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1

2002년 6월 대전 월드컵 경기장. 118분의 사투 끝에 파마를 한 안정환의 머리에 공이 걸렸다. 그리고 그 볼은 부폰이 지키고 있는 골대의 왼쪽 모서리로 소름끼치게 빨려 들어갔다. 대한민국 월드컵 8강 진출.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예선전인 미국 전에서 그가 넣었던 동점골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자신이 골을 넣은 건지도 몰라서 한 바퀴를 구른 후에야 골뒤풀이를 하러 갔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골을 넣고 반지에 키스를 하며,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에 뒤범벅 되어 사진기자들이 밀집한 지역에 그냥 드러 누워버렸다. 사람들은 '반지의 제왕' 안정환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2002년 그는 말 그대로 제왕이었다.

# 장면2

2007년 모 축구 연습장. 트레이닝 차림의 안정환이 볼을 차고 있다. 낭인 안정환의 뒷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 났다. 화려했던 2002년 월드컵이 끝난 후, 그는 이탈리아전에서 결승골을 넣었다는 죄 아닌 죄로 세리에A 페루지아에서 강제로 방출당했다. 그리고는 일본 J리그 시미즈 S펄스, 요코하마 F마리노스에서 활약하다 프랑스의 FC메스, 독일의 뒤스부르크를 전전했다.

르샹피오나에서는 16경기에 출장해 2골을 넣는데 그쳤고, 분데스리가에서는 단 12경기 출전에(선발 3경기) 2골 1어시스트만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이름값에 비해서는 분명 부족한 수치였다. 하락세를 걷던 그는 급기야 독일월드컵이 끝난 후에는 무적(無籍)의 선수가 되어버렸다. 한때 제왕 칭호를 받았던 그는 나그네 신세가 되어 버렸다.

과감하게 유럽행을 포기한 안정환

▲ 지난해 한 평가전에서의 안정환 선수
ⓒ 오마이뉴스 권우성
운칠기삼. 그를 생각하면 이 단어가 떠오른다. 그는 정말 더 좋은 팀으로 갈 수는 없었을까. 2006년 독일월드컵 토고전에서도 과감한 중거리 슛으로 대한민국의 1승을 이끌었던 그다.

당시에도 테크닉과 경기를 읽는 눈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나 월드컵이 끝난 후 그는 유럽 명문팀으로 재진출하려는 본인의 높은 이상과 현실의 냉혹함 사이에서 고민하는 선수일 뿐이었다. 그의 명성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는 팀은 아무 곳도 없었다.

"현애살수장부아(縣崖撒手丈夫兒)."

벼랑에 매달렸을 때는 손을 놓을 줄 알아야 장부라고 했다. 안정환은 과감히 유럽행을 포기했다. 그리고 수원을 택했다. 더 지지부진 하다가는 축구인생이 위험했다.

그리고 소속팀이 없다는 불안함에 대표팀까지도 그를 외면하는 상황에서, 수원 삼성은 나그네 안정환을 따뜻한 환대로 맞았다. 본인도 수원을 발판 삼아 다시 유럽에 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초반 그의 플레이는 더뎠고, 생각만큼 존재감도 덜했다. 물론 3월 4일 대전과의 하우젠컵 첫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긴 했지만, 차범근 수원 삼성 감독도 안정환의 플레이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본인 역시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자연히 그의 출전 시간도 줄었다. 부동의 스트라이커라고 말하기엔 부족함이 많았다.

사실 선수가 오랜 기간 동안 팀을 떠나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어찌보면 위험한 일이다. 더군다나 안정환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76년생) 더욱 그렇다. 게다가 안정환이라는 세 글자는 축구팬들에게는 높은 수준의 이름이다. 그런 그가 부정확한 패스와 둔한 움직임을 보이니 팬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실전 감각이 많이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랬던 그에게 청신호가 켜졌다. 그가 조금씩 기량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신호는 한국 축구 전체에도 청신호다. 그는 지난 5월 30일 성남 일화와의 컵대회 6강 플레이오프에서 동점골을 넣으면 부활의 신호탄을 날렸다. 움직임이 세련돼 졌고, 골과 비슷한 상황도 여러 차례 만들어냈다.

골을 넣은 그는 "주워 먹었다"고 말했지만, 그의 발 아웃사이드에 걸린 공은 분명 날카롭게 성남 김용대 골키퍼의 왼쪽 구석을 찔렀다.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본인도 "실수가 줄었다는 것에 만족한다"고 밝혔다. 사실 그럴만도 하다. 한국 축구의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선수로서 현재 자신의 위치나 플레이에 만족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이는 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안정환은 잉글랜드의 수퍼스타 데이비드 베컴 (David Beckham) 같은 선수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즐기고, 광고나 화포 촬영 등 축구 외적인 일도 그리 마다하지 않는 부류다. 몇몇 선수들은 다른 일을 병행하면 축구 실력이 떨어지거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는데 안정환이나 그런 부류가 아니다. 화보 좀 찍는다고 베컴의 오른발의 예리함이 무뎌지는 것도 아니고, 화장품 광고를 찍던 당시 안정환은 전성기였다.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안정환은 그만큼 개인 관리에 뛰어나다는 말이 된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선수라는 뜻이다. 그는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도 피치(Pitch) 위에서는 최고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다. 이제 그의 몸이 점점 올라오는 신호가 보여 다행이다.

이번 여름 쉬는 기간에 몸 상태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린다면 반지의 제왕의 귀환도 그리 먼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가 게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없는 응원을 보내주는 일일 것이다. 이번에 실력을 회복하지 못하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난 29일 대 이라크전에는 안정환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해외파도 아니고, 부상도 아닌데 그는 대표팀에서 빠졌다. 본인은 아닌 척 하지만 그도 자존심 꽤 상했을 것이다.

8월 8일 수원은 전북과의 경기로 하반기 리그를 시작한다. 90년대와 2000년대를 잇는 국가대표 스트라이커 안정환이 그 시간까지 몸 상태를 끌어올려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그에게 있어 이번 여름은 정말 중요하다.

"2002년 당시 안정환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테크닉도 굉장히 뛰어났다. 비밀을 알려준다면 기꺼이 배우겠다." - 티에리 앙리(바르셀로나), 조이뉴스 보도
2007-06-30 15:57 ⓒ 2007 OhmyNews
안정환 반지의 제왕 축구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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