶고 있을 돼지가 신경 쓰이고, 나이든 노모를 남겨 놓고 온 가장은 어머니가 계속 신경 쓰일 뿐이다. 어디에도 이념이나 사상은 보이지 않는다.

4.3사건에 대한 끊임없는 왜곡, 그리고 강정마을

순박한 주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최후의 순간으로 몰리는 모습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공식통계로 당시 제주에서 희생된 사람은 3만여 명. <지슬>은 4.3사건 당시 피해 입은 영혼을 위로하는 상생굿을 펼친다. '신위, 신묘, 음복, 소지' 등으로 구성된 4개의 장은 이 영화가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위로이자 제사임을 알려준다.

오멸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영화"라며 "함께 달을 바라봐 달라"고 요청했다. 그 달을 보는 순간, 솟는 뭉클한 감정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국가권력의 폭력 앞에 희생된 사람들의 아픔이 절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영화 <지슬>의 한 장면 ⓒ 자파리필름


제주 4.3사건에 대해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차원의 공식사과를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이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군이 4.3사건을 두고 "무장 공비의 폭동 진압"으로 표현해 희생자 유가족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또한 정부가 해외에 배포하는 홍보책자에 4.3사건을 '제주폭동'으로 표기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영화 <지슬>은 이런 역사 왜곡 시도에 대한 정면 반박으로도 보인다. 그만큼 영화 속 마을 주민들을 통해 드러나는 제주 4.3사건은 깊은 여운과 충격을 남긴다. 흑백 영상이 주는 이미지는 강렬하다.

한편 <지슬>은 제주 1948년 4.3사건과 현재 제주에서 큰 갈등을 빚는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 투쟁이 맞닿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국가권력의 일방적인 통고에 어느날 갑자기 폭도로 취급당한 채 삶터에서 내몰리는 4.3사건 당시 주민들 모습은, 지금 강정마을에서 벌어지는 국가권력의 폭력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국가권력의 일방적 결정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양민을 무고하게 학살하고 집을 불태우는 행동은, 경찰력을 동원해 강정주민들을 일방적으로 내모는 지금의 행태와 겹쳐진다. 제주 4.3사건과 강정마을은 60년의 세월이 흘러 그렇게 접속되고 있다. 

문재인 후보에게 <지슬>을 추천하는 이유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참여정부는 제주 4.3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하면서 피해자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하지만 강정마을의 아픔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특히 강정마을 해군기지에 대해 문재인 후보는 "마음이 빚이 있다"고 밝혔다. 그만큼 참여정부에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추진은 참여정부 때 결정됐다. 

 1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문재인 후보

1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문재인 후보 ⓒ 이정민

4.3사건 진실을 왜곡해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에 맞서는 것 못지않게, 강정마을에 대한 책임의식이 필요함을 이 영화는 말해준다. 

마침 <지슬> 제작에 참여한 한 스태프는 트위터를 통해 문재인 후보에게 영화 관람을 정중히 요청하기도 했다. 치유와 화해의 걸음이 되려는 이 영화에 문 후보가 화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 후보님.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지슬>이라는 영화를 상영합니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로 제주인들이 만든 영화입니다. 저는 제주사람은 아니지만, 이번 영화를 촬영하며 실제 피해자분들을 만나 실상을 들으며 많이 힘들었습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님의 진심어린 사과로 어느 정도 치유를 받았던 제주도민들이 최근 강정마을 사태나, 일부 우익단체와 군의 '폭동' 명명 등으로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4.3사건 대해 분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저 소소한 그들의 이야기로 상생과 치유, 화해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치유의 영화가 작지만 화해의 한걸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말 많이 바쁘시겠지만 문 후보님께서 잠시라도 시간을 내 이 영화를 관람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작은 영화를 계기로 다시는 이 땅에서 4.3사건과 같은 일이 우리 후손들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덧붙이는 글 성하훈 기자는 2012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대선특별취재팀입니다.
부산국제영화제 BIFF 지슬 오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