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기간에 이런 딴짓을 추천합니다

중간고사 기간에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을 읽다

등록 2021.04.22 08:34수정 2021.04.22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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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거나 고3 수험생이라면 얼른 이 글을 닫길 권해드린다. 중요한 시기에 달콤한 유혹이나 핑곗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지금 막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역자 해설과 참고문헌까지 포함하면 8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었으니 마지막 장을 덮고는 얼마나 뿌듯했겠는가.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내가 여유롭게 책이나 읽고 있을 팔자가 아니란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보와 빈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장소는 도서관 열람실 안이었고, 나는 중간고사 시험을 당장 코앞에 둔 대학생이었다. '대학생이면 어때, 좋은 책 읽으면 됐지'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교양 하나 끼어들 틈 없이 전공으로 빼곡한 시간표에 시달리는 고학년인데다가, 대학생이 큰 잘못을 하면 가게 된다는 대학원을 준비할 정도의 연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보는 시각이 좀 달라지실 것이다. 실제로 책을 덮고 기뻐하며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모습을 본 친구가 내게 던진 말이다.

"정신 못 차렸네. 공부 안 해?"

그런데 어쩌겠는가. 평생을 미루던 집안 대청소조차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 시험 기간에 전공책은 도저히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시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이 눈에 들어왔는데 말이다.

어쨌든 두꺼운 책을 다 읽었으니 어느 정도 머리에 남은 건 있을 테니까 이득 아닌가? "대학생이면 대학생답게 주입식 교육에 종속되지 말고 스스로 개척적인 공부를 하란 말이야"라는 말로 친구의 말을 받아치고 스스로를 자위한다.


<진보와 빈곤>은 19세기 토지에 대한 단일조세를 주장해 큰 파장을 일으켰던 헨리 조지의 저서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릴 만큼 인기를 얻었고, 부동산 문제로 시끄러운 시국에 간혹 헨리조지의 사상을 내세우며 부동산 문제의 해결을 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정도인 책을 어쨌거나 읽었다. 내겐 가깝지만 먼 당신과도 같은 전공시험이 괴롭히는 시험기간이 아니었다면 이런 책을 과연 읽을 수 있었겠는가? 장담해서 말하지만, 절대 아니다. 책의 내용을 메모하고 밑줄을 그어가며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연코 시험기간에 읽었기 때문이다.

'시험기간에 책을 읽다니, 미친 짓이야'라는 소리를 들어도 무방하지만, 독서의 또다른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수 개월 동안 써지지 않는 글 앞에 애꿎은 종이만 버려가는 작가 앞에 마주한 마감시한이 초월적인 창작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처럼, 시험이라는 또다른 마감 앞에 마주하며 갖는 독서의 시간은 여유로울 때 갖는 독서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남들은 다 시험공부에 몰두하는 알 수 없는 긴장이 가득한 도서관에서, 물 한 컵 옆에 두고 느리더라도 진득히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서의 시간 또한 그 못지 않는 즐거움과 지식을 선사한다.
 
"노인 목수가 그리는 집 그림은 충격이었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반대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 故 신영복의 '처음처럼'에서 인용

전공 지식은 시험이 끝나면 사라진다. 중간고사를 위한 정보를 쌓아두었던 머리는 기말고사를 위해 비워져야 한다. 지붕을 먼저 그려진 집과 같다. 보여지는 상부 구조에만 치중해 정작 중요한 집을 지탱하는 요소는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읽은 <진보와 빈곤>, 헨리 조지가 말하는 토지사상과 분배사상은 주춧돌로 작용되는 지식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 굳건히 자리잡아 지식이라는 집을 지탱하고 오랜시간 보존한다.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나의 삶에서 지식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부동산 문제가 심각하다는데, 수요와 공급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기존의 관점보다는 다른 관점으로 부동산 문제를 바라보며 나만의 생각을 구축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또한 헨리 조지가 빈곤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고 오늘날의 풍요 속의 빈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렇다고 한다면, 단순히 시험 범위를 외우는 데 사용한 시간보다는 책을 읽으며 나만의 생각을 만들어가는 시간이 장기적 관점에서는 더 귀하고 의미있을 것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만일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다면, 그러나 정보는 쌓여가지만 지식은 비어가는 허무함을 느낀다면, 조금씩 짬을 내서 지식을 쌓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내게 있어 그 방법은 독서였지만, 사람에 따라 방법은 다를 것이다. 과하면 안 되겠지만, 적당하고 머리를 식혀줄 정도라면 오히려 공부 효율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 거라 장담한다.

최소한 무의미한 영상을 보며 헛웃음을 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정보가 아닌 지식을 쌓아갈 때, 쌓여가는 지식을 통해 삶에서 지혜가 발휘될 때, 그보다 즐겁고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시험기간에 읽었던 책 한 권에서 나온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나를 위해 쌓는 지식은 행복을 줍니다. 빠듯한 시간 앞에 여유없는 생활을 보내시나요? 잠깐의 딴짓을 통해 작은 즐거움 어떨까요. 작은 즐거움은 큰 힘듦을 이기게 해준다고 믿습니다.

진보와 빈곤 - 개정판

헨리 죠지 (지은이), 김윤상 (옮긴이),
비봉출판사, 2016


#독서 #독서의즐거움 #빠듯한시간속에서독서 #의미있는딴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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