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의 4월,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를 찾아 걷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꽃처럼 피어난 국난 극복의 희망

등록 2021.04.21 09:31수정 2021.04.2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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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 절기를 반기며 임실의 봄은 상이암을 품은 성수산 정상으로 향하고 있다. 성수산 기슭 600m 고지는 나무들의 새싹이 찻잎처럼 빛이 난다. 그러나 성수산의 9부 능선인 800m에 군락을 이룬 졸참나무는 아직 싹이 보이지 않는다. 876m 높이의 성수산에도 봄은 여러 층계를 이룬다. 봄이 한창인데 같은 산에서도 아직 봄이 아닌 곳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4월 1일, 한양의 의금부 감옥에서 나온다.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경상도 초계에 있는 권율 도원수 진영을 향하여 548km의 장거리를 한 걸음씩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장군은 백의종군길 도중에 어머니를 여의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참아내면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불굴의 정신으로 역사의 반전을 향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여정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1597년 4월 23일부터 24일까지 이틀 동안은 전주에서 남원까지 약 57km의 거리를 백의종군하며 걸었다.

이순신 장군의 전주에서 남원까지 57km의 백의종군로 여정

1597년 4월 23일 오전.
전주 남문 밖에서 임실 오원역까지 (전체 21km, 임실 구간 2km)
이순신 장군은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여정을 서둘렀다. 전주 남문 밖 유숙한 집에서 출발하여 만마동 노구암을 거쳐 소치(掃峙)에 이르렀다. 소치는 전주에서 남원 방면으로 가는 길목의 고갯마루이다. 이순신 장군은 지금의 임실 관촌 지역인 오원역에 도착하여 점심 겸해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말도 쉬게 하였다.

1597년 4월 23일 오후.
임실 오원역에서 임실 동헌까지 (9km)
이순신 장군은 오원역에서 다시 여정을 출발하여 오원강가에 이르렀다. 오원강을 표기한 고지도에는 '하선동교(夏船冬橋)'라는 어휘를 써 놓았다. 여름에는 배로 건너고 겨울에는 섶다리를 걸어 건넜다고 한다. 장군은 임실 동헌 부근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조선 시대 임실현 동헌은 지금의 봉황산 아래의 지역이다. 현재의 임실동중학교에는 그 당시 임실 객사가 있었다.

1597년 4월 24일 오전.
임실 동헌 부근에서 출발하여 말재를 넘는다. (12km)
이순신 장군은 여정을 다시 출발하여, 동쪽의 말재를 넘었다. 말재에서 대판이 봉천으로 내려가서, 성수산에서 발원하는 평당원천을 따라 오수면 국평들에 이르고 오수역참에 도착한다. 장군은 여기에서 긴 여정에 지친 심신에 잠시 휴식을 취했다.


1597년 4월 24일 오후.
임실 오수역을 떠나 남원부 동면에 이르다. (임실 구간 4km, 전체 15km)
이순신 장군은 오수역을 지나 남원부로 향했다. 이 여정에서 장군의 백의종군로는 임실 구간에서 남원 구간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수역에서 남원부로 가기 위해서는 율치를 넘는다. 장군은 남원부 10리 바깥의 동면에 위치한 어느 하인 집에 도착하여 유숙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4월 23일과 24일에 걸쳐 전주에서 출발하여 임실 구간을 걸어서, 남원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4월 27일에야 권율 장군이 머물고 있던 순천에 도착하여 한산도 수군의 정보를 접하였다. 8월 3일에는 진주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았다. 이순신 장군은 바로 조선 수군 재건을 시작하여 9월 16일에 명량 해전의 역사적인 승리를 이루어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국난을 극복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는 데는, 이름 없는 백성들의 희생, 육지와 바다에서 의병들의 활동,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신명을 바친 조선 군졸들의 헌신이 밑바탕이 되었다. 국난을 극복한 주체와 동력은 이름 없는 백성들과 군졸들이었다. 이러한 백성들과 군졸들의 중심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

해마다 봄이면 떠오르는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

1597년 4월에 이순신 장군은 국가와 민족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며 548km의 백의종군 길을 걸었다. 올해는 424년 되는 해이다. 이 기사를 쓰는 시민 기자는 임실 오원역에서 임실 동헌까지 9km의 구간을 걸어보며 백의종군로를 확인하였다.

4월 19일 오후에 임실 역전 버스정류소에서 임실 군내버스를 타고 관촌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교통비 부담 경감과 대중교통 활성화를 위한 농어촌버스 단일요금제를 실시하는 임실 군내버스 요금은 1000원으로 저렴하다. 관촌버스터미널에서 오후 2시 15분에 걷기를 시작하였다.

(14:15)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걷기로 관촌버스터미널을 출발하다.
조선 시대 오원역은 관촌버스터미널에서 오원강 쪽으로 더 나아가 터를 잡고 있었다고 한다. 오원역 터는 이 부근일 것이라 짐작하며 지나간다. 관촌버스터미널 앞의 도로를 따라 오원천 천변에 이르러 17번 도로의 인도를 따라 걷는다.
 

오원교 섬진강 상류인 오원강이다. 조선 시대에는 하선동교, 여름에는 배로 겨울에는 섶다리로 건넜다고 한다. ⓒ 이완우

 
(14:18) 오원강 교량을 인도를 걸어 건넌다.
17번 국도의 오원천 교량, 전라선 철도의 교량이 함께 어울려 섬진강 상류인 오원강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하선동교(夏船冬橋), 오원강을 여름에는 배로 건너고 겨울에는 섶다리를 걸어 건넜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을 어떻게 건넜을까?

(14:30) 관촌역 앞에 도착하다.
17번 국도를 따라 걷다가 관촌역(館村驛) 앞의 병암교차로에서 옛길을 찾아 임실 전원교회 옆길로 들어서서 농로를 걷다가 임실천 보를 건넌다. 창인리 책평들에서 예원대학교가 보인다. 책평들 농로를 걷다가 이 길을 걷는 분을 만나서,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을 걷고 있다며, 인증 사진을 한 장 찍어주기를 부탁하였다.
 

신평면 책평들 책평들의 백의종군로 옛길은 경지정리로 희미해졌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찾아야 한다. 이 기사를 쓴 시민 기자가 걷고 있다. ⓒ 이완우

 
(15:02) 용은치 고개를 넘어서 마을에 도착하다.
두곡리 용은치의 옛길을 찾아 걷다가 임실천을 다시 건너고, 17번 도로를 만나 임실휴게소 삼거리에 이른다.

(15:06) 17번 국도 옆 임실휴게소에서 두곡저수지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여기서 옛길은 두곡저수지 방향으로 향한다. 두곡리 임실휴게소에서 성가리에 이르는 지름길이 임실읍에 이르는 옛길이다. 그러나 현재는 임실역 앞 두곡삼거리에서 전주 방향, 임실읍 방향, 남원 방향으로 삼거리가 되는 두곡삼거리를 경유하는 도로가 이 지역의 간선도로가 되었다.
 

두곡저수지 장군이 걸었던 길은 지금 저수지 바닥에 잠겨 있다. 백의종군로는 이제 우리 마음에 새겨야한다. ⓒ 이완우


(15:15) 두곡저수지의 푸른 물결을 보다.
두곡저수지는 1970년대에 축조되었다. 장군이 걸었던 길은 지금 저수지 바닥에 잠겨 있다. 저수지의 푸른 물결에 햇빛이 반사되어 은물결로 찰랑거린다. 바람이 제법 불어서 저수지의 잔물결이 호반에 밀려와 자박자박 물결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바다의 파도 소리를 흉내 낸다.

(15:46) 옛날 임실 동헌 자리인 임실문화원에 도착하다.
저수지 호반 도로에 '산불조심' 깃발이 펄럭인다. 바람이 세어서 큰 깃발 펄럭이는 소리가 힘 있게 들린다. 이순신 장군을 맞이하는 조선 수군의 군기(軍旗)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얼마나 남해(南海)와 조선 수군을 걱정했을까? 고개를 넘어서 임실문화원에 도착하였다. 조선 시대 임실현 동헌 자리는 현재 임실문화원 부근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임실동중학교 부지에 임실 객사인 운수관이 있었다고 한다.
 

임실 동헌 자리 조선 시대 임실현 동헌 자리는 현재 임실문화원 부근으로 추정된다. ⓒ 이완우

임실 객사 운수관 자리 현재의 임실동중학교 부지에 임실 객사인 운수관이 있었다고 한다. ⓒ 이완우

 
2021년 4월 19일 오후에 임실 오원역이 있었던 부근의 관촌버스터미널에서 임실 동헌이 있던 임실문화원까지 9km의 백의종군로 일부 구간을 걸어보았다. 1시간 30분 걸렸다. 시속 6km의 속도였다. 관촌버스터미널에서 임실문화원까지 9km의 구간에 백의종군로에 대한 안내 표시판은 없다. 아쉬웠다.

조선 시대의 오원역에서 임실 동헌까지 9km의 길을 걸으면서, 옛길이 멀게 보면 직선에 가깝게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형도 변하고 도로도 변해서 옛길을 추정하며 찾아서 걸어야 했다. 가치 있는 문화적 유산인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는 우리의 마음에 새겨야 할 길이다. 지형이 변하고 도로 모습이 바뀌어도, DNA에 유전 정보가 보존되듯이 백의종군로의 원형과 정신은 생생하게 우리의 마음에 살아있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 걸었던 백의종군로는 단순한 여느 길이 아니다. 민족의 생존과 직결되었던 불굴의 도전 정신을 실천하는 길이었다. 백의종군로는 정신적 가치가 큰 민족적 자산이 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꽃처럼 피어난 국난 극복의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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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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