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리그 풀럼 FC의 홈 구장 크레이븐 코티지(Craven Cottage). 2007년 벽두에 열린 대한민국과 그리스의 친선경기에 모여든 팬들은 90분 동안 단 한 골만을 볼 수 있었다. 1-0으로 대한민국이 승리를 거둔 이 경기의 결승골은 후반 32분경 터진 이천수의 프리킥 골이었다.

아크 정면에서 왼쪽으로 25m 지점, 이천수의 발끝을 떠난 공은 유연하면서도 강하게 휘어져 그리스 팀 골대 왼쪽 상단에 꽂혔다. 환호하는 이천수를 보며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천수, 유럽행 성사!'

그는 자신이 프리킥 전문가라는 것을 이미 2006 독일월드컵 토고전에서 세계에 알린 바 있었다. A매치에서 연속으로 프리킥 골을 성공시킨 것은, 유럽행을 위해 다양한 클럽의 문을 두드리던 그에게 분명히 호재였다.

무연봉 입단 제시... 이천수의 '굴욕'?

 2006 독일월드컵 토고전에서 골을 넣고 기뻐하는 이천수

2006 독일월드컵 토고전에서 골을 넣고 기뻐하는 이천수 ⓒ 국제축구연맹

2003년부터 2005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레알소시에다드와 누만시아에서 실패한 후, 유럽행을 간절히 원하던 그는 결국 네덜란드 리그(에레디비지에) 우승컵을 14회나 들어 올린 명문 페예노르트로 전격 이적했다.

시작은 역시 상쾌했다. 항구도시 로테르담에 닻을 내린 이천수를 국내 팬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팬들도 한 몸이 되어 응원했다. 홈구장인 드카윕을 메운 관중들은 꽤나 자주 '리(Lee)'를 연호했다. 등번호 16번을 단 그는 여전히 빨랐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렇게 초반은 괜찮았다. 날카로운 돌파도 많이 보였고, 크로스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팀의 공격스피드를 늦추지 않는 미드필더로서 부드러운 움직임도 수준급이었다. 절치부심한 그는 이번에는 정말 성공할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상승세는 거기까지였다. 기다리던 골 소식은 없었고, 출전시간은 줄어들었다. 이내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천수의 네덜란드 진출로 중계권을 확보한 방송사만 무색해졌다. 결국 그는 다시 한국행 짐을 싸고 말았다. 복귀 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던 그는 수원삼성에서도 방출통보를 받고 임의탈퇴 신분이 됐다.

이제 연봉을 백지 위임한 상태로 전남 드래곤즈 입단에 대한 최종 결정만 앞두고 있다. 이에 <스포츠동아>는 24일자 기사에서 '이천수의 굴욕'이라는 제목으로 전남에서 무연봉 입단을 제시 받은 이천수의 처지를 다소 과장된 어조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독기 품겠다? 이제 그럴 필요 없다

축구선수뿐만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가 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인생의 흐름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올라가느냐와 어떻게 내려오느냐의 차이다.

청소년 대표로 시작해 벨기에리그, 잉글랜드 2부 챔피언십리그, 프리미어리그까지 성실하게 경험을 쌓은 설기현(물론 지금은 사우디리그로 이적했다)이 착실히 올라가는 과정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유종의 미를 거둔 황선홍(현 부산 아이파크 감독)이 최고의 자리에서 명예롭게 내려온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벌써 이천수도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이다. 그렇다고 이천수가 지금 내리막길에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본인의 위치를 제대로 결정하지 못할 경우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내려올 때라면 그것에 알맞은 생각을 해야 하고, 올라갈 때라면 역시 그에 합당한 행동과 결정을 해야 한다. 경험과 실력이 합쳐진 축구인생의 황금기를 보내야 할 나이에, 뛸 만한 팀이 없어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없다.

과거 안정환도 그랬고, 고종수도 그랬다. 본인의 실력과는 상관없이 다른 문제로 제 실력을 펼칠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다. 이천수는 어느 팀이든 들어가서 안정적으로 경기를 뛰어야 한다. 세간의 냉정한 평가에 귀를 기울이며, 몸을 낮추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나는 특별한 선수'라는 특권의식을 조금이라도 가진다면 앞으로의 미래는 어둡다.

24일 <스포츠 칸>과 한 인터뷰에 따르면 이천수는 다시 '독기'를 품겠다며 자신의 새로운 각오를 밝혔다. 그런 이야기는 지겹다. 이제 눈에 독기를 품고 세상과 싸울 나이는 아니다. 그렇게 독을 품고 볼을 찬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축구 자체를 즐기면서 동료를 도와주는 마음으로 임했을 때 본인의 출중한 실력이 다시 빛을 발할 수 있다.

전남 드래곤즈 무연봉 입단, '굴욕' 아니다

 수원에 입단한 이천수가 차범근 감독과 악수를 하고 있다.

2008년 수원에 입단 당시 이천수, 차범근 감독과 악수를 하고 있다. ⓒ 수원삼성 블루윙즈


이천수도 이제 각종 비판에 신물이 났을 것이다. 축구전문가나 선배들이, 모범적 인생을 사는 선수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조언도 답답할 것이다. 이해한다. 그러나 그 비판이 감정적인 배설이 아닌 합리적인 의견이라면 아무리 비판이라고 해도 경청하는 것이 스타 선수의 몫이다.

이천수에 대한 나의 바람은 한결같다. 그저 '축구만' 했으면 좋겠다. 골을 넣기 위해 독기를 품기보다, 그저 웃고 즐기면서 자신의 재능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복잡한 사생활이나 이기적인 훈련자세도 이제는 바꿨으면 한다. 본인의 삶이니 상관하지 말라고 항변하면 어쩔 수 없지만, 축구선수로서 성공을 아직 바라고 있다면 이제 마음을 활짝 열 때가 됐다.

분명 그도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연속된 실패와 자신이 내뱉었던 말들 때문에 이천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사는 것조차 힘들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의 부담을 좀 덜어주고 싶다.

'이제 사느냐 죽느냐'의 이분법적 사고로 축구를 하는 시대는 지났다. 독기 품고서, 앞뒤 재지 않고 도전하는 나이도 지났다. 꼭 최고가 될 필요도 없다. 한국 축구, 그 대의를 위해 재능을 써달라고도 말하지 않겠다.

다만, 축구선수로 태어나 팬들의 사랑을 한껏 받은 선수로서, 그것을 갚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또한 앞으로 그의 축구인생이 올라가는 길이든 내려오는 길이든 후배들과 팬들을 위해 좋은 귀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야만 한다.

꼭 외국 리그에 나갈 필요도 없다. 화려한 시절을 생각하며 국가대표 선수를 고집할 것도 없다. 그저 이천수라는 선수가 아직도 살아있음을 국내외에 알리고, 그 감각적인 프리킥으로 팬들과 호흡해주면 된다. 사실 이 정도는 그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일은 순조롭게 풀릴지도 모른다.

타고난 재능 덕분에 젊은 나이에 다른 선수들보다 크게 성공한 것도 사실이다. 한번쯤 몸을 한껏 낮춰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굴욕'은 아니다. 오히려 성숙하지 못한 젊은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매서운 날씨의 런던, 크레이븐 코티지에서 보았던 이천수의 프리킥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사랑이 없으면 비난도 없는 법이다. 애증 섞인 감정이지만, 팬들은 아직도 그를 그리워 한다. 비난과 사랑이 동시에 뒤섞인 그 그리움을 다시 응원과 환호로 돌리는 것은 오로지 그의 자세에 달렸다. 단, 팬들은 이제 더 이상 오랜 시간 그를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드리블하는 이천수 드리블하는 이천수

이천수, 독기는 필요없다. 이제 축구를 즐겨라. ⓒ 남궁경상


이천수 성숙 전남 드래곤즈 설기현 프리미어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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