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도 못 본 아버지, 69년 원통함 풀고 영면하시길"

마산 구산면 앞 바다, 1950년 공권력이 민간인 수장... 합동추모제 지내

등록 2019.06.08 14:34수정 2019.06.0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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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하고 애통하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 영령들이시여. 세월은 강물처럼 무심히 흐르고 흘러 69년이 흘러갔습니다. 우리 후손들은 님들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완전한 진실규명과 해원을 다하지 못하고 이렇게 조촐하게 합동추모제를 모시는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후손들은 두 손 모아 엎드려 축원 드립니다."

창원 마산합포구 구산면 앞 바다인 '괭이바다'에서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이 바다에서 수장(水葬)되었던 민간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추모제가 열린 것이다.

(사)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회장 노치수)는 6월 8일 괭이바다에서 '제69주기 합동추모제'를 지냈다. 창원유족회가 이곳에서 합동추모제를 지내기는 이번이 12번째다.

"밤마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괭이바다'다. 이곳에서 민간인들이 집단 수장되었다는 사실은 정부 차원의 조사에서도 밝혀졌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는 창원지역 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창원 마산합포구 바닷가(해안공원 조성지구)-1950년 괭이바다 학살 당시 희생자들이 강제로 끌려간 부두"에 위령탑 건립을 권고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청사건 중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부산형무소 36명, 마산형무소 62명, 진주형무소 64명 등 총 162명이고, 신청사건 이외에 국가공식 기록과 참고인 조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부산형무소 112명, 마산형무소 296명, 진주형무소 6명으로 총 414명이라고 했다.

또 "전시 계엄령 하에서 계엄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각 지역 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헌병대에 인계되어 집단 살해되었고, 일부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며 "사건의 최종적 책임은 계엄령의 최고결정권자인 대통령과 국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창원유족회는 "이승만정부의 공권력에 의해 창원지역의 많은 민간인들이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불법학살 희생되었다"며 "정치적 살해며 부당한 죽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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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는 6월 8일 오후 창원 마산합포구 구산면 '괭이바다'의 선상에서 "제69주기 창원지역 합동추모제"를 지냈다. ⓒ 정영현

"애절하고 처절한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

합동추모제‧추모식은 선상에서 이루어졌다. 유족을 비롯한 참가자들이 이날 오전 마산돝섬터미널에서 유람선을 타고 괭이바다까지 나간 것이다.

김경미 부산민예총 춤위원장(춤패춤나래 예술감독)이 진홍무를 추고, 전통제례가 진행되었다.

유족들은 축문을 읽으면서 "이곳은 님들이 캄캄한 밤 오랏줄에 꽁꽁 묶여 끌려와 공포에 떨며 피눈물로 생의 마지막 절규를 한 곳입니다"며 "아직도 그때의 애절하고 처절한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고 했다.

유족들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고 바다 위에서, 깊은 바다 속서 떠돌고 계시는 영령들을 위하여 이곳 괭이바다 선상에서 무릎 꿇고 엎드려 맑은 술 올리며 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며 "부디 왕생극락 하옵소서"라고 빌었다.

이어 종교의례에서는 석봉 스님(국가무형문화제127호 아랫녘수륙재보존회)의 불교의식, 공명탁 목사(하나교회)의 기독교 의식이 진행됐다. 유족을 비롯한 참가자들은 여러 기원을 담은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추모식에서 노치수 회장은 "죽음의 괭이바다"라는 추모사를 통해 "저는 고향이 어촌이라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와 함께 자랐습니다"며 "푸르디푸른 바다는 늘 어머님의 푸근함을 느끼기도 한 곳이며 한 번도 뵌 기억이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려보기도 한" 곳이라고 했다.

이어 "통통배를 타고 거제도를 오고 가기도 했는데, 우리들의 꿈을 앗아간 곳이, 가정의 행복을 앗아간 곳이, 귀중한 자식과 사랑했던 남편, 우리 부모들이 비명으로 죽음을 맞이한 곳이 괭이바다라는 것을 어린 시절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하였습니다"고 했다.

그는 "1950년 이승만 정부의 하수인에 의해 마산형무소에 예비검속된 1681명 중 대부분이 수차례에 걸쳐 야밤에 오랏줄에 묶여 수장 당했다"며 "이곳에서 군인이나 경찰의 총탄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곳 괭이바다는 죽음의 바다이자 바다 무덤이기도 한 곳입니다"고 했다.

또 노 회장은 "거제 칠천도 앞바다에서, 통영 한산도 앞 바다에서, 남해 앞 바다에서 수장 학살시켰던 죽음들이 이곳을 거쳐 일본 대마도까지 떠내려갔을 것으로 추정하는 분들도 있으니 이곳 괭이바다는 이승만정부의 하수인들이 총칼로 만든 저승으로 가는 길이 되고만 곳이기도 합니다"고 했다.

허성무 창원시장은 창원유족회에 보낸 추모사를 통해 "과거의 불행하고 아픈 역사를 용서와 화해로 극복하고, 유가족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고 했다.

이찬호 창원시의회 의장은 추모사에서 "과거 불행하고 아픈 역사를 용서와 화해로 극복하고, 유가족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과제라 생각합니다"고 했다.

이창수 법인권사회연구소 대표는 "국가는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사람은 반성하기 때문에 사람다울 수 있습니다. 민주국가가 그 권력과 무력을 이용해 자국민을 학살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며 "국가의 잘못을 스스로 시정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민주 국가도, 국민의 국가도, 국민을 위한 국가도, 국민에 의한 국가도 아닙니다"고 했다.

이 대표는 "국가는 공식적으로 조사해 학살의 진실을 밝히고, 통한의 세월을 살아온 유가족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공식적으로 배상해야 합니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 공식적으로 기억해야 합니다"며 "당시 군법회의라는 가짜 재판으로 사형을 받으신 분들에 대해서 법원은 재심에서 무죄를 판결해야 합니다"고 했다.

또 이창수 대표는 "오늘 우리가 갖는 이 추모의 시간은 당시 학살의 진실을 밝히는 의지를 모으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이 진실과 평화의 바다가 되어 영령들이 안식할 수 있도록 열정과 지혜를 더해 특별법 쟁취와 재심 승리를 확인하는 자리입니다"고 했다.

안승운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이사장은 "이제는 진실이 승리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승만정권 이후 9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가족과 친척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해왔고, 연좌제의 굴레를 씌워 놓았으니 그 고초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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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는 6월 8일 오후 창원 마산합포구 구산면 '괭이바다'의 선상에서 "제69주기 창원지역 합동추모제"를 지냈다. ⓒ 정영현

"괭이바다 서러운 눈물을 보냅니다"

아버지를 잃은 황정둘(창원유족회)씨는 "아버지께 띄우는 편지"를 읽었다. 황씨는 "스무 살에 홀로 된 어머닌 지금 아흔입니다"며 "어머니는 이젠 아픈 마음도 다 사라지고 기억도 잊어버렸다지만 70년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며 눈물을 보였다.

박덕선 시인은 "유월, 푸르러 더 섧다"는 제목의 추모시에서 "… 잠시 다녀오마, 못자리 깔던 흙손, 무심히 털던 발걸음/죄 없는 눈동자를 향해 총화를 뿜은 그들이/우리 대통령, 우리 면서 우리 지서 우리 국군이었습니다/제 백성의 목숨을 낙엽처럼 버린 그들의 법에게/오늘은 이 오욕의 세월과 연좌제 올가미의 한과/피울음의 소장을 올립니다/용서 한 번 빌지 않는 저들의 심장에/괭이바다 서러운 눈물을 보냅니다/님들이 뿌린 피의 꽃으로 얻은/정의와 평화를 위한 노래를 바칩니다 …"고 했다.

다음은 황정둘씨가 쓴 "아버지께 띄우는 편지" 전문이다.

사랑하는 아버지께-황정둘

한번이라도 얼굴 마주하며 불러 보고 싶었던 아버지! 저 아버지의 둘째 딸 황정둘입니다. 저가 태어났을 때는 아버지가 안계셨다고 얘기 들었습니다. 전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모르고 살았으니 아버지가 어떤 분이며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이, 아버지의 정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숲과 개울이 좋은 곡안리 우리 마을엔 한국전쟁 난리 통에 보도연맹에 끌려간 남자가 12명이라 들었어요. 엄마처럼 혼자 사는 아지매들이 많아 그러려니 하고 살았습니다. 단지 세상 살다 너무 힘들면 내가 아버지가 있었으면 덜 힘들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스무 살에 홀로 된 어머닌 지금 아흔입니다. 지금은 제가 어머니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시집오시고 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그 집에서 제가 태어나 자랐던 집을 새로 짓고 장인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편이랑 살고 있어요. 당시 세 살이었던 언니도 마을회관 옆에 기와집 짓고 외롭게 홀로 사시는 어머니 곁에 살고 있습니다.

어머닌 홀몸으로 할머니 모시고 두 딸 키우며 열서너 마지기 농사를 혼자 감당해야 했습니다. 전쟁 통에 피란 갔다 돌아오니 마을은 불타고 집은 풍비박산이 나도 집 지을 사람도 없었답니다. 밭을 가려면 지천으로 깔린 시체를 넘어가야 했다고 하더군요. 제가 엄마에게 "아버지를 안 찾았냐?"고 물으면 " 내 어디 안 가고 여기 있는데 길을 모르나 집을 모르나 찾긴 어디 가서 찾으라고?"

어머니는 이젠 아픈 마음도 다 사라지고 기억도 잊어버렸다지만 70년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생각날 땐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와도 생각이 나고 구름이 쉬어가도 생각이 난다. 낙엽이 떨어져도 생각이 나고 강물이 흘러가도 생각이 난다. 기약도 없이 소식도 없이 떠나버린 야속한 님아! 돌아온다 약속해 놓고 떠나버린 그 님은 어디 가고 돌아올 줄 모르나" 사랑이 머물던 자리, 그리움이 머물던 자리 곡안리에서 어머니가 아버지의 영혼이라도 기다리십니다.

아버지! 2009년도에 국가에서 진실규명을 한다고 해 진실규명을 신청을 하고 얼마 후 그때서야 아버지가 학살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억울한 것을 억울타 하소연 못하고 원통하다 말 못한 어머니의 찢어지는 그 심정 누가 알겠습니까?

아버지! 꿈에라도 나타나 한 평생 아버지만 기다리다 사신 우리 어머니, 남편의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어머니를 단 한번이라도 "사랑했노라"고 안아드리고 업어 주이소 예~. 아버지! 이제 아버지의 진실규명과 원통함도 풀릴 날도 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버지! 이제 모든 원한을 푸시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 가셔서 영면하시길 저의 두 딸은 기원하겠습니다.

2019년 6월 8일 아버지가 보고 싶었던 둘째딸 황정둘 올림.
#괭이바다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창원유족회 #이승만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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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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